니케아 신경
381 ·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
해설
니케아 신경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가 아리우스에 맞서 고백하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성령에 관한 고백을 더해 완성한 신경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신 참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을 중심에 둔 이 신경은, 동방과 서방의 교회들이 가장 널리 함께 고백하는 신앙의 기준입니다.
니케아에서 콘스탄티노플까지
4세기 초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아리우스는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시라는 고백을 지키려는 마음으로, 아들은 아버지께서 무로부터 지으신 첫 피조물이며 ‘그분이 계시지 않은 때가 있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잠언에서 지혜가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을 아들에 관한 말씀으로 읽었습니다 (잠 8:22). 그가 읽은 헬라어 구약은 그 구절을 ‘주께서 나를 지으셨다’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고 부르는 바울의 말도 그는 같은 뜻으로 보았습니다 (골 1:15).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드로스가 그를 정죄했으나 논쟁은 동방 교회 전체로 번졌습니다.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니케아에 감독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전통은 그 수를 318명이라 하고, 학자들은 250–300명쯤으로 봅니다. 공의회는 아들이 ‘아버지의 본질에서’ 나셨고 지음을 받지 않으셨으며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시라고 고백하고, 끝에 아리우스의 말들을 정죄하는 조항을 달았습니다. 이 첫 신경은 성령에 관해서는 ‘그리고 성령을 믿습니다’라는 한마디로 끝났습니다.
논쟁은 그 뒤에도 반세기 동안 이어졌습니다. 황제가 바뀔 때마다 형세가 뒤집혔고, 니케아의 고백을 굳게 지킨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우스는 다섯 번이나 유배를 당했습니다. 359년의 교회회의들이 아들은 아버지와 ‘닮았다’고만 말하는 신조를 받아들였을 때, 히에로니무스는 온 세상이 신음하며 자기가 아리우스파가 된 것에 놀랐다고 썼습니다. 그사이 가이사랴의 바실리우스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하나님이 한 본질(우시아)과 세 위격(휘포스타시스)으로 계신다고 정리했습니다. 아들의 신성은 받아들이면서도 성령은 피조물이라고 보는 이들이 나타난 것도 이 무렵입니다.
381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소집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는 동방의 감독 150명쯤이 모였습니다. 공의회는 니케아의 신앙을 다시 확인했고, 오늘 ‘니케아 신경’이라 부르는 본문은 이 공의회의 신경으로 전해집니다. 그래서 정확히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이라고 합니다. 325년의 신경과 견주면 정죄 조항이 빠지고, 그리스도의 나라가 끝이 없다는 고백과 성령에 관한 긴 고백, 그리고 교회와 세례와 부활의 고백이 더해졌습니다. 남아 있는 기록으로는 이 본문이 451년 칼케돈 공의회의 회의록에 처음 나타나며, 칼케돈이 이를 ‘150명 교부의 신앙’으로 받아들이면서 온 교회의 신경이 되었습니다.
이 신경은 곧 성찬 예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동방에서는 5세기 말 안디옥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지며, 6세기 초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성찬 예배마다 이 신경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서방에서는 589년 톨레도 공의회가 스페인 교회의 미사에서 주기도문 앞에 회중이 이 신경을 소리 높여 부르게 했고, 이 관습이 프랑크 왕국으로 퍼졌습니다. 로마 교회는 1014년에야 미사에 이 신경을 넣었습니다. 회중은 한 믿음을 고백하고 주의 식탁에 나아갔습니다.
한 분 하나님, 한 분 주
신경은 공의회에 모인 교회의 공동 고백이기에 ‘우리는 … 믿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첫째 단락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한 분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이 날마다 외운 "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 하나님은 한 주시니"라는 고백을 (신 6:4) 신약의 교회는 이렇게 이어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나니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분 안에 있노라. 또 한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나니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느니라.
고전 8:6
신경의 첫 두 단락은 바울의 이 문장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다 창조되었다는 말씀을 되울립니다 (골 1:16). 천사와 영적 권세들까지 모두 피조물이니, 하나님과 겨루는 또 하나의 근원은 없습니다. 개혁교회도 벨직 신앙고백 8조에서 성부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원인이시요 기원이시며 시작’이라고 고백합니다.
둘째 단락이 이 신경의 심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합니다 (요 3:16). ‘독생자’로 옮긴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ής)는 같은 종류가 하나뿐인 유일한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은혜로 입양된 자녀이고, 그분은 본래 아들이십니다. 힐라리우스는 이 이름이 입양이라는 생각을 막는다고 말합니다. "그가 아들 외에 독생자라고도 부름으로써, 입양에 대한 모든 의심을 완전히 끊었기 때문입니다" 힐라리우스.
‘모든 세상 이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니’는 아들의 나심이 시간 속의 사건이 아니라는 고백입니다. 아리우스가 첫 피조물의 증거로 읽은 ‘먼저 나신 자’라는 말도 그렇게 읽을 수 없습니다. 매튜 헨리는 이 말을 "어떤 피조물이 만들어지기 전에 나신 분이니, 이것은 영원을 나타내는 성경의 방식"이라고 풉니다 매튜 헨리. 바로 다음 절도 만물이 "이는 그분에 의해 모든 것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라.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왕좌들이나 통치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창조되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노라."라고 말하여 (골 1:16) 그분을 창조주 쪽에 둡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은 같은 진리를 세 번 거듭 말합니다. 히브리서는 아들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 자체의 정확한 형상이시며 자신의 권능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떠받치시는 이 아들께서는 친히 우리의 죄들을 정결하게 하신 뒤에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라 부릅니다 (히 1:3). 불이 있으면 그 빛남도 함께 있듯이, 아버지는 아들 없이 계신 적이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비유를 들어 "광채 없는 불을 내게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나도 여러분과 함께 아버지께서 아들 없이 계셨다고 믿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아리우스파는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이라는 말씀을 (요 17:3) 아버지에게만 돌렸지만, 요한은 아들을 두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사 우리가 진실하신 분을 알게 하셨음을 우리가 알며 또 우리가 진실하신 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아노니 이분은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시니라."고 말합니다 (요일 5:20).
‘나셨으나 지음을 받지 않으셨고’는 아리우스와의 차이를 가장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사람은 사람을 낳고, 집이나 그릇은 만듭니다. 낳은 것은 낳은 이와 같은 본성을 지니지만, 만든 것은 만든 이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그 중간은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1:3을 풀며 "만일 그것이 지어지지 않았다면 피조물이 아닙니다. 그러나 피조물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버지와 같은 본질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신경이 이 단락을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음을 받았습니다’로 마치는 것도 같은 까닭입니다. 요한은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만들어진 것 중에 그분 없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요 1:3). 만물을 지으신 분은 만물 가운데 하나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시며’입니다. 니케아가 고른 말은 ‘같은’을 뜻하는 호모스와 ‘본질’을 뜻하는 우시아를 합친 호모우시오스(ὁμοούσιος)로, 성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공의회가 이 말을 쓴 것은, 아리우스파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하나님에게서 나신 분 같은 성경의 말을 모두 받아들이고서 자기 뜻으로 풀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말로만 묻는 한 그들은 무엇에든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칼뱅은 아리우스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 부르면서도 그분이 지음을 받았다고 중얼거렸기에, ‘동일 본질’이라는 말이 그 가면을 벗겨 냈고 그러면서도 성경에 아무것도 더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칼뱅, 기독교 강요 1권 13장. 성경 밖의 한 말이 성경의 뜻을 지킨 것입니다.
이 말은 아들이 아무리 높아도 피조물이라는 생각을 물리치고, 아들이 아버지와 ‘비슷한 본질’(호모이우시오스)일 뿐이라는 타협도 물리칩니다. 비슷한 것은 같은 것이 아니어서, 그 사이에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거리가 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동일 본질은 아버지와 아들이 한 위격이시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경은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나셨다고 말하여 두 분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삼위일체 과에서 더 다룹니다.
이것은 구원과 예배가 걸린 문제였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의 말씀이 몸소 사람이 되셨기에 썩음과 죽음에 빠진 사람이 새로워질 수 있었다고 가르쳤습니다 아타나시우스,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피조물은 우리를 하나님께 이어 줄 수 없으니, 우리를 구원하신 아들은 참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또 112년 무렵 소 플리니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신처럼 찬송한다고 황제에게 보고했습니다 소 플리니우스, 서간집 10.96. 아들이 피조물이라면 교회가 처음부터 드려 온 이 예배는 우상 숭배가 되고 맙니다. 개혁교회도 그리스도께서 ‘영원부터 나셨으며, 지음을 받거나 창조되지 않으셨고(그렇다면 그분은 피조물이 되실 것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벨직 신앙고백 10조.
우리를 위하여 오신 아들
셋째 단락은 영원하신 아들이 무엇을 하셨는지 고백합니다. 그 첫 말은 ‘우리 사람을 위하여, 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이고, 이 까닭이 단락 전체를 이끕니다. 그분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가지 아니하였느니라."이십니다 (요 3:13). 바울은 그분이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워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들의 모습이 되셨으며"라고 말합니다 (빌 2:6-7).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육신하시어 사람이 되셨고’는 요한의 고백과 같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사람이 되셨고’는 그분이 사람처럼 보이신 것이 아니라 몸과 영혼을 지닌 참 사람이 되셨다는 고백입니다. 니케아가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시라고 고백했다면, 451년의 칼케돈 신앙정의는 같은 그리스도께서 신성으로는 아버지와, 인성으로는 우리와 동일 본질이시라고 이어서 고백했습니다. 성육신과 참 하나님, 참 사람 과에서 더 다룹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에도 ‘우리를 위하여’가 다시 나옵니다. 십자가는 의인이 당한 불행이 아니라 우리 죄를 위한 죽음입니다. 부활에 붙은 ‘성경대로’는 바울이 전한 복음의 요약에서 왔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묻히셨다가 성경 기록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시고"라고 전합니다 (고전 15:4). 구약이 약속한 일이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빌라도와 장사에 관해서는 사도신경 해설에서 더 다룹니다.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고’는 지금 그분이 계신 자리를 말합니다. 마가는 주께서 "이렇게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뒤에 하늘로 올려져서 영접을 받으시고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시니라."고 기록합니다 (막 16:19).
381년의 신경은 재림에 ‘영광 가운데’를 덧붙였습니다. 처음에 낮은 모습으로 오신 분이 이번에는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 중에 모든 거룩한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의 영광의 왕좌에 앉아서"라는 말씀대로 오십니다 (마 25:31). 마지막 구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도 이때 더해졌습니다. 흔히 아들의 다스림이 언젠가 끝난다고 가르쳤다는 안키라의 마르켈루스를 겨냥한 구절로 봅니다. 신경은 천사의 약속을 붙듭니다. "그가 영원토록 야곱의 집을 통치하며 그의 왕국이 무궁하리라, 하니라." (눅 1:33).
성령과 ‘그리고 아들에게서’
381년 공의회가 가장 크게 넓힌 것은 넷째 단락입니다. 성령을 섬기는 영으로 낮춘 이들에 맞서 바실리우스는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함께 세례를 받았으니 세 분께 함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변호했습니다 바실리우스, 성령론. 공의회는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만 드리는 이름과 예배를 성령께 드림으로 같은 것을 고백했습니다.
‘주님이시요’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바울은 "이제 주께서는 그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거기에는 자유가 있느니라."라고 씁니다 (고후 3:17). ‘생명을 주시는 분’은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시편은 "주께서 주의 영을 보내시매 그것들이 창조되었사온즉 주께서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고 노래하고 (시 104:30), 예수께서는 "살리는 것은 영이며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요 6:63).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며’라는 고백은 예수께서 세례를 주라고 하신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며"라는 한 이름에 뿌리를 둡니다 (마 28:19).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분’이라는 고백은 구약과 신약을 잇습니다. 선지자들은 "대언은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오지 아니하였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자기들을 움직이시는 대로 말하였느니라." 사람들로서 말했고 (벧후 1:21), 그들 속에서 미리 증거하신 분은 "자기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뒤에 있을 영광을 미리 증언해 주실 때에 그 영께서 무엇을 혹은 어느 때를 표적으로 보여 주셨는지 탐구하였느니라."이셨습니다 (벧전 1:11).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3문은 이 성령께서 내게도 주어지셨다고 고백합니다.
이 페이지의 본문은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시고’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381년의 원문은 ‘아버지에게서 나오시고’였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위로자 곧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께서 오실 때에 그분께서 나에 대해 증언하실 것이요,
요 15:26
‘나오시는’은 에크포레우오(ἐκπορεύω)의 현재형이고, 신경은 이 말로 성령이 영원히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일, 곧 아들이 나시는 것과 구별되는 성령의 고유한 근원을 가리켰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서’를 라틴어로 필리오케(filioque)라고 합니다. 이 가르침은 일찍부터 서방에 있었지만, 이 말이 신경에 들어간 것은 흔히 589년 톨레도 공의회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이 공의회에서 서고트 왕 레카레드는 아리우스파 신앙을 버리고 니케아의 신앙을 공식으로 받아들였는데, 많은 학자는 이 말이 아들이 아버지와 온전히 동등하시다는 것을 힘주어 말하려는 뜻이었다고 봅니다. 이 문구는 프랑크 왕국으로 퍼졌고, 교황 레오 3세는 가르침 자체에는 동의하면서도 공의회의 신경에 말을 더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고 전해지지만, 로마도 1014년 미사에 신경을 넣으면서 이 문구를 받아들였습니다.
동방 교회는 이 덧붙임에 두 가지로 반대해 왔습니다. 하나는 온 교회가 공의회에서 함께 고백한 신경을 서방이 공의회 없이 홀로 고쳤다는 것입니다. 431년 에베소 공의회는 니케아에서 정한 신앙과 다른 신앙을 내세우지 말라고 정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신학의 문제입니다. 정교회는 아버지께서 아들과 성령의 유일한 근원이시며, 성령이 영원히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일과 아들이 성령을 세상에 보내시는 일은 구별해야 한다고 봅니다. 요한복음 15:26도 ‘내가 보낼’과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을 나누어 말합니다. 동방의 테오필락투스는 이 구절을 풀며 "나오시는 것은 보내심을 받는 것과 같지 않으며, 아버지로부터 오시는 성령의 본질적 본성입니다"라고 씁니다 테오필락투스. 9세기 총대주교 포티우스가 이 반론을 날카롭게 폈고, 이 문제는 1054년 동서방 교회가 갈라질 때의 쟁점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서방 교회는 이 고백이 성경에 뿌리를 둔다고 봅니다. 성령은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속에 보내사,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짖게 하셨느니라."이시고 (갈 4:6) "그러나 너희 안에 하나님의 영께서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 있나니 이제 어떤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는 그분의 사람이 아니니라."이시며 (롬 8:9),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분께서 이것을 말씀하시고 그들 위에 숨을 내쉬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령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요 20:22).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의 영이시라고 하면서도, 아들이 이것조차 아버지에게서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아들이 신성을 받으신 그분에게서, 성령이 자기에게서 나오신다는 것도 받으셨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그래서 그는 성령이 ‘주로’ 아버지에게서 나오신다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삼위일체론. 서방도 아버지께서 근원이시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개혁교회를 비롯한 서방의 개신교회들은 필리오케가 든 신경을 받아 고백해 왔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장 3항은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고 고백하고, 대요리문답 10문도 같습니다. 벨직 신앙고백 8조와 11조도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다고 고백하며, 9조가 받아들이는 아타나시우스 신경도 그렇습니다. 그러면서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같은 항에서 ‘성부는 누구에게서도 나지 않으셨고’라고 하여, 아버지께서 근원이 없으신 분이심을 분명히 합니다.
오늘 교회들은 이 문제를 서로 정죄하기보다 대화로 다루고 있습니다. 동방 교부들 가운데에는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아들을 통하여’ 나오신다고 말한 이들이 있었고,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성령을 아들의 영이라 부르면서도 아들에게서가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에게서 나오신다고 가르쳤습니다 다마스쿠스의 요한, 정통 신앙에 대한 정확한 해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동방과 서방의 두 표현이 굳어지지 않는 한 같은 신비를 서로 보완하여 말한다고 설명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세계교회협의회 신앙과 직제 위원회는 1979년에 381년의 원문을 모든 교회가 함께 쓸 규범으로 인정하자고 제안했고, 성공회의 람베스 회의도 이 구절을 빼는 것을 생각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개혁교회와 정교회의 신학 대화도 1990년대 초 삼위일체에 관한 합의문을 냈습니다. 두 전통은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는 참 하나님이시라는 데 한마음입니다. 성령은 누구신가 과도 보십시오.
교회와 세례와 오는 세상
다섯째 단락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로 이어집니다. 신경은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이 네 말을 흔히 교회의 네 표지라 부릅니다. 바울은 교회가 하나인 까닭을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것 같이 한 몸과 한 성령이 있고 한 주와 한 믿음과 한 침례가 있으며 한 하나님이 계시니 곧 모든 것의 아버지시라. 그분께서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에 두루 계시며 너희 모두 안에 계시느니라.
엡 4:4-6
교회가 하나인 것은 한 주님과 한 성령과 한 아버지께 속했기 때문이고, 거룩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이것은 그분께서 말씀을 통해 물로 씻음으로 교회를 거룩히 구별하고 정결하게 하려 하심이요" 하시기 때문입니다 (엡 5:26). ‘보편적’은 사도신경의 ‘공회’와 같은 catholic을 옮긴 말로, 모든 곳과 모든 시대의 교회를 아우르는 ‘공교회’를 가리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장 1항. ‘사도적’은 교회가 "또 사도들과 대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자들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으뜸 모퉁잇돌이 되시나니" 세워졌다는 뜻입니다 (엡 2:20).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는 이 사도성을 사도들로부터 이어진 감독직에서도 보고, 개신교회는 무엇보다 성경에 담긴 사도들의 가르침을 지키는 데서 봅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과에서 더 다룹니다.
‘죄 사함을 위한 한 세례’는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를 되울립니다. 그는 "이에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회개하고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 죄들의 사면을 얻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님을 선물로 받으리니"고 외쳤습니다 (행 2:38). 세례가 하나라는 것은 한 번만 받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고대 교회는 분파에서 받은 세례를 두고 씨름한 끝에, 대체로 삼위의 이름으로 베푼 세례는 되풀이하지 않았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8장 7항도 ‘세례의 성례는 어떤 사람에게도 한 번만 집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례와 죄 사함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교회마다 조금씩 다르게 설명합니다.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와 루터교회는 세례를 통해 죄 사함과 새 생명이 주어진다고 가르치고, 개혁교회는 세례를 죄 사함의 ‘표와 인’으로 고백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8장 1항. 세례와 성찬 과에서 더 다룹니다.
신경은 ‘죽은 자의 부활과 오는 세상의 생명을 기다립니다’로 끝납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에 놀라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자들이 그의 음성을 듣고 나올 때가 오고 있나니"라고 하셨고 (요 5:28), 바울은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일어나고 우리가 변화되리니"라고 말합니다 (고전 15:52). 다시 사는 것은 다른 몸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몸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2장 2항. ‘오는 세상의 생명’은 영혼만 떠나가는 하늘이 아니라, 하나님이 새롭게 하실 온 세상에서 누릴 생명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말씀하십니다. "왕좌에 앉으신 분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내게 이르시되, 이 말들은 참되고 신실하니 기록하라, 하시며" (계 21:5). 부활, 심판, 새 하늘과 새 땅 과에서 더 다룹니다.
오늘 교회가 니케아 신경을 쓰는 자리
정교회는 성찬 예배 때마다 성찬 기도에 앞서 온 회중이 이 신경을 고백하고, 가톨릭 교회는 주일과 대축일 미사에서 강론 뒤에 이를 고백합니다. 성공회와 루터교회의 성찬 예배에서도 이 신경을 씁니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주일 예배에서 주로 사도신경을 고백하는데, 사도신경이 짧게 말하는 아들과 성령의 고백을 이 신경이 풀어 줍니다.
종교개혁의 고백들도 이 신경 위에 섰습니다. 루터교회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첫 조항에서 니케아 공의회가 하나님의 한 본질과 세 위격에 관해 정한 것이 참되다고 고백하며 시작합니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1조. 벨직 신앙고백 9조는 사도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과 함께 이 신경을 기꺼이 받아들인다고 고백하고, 아리우스를 교부들이 정당하게 정죄한 이들 가운데 꼽습니다.
니케아 신경은 예배하는 교회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예수는 하나님께 가장 가까운 피조물이 아니라 ‘참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이시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바울과 함께 고백합니다. "논쟁의 여지가 없이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는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시고 세상에서 믿기시고 영광 속으로 올려져서 영접을 받으셨느니라." (딤전 3:16). 이 신경 위에 세운 개혁교회의 고백들은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에서 볼 수 있습니다.
출처
본문
우리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한 분 하나님을 믿습니다.
영어 원문
We believe in one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and of all things visible and invisible.
또 우리는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모든 세상 이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니,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이시요, 나셨으나 지음을 받지 않으셨고,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시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음을 받았습니다.
영어 원문
And in one Lord Jesus Christ, the only-begotten Son of God, begotten of the Father before all worlds; God of God, Light of Light, very God of very God; begotten, not made, being of one substance with the Father, by whom all things were made.
그분은 우리 사람을 위하여, 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육신하시어 사람이 되셨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고난을 받으시고 장사되셨고, 성경대로 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고, 영광 가운데 다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며,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영어 원문
Who, for us men and for our salvation, came down from heaven, and was incarnate by the Holy Spirit of the virgin Mary, and was made man; and was crucified also for us under Pontius Pilate; He suffered and was buried; and the third day He rose again, according to the Scriptures; and ascended into heaven, and sits on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and He shall come again, with glory,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whose kingdom shall have no end.
또 우리는 성령을 믿습니다. 그분은 주님이시요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영어 원문
And we believe in the Holy Ghost, the Lord and Giver of Life; who proceeds from the Father and the Son; who with the Father and the Son together is worshipped and glorified; who spoke by the prophets.
또 우리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위한 한 세례를 인정하며, 죽은 자의 부활과 오는 세상의 생명을 기다립니다. 아멘.
영어 원문
And we believe in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 We acknowledge one baptism for the remission of sins; and we look for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the life of the world to come. Amen.
본문: 공개 저작물(Creeds.json; 필립 샤프, 『기독교 신조집』, 1877). 사도신경은 전해 내려온 우리말 고백문.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