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
성육신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이기를 그치지 않으시고 참 사람이 되신 일입니다.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아버지를 보여 주시며 우리가 드려야 할 순종을 드리고 우리의 죽음을 죽으시며 우리를 하나님과의 사귐으로 이끄시려고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지난 과에서 하나님의 언약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새 언약에 이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번 단원은 그 모든 약속의 중심에 계신 분이 누구신지 묻습니다. 요한복음은 그분을 시간이 시작되기 전부터 계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요 1:1
그리고 몇 절 뒤에 기독교 신앙 전체가 기대고 있는 문장이 나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교회는 이 일을 성육신, 곧 육신을 입으심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잠시 사람처럼 보이셨다는 뜻도 아니고, 한 훌륭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로 높아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영원하신 아들이 하나님이신 채로, 피곤해지는 몸과 배워 가는 마음을 가진 참 사람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되었다’는 말은 바뀌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음속의 말이 소리를 입고 밖으로 나오는 일에 빗대어 "우리의 말이 소리가 되지만 소리로 바뀌지는 않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육신이 되셨으나 육신으로 바뀌지는 않으셨습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바울은 이 일이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충만한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 하셨나니"이라는 것입니다 (갈 4:4). 아들은 다른 아기처럼 어머니에게서 나셨고, 율법 아래 사는 이스라엘 사람으로 자라셨습니다. 그러나 그 잉태는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천사가 그녀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님께서 네게 임하시고 가장 높으신 이의 권능이 너를 덮으시리니 그런즉 또한 네게서 태어날 그 거룩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리라.
눅 1:35
마태도 마리아에게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니라.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였을 때에 그들이 함께하기 전에 그녀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아이를 밴 것이 드러나매"라고 전하고 (마 1:18), 그 아기를 이사야가 말한 임마누엘, 곧 "보라, 처녀가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번역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라."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마 1:23). 사도신경은 예수께서 ‘성신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고 고백합니다(성신은 성령의 옛 이름입니다)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은 그분이 우리 사람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셨다고 고백합니다 니케아 신경. 동정녀 탄생은 이 아기가 위로부터 오신 분임을 보여 주는 표지입니다. 이 고백을 둘러싼 물음은 예수는 정말 동정녀에게서 나셨는가?에서 다룹니다.
왜 사람이 되셨을까
하나님은 왜 이런 길을 택하셨을까요? 성경은 몇 가지 까닭을 함께 말합니다.
첫째, 아버지를 보여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지만, 아들은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와 손길로 아버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빌립에게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었으되 네가 아직도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네가 말하기를,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 하느냐?"이라고 하셨습니다 (요 14:9).
둘째, 우리가 드려야 할 순종을 드리고 우리가 당해야 할 죽음을 당하시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는 죽으실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는 아들이 우리와 같은 혈육을 입으신 까닭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자녀들은 살과 피에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의 일부를 취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죽음을 통해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또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 내려 하심이라.
히 2:14-15
그분은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시려고 "그러므로 모든 일에서 그분께서 자기 형제들과 같게 될 필요가 있었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서 긍휼 많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이 되사 백성의 죄들로 인해 화해를 이루려 하심이라." 되셨고 (히 2:17), 모든 일에 우리처럼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셨습니다 (히 4:15). 11세기의 안셀무스는 이 점을 정리하여, 죄의 빚은 사람이 갚아야 하지만 사람은 갚을 능력이 없고 하나님은 갚으실 수 있으나 빚진 쪽이 아니시므로,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신 분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다고 논했습니다 안셀무스,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
셋째, 우리를 하나님과의 사귐으로 이끄시려고 오셨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우리로 "그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나니 이것은 너희가 이 약속들을 힘입어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하셨다고 말합니다 (벧후 1:4). 크리소스토무스는 "하나님의 친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신 것은 사람의 아들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라고 씁니다 크리소스토무스. 4세기의 아타나시우스는 더 대담하게,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가 신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동방 교회가 ‘신화’(테오시스)라고 부르는 이 가르침은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을 갖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은혜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고치시려면 사람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취하셔야 했습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그리스도께 사람의 정신이 없다고 가르친 이들에게 ‘취하지 않은 것은 치유되지 않는다’는 말로 답했습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클레도니우스에게 보낸 첫째 편지. 그분은 몸과 영혼과 정신, 곧 우리의 전부를 취하셔서 우리의 전부를 고치십니다. 이 논쟁은 다음 과에서 다시 만납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하나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를 보십시오.
‘자기를 비어’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들의 모습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빌 2:6-8
‘비어’로 옮긴 말은 , ‘비우다’입니다. 여기서 ‘비우심’(케노시스)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러면 아들은 무엇을 비우셨을까요?
교부들과 중세 신학자들과 종교개혁자들이 함께 지켜 온 고전적 해석은 오늘날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 그리고 개신교회의 신앙고백들이 따르는 해석입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바울은 아들이 무엇을 내려놓으셨는지보다 무엇을 취하셨는지, 곧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들은 신성을 덜어 내신 것이 아니라 인성을 더하셨고, 자기 영광을 움켜쥐지 않고 종의 모습 안에 가리셨습니다. 크리소스토무스는 "그분은 계신 그대로 머무시면서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라고 말하고 크리소스토무스, 매튜 헨리는 그리스도께서 "낮은 처지에 있는 사람의 모양을 취하셨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라고 씁니다 매튜 헨리.
19세기 중반부터 독일과 영국의 일부 신학자들과 그 뒤의 몇몇 현대 신학자들은 케노시스 이론이라 불리는 다른 설명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지혜가 자라 가셨고 (눅 2:52) 마지막 날은 아들도 모른다고 하신 말씀을 (막 13:32) 무겁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땅에 계시는 동안 전능, 전지, 무소부재 같은 신적 속성을, 또는 적어도 그 사용을 스스로 내려놓으시고, 사랑과 거룩함은 그대로 지니신 채 참으로 제한된 사람의 삶을 사셨다고 설명합니다. 고전적 해석은 같은 본문들을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서 하신 말씀과 겪으신 일로 읽습니다.
두 설명은 함께 고백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들은 참으로 사람이 되셨고, 그 삶의 연약함과 한계는 꾸민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 신경들이 고백하듯 그분은 한순간도 하나님이기를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아들이 하나님이 아닌 존재가 되셨다고 가르치는 교회는 없습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지 않으시고 우리 곁으로 오셨다는 소식입니다. 부요하신 분이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셔서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고후 8:9).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연약함 가운데서도 숨지 않고 그분께 나아가며, 몸과 일상과 고난을 하나님이 친히 입으신 자리로 귀하게 여깁니다. 예수가 누구신지는 예수는 누구인가?에서 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연습
- 연습 1 / 8
성육신이라는 말이 뜻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2 / 8
누가복음 1:35에서 천사는 마리아에게 아기의 잉태가 어떻게 이루어진다고 말합니까?
- 연습 3 / 8
갈라디아서 4:4에 따르면 하나님은 아들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 연습 4 / 8
히브리서 2:14-15에 따르면 아들이 우리와 같은 혈육을 입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 연습 5 / 8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가 말한 ‘취하지 않은 것은 치유되지 않는다’는 무슨 뜻입니까?
- 연습 6 / 8
아타나시우스가 말한 성육신의 목적, 곧 동방 교회가 ‘신화’라고 부르는 가르침과 통하는 베드로후서 1:4의 표현은 무엇입니까?
- 연습 7 / 8
빌립보서 2:7의 ‘자기를 비어’를 두고, 교부들 이래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와 개신교회의 신앙고백들이 따라온 고전적 해석은 무엇입니까?
- 연습 8 / 8
케노시스를 두고 고전적 해석과 현대의 케노시스 이론이 함께 고백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출처
- 고대 교회, 사도신경 — 로마 교회의 세례 신앙고백에서 자란 서방 교회의 기본 신조. 읽기
-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니케아 신경 325/381 — 동서방 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신조. 읽기
- 안셀무스,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 1098 — 속죄와 성육신에 대한 고전적 논의. 읽기
- 아타나시우스,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4세기 / 4th century — 말씀이 사람이 되신 이유를 다룬 고전. 읽기
-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클레도니우스에게 보낸 첫째 편지 서신 101 / Epistle 101 — 382년경. 그리스도가 온전한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취하셨다고 가르친다. ‘취하지 않은 것은 치유되지 않는다.’
성경과 교회의 신경, 교부와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공교회의 신경(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칼케돈 신앙정의)을 기준으로 삼았고,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