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읽기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아타나시우스 · 4세기 초

영어 본문: A. 로버트슨 영역(1885, 개정 1891), 『니케아와 니케아 이후 교부들』 제2집 4권(1892) · 위키문헌 · 우리말은 이 영어 본문에서 옮겼습니다.

해설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는 아타나시우스가 하나님의 말씀이 왜 사람이 되어 죽고 다시 사셔야 했는지를 창조에서부터 차근차근 풀어 쓴 짧은 변론으로,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한 줄에 꿰어 보여 주어 오늘까지 읽히는 교부 시대의 고전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우스는 296년 무렵 이집트의 큰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젊은 부제였던 그는 325년 감독 알렉산드로스를 따라 니케아 공의회에 갔고, 328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그 뒤 373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마흔다섯 해 동안 감독으로 있으면서, 아들이 아버지와 같은 참 하나님이시라는 니케아의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 때문에 황제들의 뜻이 바뀔 때마다 쫓겨나 모두 다섯 번 유배를 떠났습니다. 사막의 수도사 안토니우스의 전기를 쓴 이도, 367년의 부활절 서신에서 오늘의 신약 27권을 그대로 열거한 가장 이른 목록을 남긴 이도 그였습니다 아타나시우스, 제39 부활절 서신. 그의 생애와 니케아 논쟁은 신학 과정의 니케아: 성자는 참 하나님이신가 과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는 두 권으로 된 한 작품의 뒷권입니다. 앞권 『이교도 반박』(Contra Gentes, 『이방인 반박』으로도 옮깁니다)은 우상 숭배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리고 만물을 다스리시는 아버지의 말씀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루었고, 이 책은 그 말씀이 사람이 되신 일로 나아갑니다 1.1. 책은 그리스도를 참으로 사랑하는 한 벗에게 건네는 말로 시작합니다. 본문은 그를 마카리우스라고 부르며 그 이름에 걸맞은 이라고 하는데, 그리스어 마카리오스는 ‘복된’이라는 뜻이어서 이것이 실제 이름인지, 벗을 복된 이라고 부르는 말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누구였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글을 쓰는 까닭도 첫머리에 밝힙니다. 유대인은 헐뜯고 그리스인은 비웃지만 우리는 예배하는 말씀의 나타나심을 풀어 보여서, 말씀이 낮아지신 것처럼 보일수록 벗의 경건이 더 자라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조롱할수록 그분은 오히려 자기 신성을 더 드러내신다고 그는 덧붙입니다 1.2. 바울도 같은 걸림돌 앞에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노니 그분은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들에게나 그리스인들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이시요 하나님의 지혜이시니라.

고전 1:23-24

언제 쓴 책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책에는 아리우스의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아리우스 논쟁이 번지기 전, 아타나시우스가 아직 젊었던 318년 무렵의 책으로 여겨졌지만, 오늘날에는 그가 감독이 된 뒤인 330년대 무렵에 썼다고 보는 학자도 많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 책에는 그가 평생 붙든 확신이 이미 들어 있습니다. 사람을 처음 지으신 분만이 사람을 다시 지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확신이 훗날 아들을 피조물로 보는 가르침에 맞선 그의 긴 싸움을 떠받쳤습니다.

쉰일곱 절의 짧은 변론

이 책은 길지 않습니다. 쉰일곱 절로 나뉘어 있는데, 이 나눔은 아타나시우스가 아니라 후대 편집자들의 것입니다. 서재에는 이 책 전체가 다섯 부분으로 실려 있습니다. 1–10절은 창조와 타락에서 시작해, 말씀이 사람이 되신 첫째 까닭, 곧 사람을 죽음과 썩음에서 건지시려는 뜻을 밝힙니다. 11–19절은 둘째 까닭, 곧 사람이 잃어버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되찾아 주시려는 뜻을 다룹니다. 20–32절은 십자가의 죽음과 사흘 만의 부활을 하나하나 묻고 답하며, 33–45절은 성육신과 십자가를 믿지 않는 유대인과 그것을 비웃는 그리스인에게 차례로 답합니다. 마지막 46–57절은 그의 시대에 눈앞에서 일어나던 일들을 증거로 들고, 성경을 더 깊이 읽으라는 권면과 송영으로 끝납니다.

앞권 『이교도 반박』은 서재에 없지만, 이 책이 앞에서 말했다며 가리키는 곳은 몇 군데뿐이어서 이 책만 읽어도 흐름을 놓치지 않습니다. 책 전체를 움직이는 것은 한 물음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야 했는가? 아타나시우스는 이 물음을 거듭 던지고, 무엇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참되심에 합당한가를 따져 답합니다. 그가 ‘해야 했다’고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 위에 있는 어떤 필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답게 행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논증은 차가운 증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 얼마나 하나님다운지를 보여 주려는 경배의 논증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야 했는가

아타나시우스는 성육신을 말하기 전에 창조부터 말합니다. 피조 세계를 새롭게 하신 분이 처음 그것을 지으신 바로 그 말씀이심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1.4. 요한도 그 말씀을 두고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만들어진 것 중에 그분 없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더라."라고 말합니다 (요 1:3). 하나님은 우연으로도, 이미 있던 물질로도 아니라 무로부터 만물을 지으셨고 3.1, 사람에게는 그 위에 더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자기 형상을 따라 지으시고 말씀의 능력에 참여하게 하셔서, 이성 있는 존재로 하나님 안에서 복된 삶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3.3. 아타나시우스에게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이 본래 지닌 힘이 아니라 은혜로 받은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버리고 스스로 악을 꾀했습니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경고하셨고 (창 2:17), 그 말씀대로 죽음이 왕처럼 사람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4.4. 그가 말하는 죽음은 숨이 끊어지는 일만이 아니라 썩음, 곧 무에서 나온 존재가 다시 무로 흩어져 가는 일입니다. 사람은 무에서 나왔으니 본래 죽을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 머물렀다면 그 썩음을 멈추고 썩지 않는 삶을 살았으리라는 것입니다 4.6. 그러니 죄는 나쁜 행동에 그치지 않고 사람의 존재 자체를 죽음 쪽으로 기울게 했습니다. 이 생각은 교리 과정의 타락 과에서 더 이어집니다.

여기서 이 책의 유명한 물음이 나옵니다. 손수 지으신 이성 있는 피조물이 썩어 없어져 가는데, 선하신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야 했는가 6.7.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맞지 않습니다. 지어 놓고 버려두실 바에야 처음부터 짓지 않으신 편이 나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죽으리라 하신 말씀을 없던 일로 하시면 진리의 아버지께서 거짓을 말씀하신 셈이 됩니다 7.1. 그러면 사람에게 회개를 요구하시면 되지 않는가? 아타나시우스는 회개가 죄짓는 일은 멈추게 해도 이미 썩음에 빠진 본성을 되돌리지는 못한다고 답합니다 7.3. 처음에 무에서 만물을 지으신 말씀만이 썩을 것을 썩지 않음으로 되돌리실 수 있고, 모든 이를 위하여 고난받으시며 모든 이를 위해 아버지 앞에 서실 수 있었습니다 7.5.

그래서 말씀이 오셨습니다. 그분은 본래 우리에게서 멀리 계신 적이 없었지만 8.1, 이제 동정녀에게서 우리와 다르지 않은 몸을 취하셔서 자기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가 죽음의 판결 아래 있었으므로 그 몸을 모든 이를 대신하여 죽음에 내주셨습니다. 모든 이가 그분 안에서 죽은 셈이 되어 사람을 망하게 하던 법은 그 힘을 다 썼고, 그 몸에 거하신 생명 때문에 죽음은 불 앞의 지푸라기처럼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8.4. 큰 임금이 한 도시의 한 집에 머물면 도적이 그 도시를 넘보지 못하듯, 만유의 임금께서 우리 가운데 한 몸에 거하시자 원수의 모든 음모가 꺾였습니다 9.3. 그가 두 번이나 인용하는 히브리서의 말씀이 이 모든 것을 요약합니다.

그런즉 자녀들은 살과 피에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의 일부를 취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죽음을 통해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또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 내려 하심이라.

히 2:14-15

11–19절은 둘째 까닭으로 넘어갑니다. 사람은 형상을 받고도, 창조 세계를 보고도, 율법과 선지자에게서 듣고도 하나님을 알기를 버리고 우상과 마술로 돌아섰습니다 12절. 사람도 천사도 이 형상을 되살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형상을 따라 지어졌을 뿐 형상 자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13.7. 아타나시우스는 이것을 초상화에 견줍니다. 판자에 그린 초상이 얼룩져 지워지면 그 얼굴의 주인이 다시 와서 앉아야 같은 나무 위에 새로 그릴 수 있습니다. 그림 때문에 판자를 버리지 않듯, 아버지의 참 형상이신 아들이 몸소 오셔서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새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14.1.

좋은 선생이 높은 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내려와 쉬운 것부터 가르치듯 15.1, 말씀은 눈에 보이는 것에만 붙들린 사람들 곁에 몸으로 오셔서, 그 몸으로 하신 일을 보고 그분과 아버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몸 안에 갇히신 것은 아닙니다. 사람으로 걸으시는 동안에도 말씀으로서 온 세상을 살리시고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고 그는 말합니다 17절.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관해서는 참 하나님, 참 사람 과에서 더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우리의 소망

20–32절은 그 죽음과 부활을 하나하나 묻고 답합니다. 왜 침상에서 조용히 죽지 않으셨는가? 병으로 죽으셨다면 남의 병을 고치시던 분의 약함으로 보였을 것이고 22.5, 숨어서 죽으셨다면 죽음을 본 증인이 없어 부활도 믿을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23.1. 그분은 훌륭한 씨름꾼이 상대를 스스로 고르지 않듯 원수들이 내민 가장 부끄러운 죽음을 받으셨고, 사람들이 치욕으로 꾸민 그 죽음이 오히려 죽음을 이긴 승리의 기념비가 되었습니다 24.4.

왜 하필 십자가인가 하는 물음에는, 다투려는 마음이 아니라 배우려는 마음으로 묻는 믿는 이들에게 따로 답합니다 25.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놓인 저주를 지시려고 저주의 죽음인 나무 위의 죽음을 받으셨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리는 모든 자는 저주 받았느니라, 하였느니라."라고 말합니다 (갈 3:13). 또 두 팔을 벌린 채 죽는 죽음은 십자가뿐이어서, 주님은 한 손으로 옛 백성을, 다른 손으로 이방인을 이끌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로 만드셨다고 그는 읽습니다 25.3. 예수께서도 "나 곧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요 12:32). 사흘째 날에 다시 사신 것도 까닭이 있습니다. 너무 이르면 정말 죽으셨는지 의심받았을 것이고, 너무 늦으면 같은 몸인지 의심받고 죽음의 증인들도 흩어졌을 것입니다 26절.

그가 부활의 증거로 힘주어 내세우는 것은 그의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예전에는 성도들에게도 죽음이 두려웠지만,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죽음을 아무것도 아닌 듯 짓밟고 믿음을 부인하느니 차라리 죽기를 택한다는 것입니다 27.2. 죽은 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데, 그리스도께서는 날마다 수많은 사람을 설득해 우상을 버리고 삶을 바꾸게 하시니, 그분은 살아 계신 분, 아니 생명 자체이시라고 그는 말합니다 30.4.

아타나시우스는 이 모든 것을 책 끝 무렵에 한 문장으로 모읍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가 신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요, 몸으로 나타나신 것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알게 하시려는 것이며, 사람들의 모욕을 견디신 것은 우리가 죽지 않음을 물려받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54.3. 베드로도 하나님이 우리로 "그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나니 이것은 너희가 이 약속들을 힘입어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합니다 (벧후 1:4). 아타나시우스가 뜻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본질을 갖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무에서 나와 썩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은혜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여 썩지 않음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라. 너희는 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이들이라, 하였으나"라고 한 말씀도 (시 82:6) 그는 그렇게 읽었습니다 4.6.

이 문장은 여러 전통에서 조금씩 다르게 울립니다. 정교회는 이것을 ‘신화’(테오시스) 가르침의 고전적 표현으로 읽고, 구원을 무엇보다 썩음과 죽음에서 고침받아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일로 설명합니다. 아타나시우스를 교회 박사로 기리는 가톨릭 교회도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성육신의 목적을 말하며 이 문장을 인용합니다. 개신교인들은 대개 그리스도와의 연합, 양자 됨, 영화라는 말로 같은 소망을 이야기하고,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가 흐려질까 사람이 신이 된다는 표현은 조심스러워하는 이가 많습니다. 그래도 요한이 말하듯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라.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되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을 그분께서 계신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 아는 소망은 모두의 것입니다 (요일 3:2).

십자가를 읽는 방식에서도 강조점이 갈립니다. 20세기 스웨덴의 루터교 신학자 구스타프 아울렌은 이 책을 『이단 반박』의 이레나이우스와 더불어, 죄와 죽음과 마귀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말하는 교부들의 ‘고전적’ 속죄론의 증인으로 읽었고 아울렌, 승리자 그리스도, 정교회 신학도 대체로 죽음을 멸하시고 본성을 고치시는 그리스도를 앞세웁니다. 서방의 많은 독자, 특히 많은 복음주의자는 같은 책에서 모든 이가 져야 할 죽음의 빚을 그분이 대신 갚으셨다는 말과 20.2, 하나님 말씀의 참되심이 지켜져야 한다는 논리를 보고 7.1, 훗날 안셀무스의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와 종교개혁자들의 형벌 대속으로 이어지는 실마리를 찾습니다. 아타나시우스 자신은 이 그림들 가운데 하나를 고르지 않고 함께 씁니다. 이 물음은 교리 과정의 십자가와 속죄 과에서 나란히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잘 읽으려면

교회가 이 짧은 책을 열여섯 세기 넘게 읽어 온 까닭은 그것이 신앙의 큰 줄기를 한데 묶어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창조와 구원은 한 말씀이 하신 일이고,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은 따로 떨어진 사건이 아니라 썩어 가는 사람을 다시 지으시는 한 사랑의 일입니다. 동방과 서방의 교회가 모두 이 책을 고전으로 여겨 왔고, 1944년 C. S. 루이스는 이 책의 새 영어 번역에 서문을 붙이며 새 책을 한 권 읽으면 그다음에는 옛 책을 한 권 읽으라고 권했습니다.

먼저 논증을 따라가며 읽으십시오. 아타나시우스는 같은 생각을 여러 번 되풀이하는데, 일부러 그렇게 한다고 밝힙니다. 무엇을 빠뜨렸다는 말을 듣느니 되풀이한다는 꾸지람을 듣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20.3. 그러니 반복을 지루해하기보다 한 진리를 여러 방향에서 비추는 그의 비유들, 곧 도시에 머무는 임금, 다시 그리는 초상, 상대를 고르지 않는 씨름꾼, 불에 타지 않는 석면에 머물러 보십시오. 각 절 첫머리의 짧은 요약은 아타나시우스가 아니라 이 책을 영어로 옮긴 로버트슨이 붙인 것입니다.

그가 읽은 성경도 기억하십시오. 아타나시우스는 헬라어 구약을 읽었기에 그의 인용은 우리말 성경과 다를 때가 있습니다. 그는 신명기 28장을 너희 생명이 눈앞에 달린 것을 보고도 믿지 않으리라는 말씀으로 인용하고, 그 생명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로 읽습니다 35.2. 그런데 개역한글은 같은 구절을 "네 생명이 의심나는 곳에 달린 것 같아서"라고 옮깁니다 (신 28:66). 그는 『지혜서』 4.6과 헤르마스의 『목자』 3.1도 인용하는데, 367년의 부활절 서신에서는 이 책들을 정경 밖에 두면서도 새로 교회에 들어오는 이들이 읽을 만한 책으로 꼽았습니다. 개신교가 외경으로 여기는 『지혜서』를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는 오늘 구약 안에 두고 읽습니다. 정경에 관해서는 정경: 어떤 책이 성경인가 과를, 교부들이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읽은 방식은 교부들은 성경을 어떻게 읽었나 과를 보십시오.

어려운 대목도 있습니다. 33–40절에서 그는 유대인들의 불신을 성경으로 꾸짖으며 거친 말을 서슴지 않습니다 40.4. 예언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확신은 사도들과 함께 교회가 지금도 고백하는 것이지만, 그 말투는 그리스도인들이 오랫동안 유대인을 업신여겨 온 아픈 역사와 겹쳐 들립니다. 바울은 동족을 위해 큰 근심을 품고서 "그러면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버리셨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자니라."고 말했고 (롬 11:1), "하나님의 선물들과 부르심에는 뜻을 돌이키는 일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롬 11:29). 이 대목은 그 마음으로 겸손히 읽어야 합니다. 46–55절에서 신탁이 잠잠해지고 십자가의 표 앞에서 귀신이 달아나며 싸우던 민족들이 평화를 배운다고 말하는 대목은, 옛 신들의 시대가 저물어 가는 것을 눈으로 본 4세기 감독의 증언으로 읽으면 좋습니다.

책의 끝에서 아타나시우스는 이 글이 그리스도의 신앙을 짧게 그린 밑그림일 뿐이라며, 성경을 직접 읽어 더 온전히 배우라고 권합니다 56.1. 그리스도께서 이번에는 낮은 모습이 아니라 자기 영광 가운데 오셔서 모든 이를 심판하시리라는 것도 성경에서 배우라고 합니다 56.3. 그리고 성경을 깨닫는 데에는 깨끗한 마음과 성도들을 본받는 삶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해를 보려는 사람이 먼저 눈을 닦듯, 하나님에 관해 말한 이들의 뜻을 알려는 사람은 먼저 삶으로 자기 영혼을 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57.3. 이 책은 머리로만 읽는 책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신 분 앞에서 삶이 달라지는 자리로 부르는 책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묶인 폭군을 비웃는 사람들처럼 죽음을 조롱하며 옛 말씀을 외친다고 말합니다 27.4.

그리하여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기록된바, 사망이 승리 가운데서 삼켜졌도다, 하신 말씀이 성취되리라.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고전 15:54-55

출처

  1. 아타나시우스, 제39 부활절 서신 367
  2. 아타나시우스,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4세기 / 4th century 읽기
  3. 이레나이우스, 이단 반박 읽기
  4. 구스타프 아울렌, 승리자 그리스도 1930
  5. 안셀무스,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 1098 읽기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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