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와 신앙고백

칼케돈 신앙정의

451 · 칼케돈 공의회

해설

칼케돈 신앙정의는 451년 칼케돈 공의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한 분으로 고백한 글입니다. 두 본성이 혼합되지 않고 변하지 않으며 나뉘지 않고 분리되지 않는다는 네 마디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경계를 그어,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칼케돈에 이르는 길

325년 니케아 공의회는 아들이 피조물이 아니라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신 참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니케아 신경. 그러자 다음 물음이 남았습니다. 영원하신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면, 그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요? 성경은 둘을 한 문장에 담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말합니다 (요 1:14). 그 뒤 백여 년 동안 교회는 이 문장의 어느 한쪽을 깎아 내는 설명들과 씨름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성육신 과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의 주교 아폴리나리스는 니케아 신앙을 굳게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한 분이시고 죄가 없으시다는 것을 지키려고, 말씀이 사람의 몸을 취하셨으나 사람의 정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말씀 자신이 들어서셨다고 가르쳤습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취하지 않은 것은 치유되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클레도니우스에게 보낸 첫째 편지. 죄가 가장 깊이 뿌리내린 사람의 정신을 취하지 않으셨다면 그 정신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아폴리나리스파를 정죄했습니다.

428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된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성을 강조하는 안디옥 학파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태어나시거나 고난받으신다는 말을 꺼려, 마리아를 ‘하나님을 낳은 이’(테오토코스) 대신 ‘그리스도를 낳은 이’라고 부르자고 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는 이것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과 마리아의 아들, 두 아들로 나누는 길이라고 보았습니다. 말씀이 육신을 참으로 자기 것으로 삼으셨으므로 마리아가 낳은 분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키릴루스,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낸 둘째 편지. 431년 에베소 공의회는 키릴루스의 편지를 받아들이고 네스토리우스를 면직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쪽 주교들이 도착하기 전에 회의가 열려 큰 다툼이 남았고, 433년에야 키릴루스와 안디옥의 요한이 한 고백에 뜻을 모아 화해했습니다. 네스토리우스 자신이 정말 그리스도를 둘로 나누었는지는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 논의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반대쪽 끝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나이 많은 수도원장 에우티케스는 네스토리우스에 맞서다가, 그리스도께서 연합 전에는 두 본성이었으나 연합 뒤에는 한 본성뿐이라고 말했고, 그분의 몸이 우리 몸과 같은 본질이라고 고백하기를 망설였습니다. 448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플라비아누스가 연 회의가 그를 정죄하자 그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호소했습니다. 로마의 주교 레오는 449년 플라비아누스에게 긴 편지를 보냈는데, 이것이 ‘레오의 교서’입니다. 레오는 빌립보서의 ‘하나님의 본체’와 ‘종의 형체’라는 말을 따라, 두 본성이 한 위격 안에서 저마다의 고유함을 지니고 각각 자기에게 속한 일을 다른 본성과 함께 행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레오 1세, 레오의 교서. 그러나 같은 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디오스코루스가 이끈 둘째 에베소 회의는 이 편지를 읽지도 않은 채 에우티케스를 복권하고 플라비아누스를 면직했고, 플라비아누스는 얼마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레오는 이 회의를 ‘강도 회의’라고 불렀습니다.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가 죽고 마르키아누스가 황제가 되자, 451년 10월 콘스탄티노플 맞은편 해안의 칼케돈에서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수백 명의 주교가 모였는데 거의 모두 동방의 주교였고, 레오가 보낸 사절들이 함께했습니다. 공의회는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의 신경, 키릴루스의 편지들, 레오의 교서를 읽었습니다. 회의록에는 주교들이 이것이 교부들의 믿음이며, 베드로가 레오를 통해 말했고 키릴루스도 그렇게 가르쳤다고 외쳤다고 적혀 있습니다. 디오스코루스는 면직되었습니다. 처음 상정된 초안은 디오스코루스 쪽도 받아들일 만한 ‘두 본성으로부터’라는 표현을 썼던 것으로 보이는데, 로마 사절들이 반대하여 다시 다듬은 끝에 ‘두 본성 안에서’라는 말이 들어갔습니다. 완성된 신앙정의는 앞의 두 신경을 먼저 싣고,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교부들을 따라’라는 말로 자기 고백을 시작합니다. 새 신경을 지은 것이 아니라 니케아의 믿음을 지키려는 것입니다. 이 페이지의 본문은 그 고백 부분입니다.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신 한 분

신앙정의가 맨 먼저 고백하는 말은 ‘한 분이시며 동일하신 아들’입니다. ‘한 분이시며 동일하신’이라는 말은 이 짧은 본문에 세 번 나오고, 헬라어 원문에는 ‘같은 분’이라는 말이 더 자주 되풀이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신 분과 사람의 연약함을 겪으신 분은 서로 다른 두 주체가 아니라 같은 한 분이십니다. 바울도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체에 관한 한 그리스도께서도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며 영원토록 찬송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고 말합니다 (롬 9:5). 이스라엘에게서 나신 분이 곧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어서 신앙정의는 그분을 ‘신성에서 완전하시고 인성에서도 완전하시며,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시고’라고 고백합니다. 어느 쪽에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그분 안에는 "그분 안에는 하나님의 신격의 모든 충만이 몸으로 거하고" (골 2:9), 자녀들이 혈육에 속하였기에 "그런즉 자녀들은 살과 피에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의 일부를 취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죽음을 통해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이 있었습니다 (히 2:14).

‘이성적인 영혼과 몸을 지니셨습니다’라는 고백은 아폴리나리스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몸만이 아니라 생각하고 느끼고 뜻을 정하는 사람의 영혼도 지니셨습니다. 그분은 "예수님께서는 지혜와 키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호의를 입으시더라." (눅 2:52), 겟세마네에서 "이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혼이 심히 슬퍼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마 26:38). 레오는 콘스탄티노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혼이든 이성적 정신이든 육신이든, 인성에 속한다고 분명히 여겨지는 어떤 것이 그분에게 모자랐다고 인정하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라고 썼습니다 레오.

신앙정의는 그분이 ‘신성에 따라서는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시고 인성에 따라서는 우리와 동일 본질이시며’라고 말합니다. 니케아가 아들과 아버지의 하나 되심에 쓴 바로 그 말 ‘동일 본질’(호모우시오스)을 이번에는 우리와의 관계에 한 번 더 쓴 것입니다. 그분은 아버지와 하나이신 만큼 참으로 우리와도 하나이십니다. 에우티케스가 망설인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11세기의 테오필락투스는 엘리사벳이 그리스도를 마리아의 태중의 아이, 곧 태의 열매라고 부른 데서 에우티케스에 대한 논박을 찾으며 "모든 열매는 그것을 맺는 나무와 같은 본성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풉니다 테오필락투스.

‘죄 외에는 모든 일에서 우리와 같으십니다’는 히브리서의 말씀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 죄는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 본성을 망가뜨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없으시다고 해서 덜 사람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처음 뜻하신 온전한 사람이십니다.

하나님을 낳은 이

신앙정의는 그분이 ‘신성에 따라서는 모든 세대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셨고’, 인성에 따라서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고 두 나심을 나란히 놓습니다. 미가는 베들레헴에서 나올 다스릴 자를 두고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가운데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에서 치리자가 될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라.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고 했고 (미 5:2), 바울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그러나 충만한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 하셨나니"라고 말합니다 (갈 4:4). 레오도 교서에서 시간 속의 나심이 아버지에게서 영원히 나신 일에 아무것도 덜지도 더하지도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레오의 교서. 두 나심 사이에 놓인 ‘우리를 위하여, 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는 니케아 신경의 ‘우리 사람을 위하여, 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에서 온 말입니다 니케아 신경. 영원하신 아들이 마리아에게서 나신 까닭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신앙정의는 마리아를 ‘하나님을 낳은 이(테오토코스)’라고 부릅니다. 에베소 공의회가 지킨 이 칭호는 먼저 마리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입니다. 마리아가 낳은 아기는 나중에 하나님과 결합된 한 사람이 아니라,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의 아들 바로 그분이십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엘리사벳은 아직 태중에 계신 그분을 두고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오시다니 어찌 이 일이 내게 임하는가?"라고 했습니다 (눅 1:43). 키릴루스의 말대로 마리아는 "단순한 사람을 낳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 사람이 되신 말씀을" 낳았습니다 키릴루스.

그러면서도 신앙정의는 ‘인성에 따라서는’이라는 말을 잊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아들의 신성의 근원이 아닙니다. 아들은 영원부터 아버지에게서 나셨고, 마리아에게서는 육신을 받으셨습니다.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는 이 칭호로 마리아를 기리며 기도와 찬송에서 부르고(가톨릭 교회는 흔히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옮깁니다), 루터교의 일치신조도 마리아를 참으로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일치신조 8조. 개혁교회는 마리아를 지나치게 높이는 말로 들릴까 하여 이 칭호를 잘 쓰지 않지만, 마리아가 낳은 분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그 뜻은 함께 고백합니다.

두 본성, 한 위격

신앙정의의 중심은 그다음 문장입니다. 한 분 그리스도께서 ‘두 본성 안에서 혼합되지 않고, 변하지 않고, 나뉘지 않고, 분리되지 않고 인정되십니다.’ ‘본성’은 헬라어 퓌시스(φύσις)로, 그분이 ‘무엇’이신지를 말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신 모든 것과 사람인 모든 것을 지니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물으면 대답은 하나, 영원하신 말씀이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네 마디는 모두 부정의 말입니다. 앞의 두 마디는 두 본성이 섞여 제3의 무엇이 되었다거나 한쪽이 다른 쪽으로 바뀌었다는 에우티케스 쪽의 생각을 막고, 뒤의 두 마디는 그리스도를 두 아들로 가르는 네스토리우스 쪽의 생각을 막습니다. 공의회는 하나님과 사람이 어떻게 한 분 안에 계시는지를 다 풀어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 신비 둘레에 길을 잃지 않게 할 경계를 그었고, 그 안쪽은 경배에 맡겼습니다.

이어지는 말이 그 뜻을 풉니다. ‘본성들의 구별은 연합으로 말미암아 결코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각 본성의 고유성이 보존되어 한 위격과 한 자립체 안에서 함께 이루어지니’, 그분은 두 위격으로 갈라지거나 나뉘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자립체’로 옮긴 말은 휘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로, 라틴어 본문은 이를 수브시스텐티아(subsistentia)라고 옮깁니다. 다른 무엇에 기대어 있지 않고 그 자체로 서서 존재하는 것, 곧 스스로 서 있는 실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가 아들을 하나님의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 자체의 정확한 형상이시며 자신의 권능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떠받치시는 이 아들께서는 친히 우리의 죄들을 정결하게 하신 뒤에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이라고 부를 때 (히 1:3) ‘본체’로 옮긴 말도 이것입니다. 4세기 교부들은 이 말을 삼위일체의 각 위격을 가리키는 말로 다듬었습니다. 칼케돈이 ‘한 위격과 한 자립체’를 나란히 쓴 것은, 그리스도 안에 스스로 서 계신 분이 둘이 아니라 하나뿐이라고 고백하려는 것입니다. 두 본성은 저마다 따로 서 있는 두 주체가 아니라 한 분 안에 있습니다. 그 한 위격은 성육신 때 새로 생긴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자기 위격 안에 받아들이신 영원하신 아들 자신입니다.

레오가 가르친 대로 두 본성은 저마다 자기에게 속한 일을 하되 따로 하지 않고 서로 함께 합니다. 빌립보서는 이것을 한 문장에 담고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들의 모습이 되셨으며

빌 2:6-7

베다는 사천 명을 먹이신 기사에서 "한 분이신 우리 구속자께 신성의 역사와 인성의 역사가 구별되어 나타나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베다. 주린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은 사람의 마음이고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그 둘은 한 분의 일입니다. 위격이 하나이시므로 성경은 한 본성에 속한 일을 다른 본성의 이름으로 불리는 그 위격에게 돌리기도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8장 7항. 바울은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하고 (고전 2:8), 교회를 "그러므로 너희 자신과 온 양 떼에게 주의를 기울이라. 성령님께서 너희를 그들의 감독자로 삼으사 하나님의 교회 곧 그분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교회를 먹이게 하셨느니라."라고 부릅니다 (행 20:28). 하나님의 본성이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그분이 자기 것으로 삼으신 사람의 본성으로 죽으셨습니다.

신앙정의는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선지자들이 그분에 관하여 말하였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에게 가르치셨으며, 거룩한 교부들의 신경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그대로’라고 끝맺습니다. 공의회는 새 교리를 지어내지 않고, 성경이 처음부터 말해 온 분을 가리켰습니다. 이사야는 이미 그분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권이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이, 조언자, 강하신 하나님, 영존하는 아버지, 평화의 통치자라 할 것이기 때문이라.

사 9:6

매튜 헨리는 이 구절을 두고 "그분은 마땅히 기묘자라 불리시니,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시기 때문입니다"라고 풉니다 매튜 헨리.

칼케돈을 받지 않은 교회들

모든 교회가 칼케돈을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이집트의 콥트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의 테와흐도 정교회, 인도의 말랑카라 정교회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에베소의 세 공의회를 받지만 칼케돈은 받지 않았고, 오늘날 함께 오리엔트 정교회라고 불립니다. 이들은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의 표현을 따라 그리스도를 ‘말씀이신 하나님의 성육하신 한 본성’으로 고백하기에, 이 전통을 ‘한 본성’이라는 뜻의 미아퓌시스 전통이라고도 합니다. 에티오피아 교회의 이름에 든 ‘테와흐도’도 ‘하나 됨’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한 본성은 신성과 인성이 섞인 제3의 것이 아니라, 신성과 인성이 섞임도 변화도 나뉨도 없이 하나가 되신 성육하신 말씀 한 분입니다. 그래서 이들도 에우티케스를 정죄하며, 흔히 붙는 ‘단성론’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들이 칼케돈을 받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낮추려는 까닭이 아니었습니다. ‘두 본성 안에서’라는 말과 각 본성이 저마다 일한다는 레오의 표현이 그리스도를 둘로 나누는 네스토리우스의 길을 열까 염려했고, 키릴루스의 후계자 디오스코루스를 면직한 공의회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많은 역사가는 ‘본성’이라는 같은 말을 서로 다른 뜻으로 썼던 데다 제국의 압력과 지역 교회의 사정이 얽혀 갈라짐이 깊어졌다고 봅니다. 아르메니아 교회는 451년 페르시아와 전쟁 중이어서 공의회에 대표가 없었고, 6세기에 칼케돈을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20세기 후반에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1973년 교황 바오로 6세와 콥트 정교회의 수장 셰누다 3세는 공동 선언에서, 그리스도께서 신성으로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인성으로 완전한 사람이시며 그 신성과 인성이 섞임도 변화도 나뉨도 분리도 없이 참으로 연합되어 있다고 함께 고백했습니다. 1989년과 1990년에는 정교회와 오리엔트 정교회의 공동 위원회가 합의문을 내어, 두 가족이 칼케돈의 네 마디를 함께 고백한다는 것, 두 본성을 말하는 쪽은 나눌 수 없는 연합을 부인하지 않고 하나로 연합된 본성을 말하는 쪽은 신성과 인성이 변함도 혼합도 없이 그대로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에 뜻을 모았습니다. 1990년대에는 세계개혁교회연맹도 오리엔트 정교회들과 그리스도론에 관한 합의문을 냈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공의회들을 어떻게 볼지, 한쪽이 성인으로 기리는 이를 다른 쪽이 정죄해 온 일을 어떻게 풀지 같은 물음이 남아 있어 완전한 교제는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에베소 공의회를 받지 않아 오래 ‘네스토리우스파’라 불려 온 동방 교회(오늘의 아시리아 동방 교회)도 1994년 가톨릭 교회와 함께 낸 그리스도론 공동 선언에서 한 분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이 오래된 교회들은 기독교가 처음부터 서방만의 신앙이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기독교는 서양 종교인가?에서 더 다룹니다.

개혁교회의 고백과 우리의 믿음

종교개혁자들은 공의회를 성경 위에 두지 않았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사도 시대 이후의 모든 공의회가 ‘오류를 범할 수 있고 많은 회의가 오류를 범하였다’고 말합니다 31장 4항. 그러면서도 칼케돈을 성경에 맞는 고백으로 기꺼이 받았습니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은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에베소, 칼케돈의 네 공의회가 성육신의 신비에 대해 성경에서 정의한 것을 진심으로 믿는다고 고백하고 제2 스위스 신앙고백 11장,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칼케돈의 말을 거의 그대로 자기 고백에 담았습니다.

그리하여 신성과 인성이라는 온전하고 완전하며 구별된 두 본성이 변환이나 합성이나 혼합 없이 한 위격 안에서 분리될 수 없게 결합되었다. 이 위격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나 한 분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8장 2항

소요리문답은 그분이 ‘두 구별된 본성과 한 위격으로 영원토록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십니다’라고 덧붙입니다 소요리문답 21문. 성육신은 잠시의 일이 아니어서, 그분은 지금도 우리의 본성을 입고 하늘에 계십니다. 벨직 신앙고백 19조는 각 본성이 자기 고유의 속성을 그대로 지니므로 신성은 창조되지 않은 채 하늘과 땅에 충만하고, 인성은 부활 뒤에도 참된 몸의 실재를 잃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두 본성은 그분의 죽음으로도 갈라지지 않아서, 무덤에 누워 계실 때에도 신성은 인성과 연합된 채로 있었습니다. 그 앞의 18조는 그리스도께서 어머니에게서 육신을 취하지 않으셨다고 가르친 16세기의 일부 재세례파에 맞서, 그분이 참으로 우리와 같은 혈육에 속하셨다고 고백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5문은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언제까지나 그러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피에서 참된 인성을 취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칼케돈의 ‘변하지 않고’가 ‘언제까지나 그러하신’이라는 한마디에 담겨 있습니다. 36문은 그 유익을 말합니다. 그분의 무죄함과 완전한 거룩함이 내가 그 가운데서 잉태된 나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가려 줍니다. 47문과 48문은 같은 원리로 승천을 풉니다. 주께서는 "무엇이든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의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하시니라. 아멘."고 약속하셨지만 (마 28:20) 하늘로 올리우셨습니다. 요리문답은 그분이 인성으로는 더 이상 땅에 계시지 않으나 신성과 위엄과 은혜와 성령으로는 어느 때에도 우리를 떠나 계시지 않으며 47문, 신성은 측량할 수 없고 어디에나 계시므로 ‘자기가 취하신 인성의 한계 밖에도 분명히 계시지만 그럼에도 그 인성 안에도 계시며 그 인성과 인격적으로 연합되어 계신다’고 답합니다 48문. 칼뱅도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을 떠나지 않으신 채 동정녀의 태에 계시고 땅을 다니시고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썼고 칼뱅, 기독교 강요 2권 13장, 그보다 먼저 아타나시우스도 말씀이 몸 안에 갇히지 않으셨다고 가르쳤습니다 아타나시우스,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루터교회는 이 점을 달리 봅니다. 일치신조는 위격의 연합으로 그리스도의 인성도 하나님의 위엄에 참여하므로,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찬에 그 몸으로도 계실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일치신조 8조. 두 전통은 모두 칼케돈에 기대어, 루터교회는 ‘나뉘지 않고, 분리되지 않고’라는 말을, 개혁교회는 ‘혼합되지 않고’와 ‘각 본성의 고유성이 보존되어’라는 말을 힘주어 읽었습니다. 이 차이는 성찬: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 과와 승천과 다스리심 과에서 더 다룹니다.

칼케돈이 지키려 한 것은 결국 복음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우리의 중보자가 참 사람이어야 하는 것은 죄를 지은 바로 그 인성이 죄 값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고 16문, 참 하나님이어야 하는 것은 신성의 능력으로 인성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짐을 지시고 우리에게 의와 생명을 되찾아 주시기 위해서라고 가르칩니다 17문. 하나님이 아니신 구주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고, 참으로 우리 가운데 한 분이 아니신 구주는 우리를 대신하실 수 없습니다. 벨직 신앙고백은 그분이 ‘자기 능력으로 사망을 이기시니 참 하나님이시요, 자기 육신의 연약함을 따라 우리를 위하여 죽으실 수 있도록 참 사람이시다’라고 고백합니다 19조.

그러므로 모든 일에서 그분께서 자기 형제들과 같게 될 필요가 있었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서 긍휼 많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이 되사 백성의 죄들로 인해 화해를 이루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구조하실 수 있느니라.

히 2:17-18

매튜 헨리는 "무한하신 지혜의 눈에는, 사람들의 구주가 같은 피조물 외에는 어떤 존재도 가질 수 없는 동정심을 가지신 분이어야 함이 필요하였고"라고 씁니다 매튜 헨리. 그러니 칼케돈의 네 마디는 메마른 공식이 아닙니다. 아버지 우편에 계신 분이 우리의 살과 영혼을 지니고 우리의 연약함을 안에서부터 아시는 형제이시며, 동시에 우리를 끝까지 붙드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라는 확신을 지켜 줍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왕좌로 담대히 갈 것이니라."고 권합니다 (히 4:16). 이 고백은 참 하나님, 참 사람 과와 하나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에서 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출처

  1.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클레도니우스에게 보낸 첫째 편지 서신 101 / Epistle 101
  2.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낸 둘째 편지 430
  3. 레오 1세, 플라비아누스에게 보낸 서신(레오의 교서) 449
  4. 루터교, 일치신조 8 (1577)
  5. 하인리히 불링거, 제2 스위스 신앙고백 1566
  6. 장 칼뱅, 기독교 강요 1559 읽기
  7. 아타나시우스,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4세기 / 4th century 읽기

본문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교부들을 따라 모두 한마음으로, 한 분이시며 동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도록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그분은 신성에서 완전하시고 인성에서도 완전하시며,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시고, 이성적인 영혼과 몸을 지니셨습니다. 신성에 따라서는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시고 인성에 따라서는 우리와 동일 본질이시며, 죄 외에는 모든 일에서 우리와 같으십니다. 신성에 따라서는 모든 세대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셨고, 인성에 따라서는 이 마지막 날들에 우리를 위하여, 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을 낳은 이(테오토코스)이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습니다. 한 분이시며 동일하신 그리스도, 아들, 주, 독생자께서는 두 본성 안에서 혼합되지 않고, 변하지 않고, 나뉘지 않고, 분리되지 않고 인정되십니다. 본성들의 구별은 연합으로 말미암아 결코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각 본성의 고유성이 보존되어 한 위격과 한 자립체 안에서 함께 이루어지니, 그분은 두 위격으로 갈라지거나 나뉘지 않으시고 한 분이시며 동일하신 아들, 독생자, 말씀이신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는 처음부터 선지자들이 그분에 관하여 말하였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에게 가르치셨으며, 거룩한 교부들의 신경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그대로입니다.

영어 원문

We, then, following the holy Fathers, all with one consent, teach men to confess one and the same Son, our Lord Jesus Christ, the same perfect in Godhead and also perfect in manhood; truly God and truly man, of a reasonable soul and body; consubstantial with the Father according to the Godhead, and consubstantial with us according to the Manhood; in all things like unto us, without sin; begotten before all ages of the Father according to the Godhead, and in these latter days, for us and for our salvation, born of the Virgin Mary, the Mother of God, according to the Manhood; one and the same Christ, Son, Lord, Only-begotten, to be acknowledged in two natures, inconfusedly, unchangeably, indivisibly, inseparably; the distinction of natures being by no means taken away by the union, but rather the property of each nature being preserved, and concurring in one Person and one Subsistence, not parted or divided into two persons, but one and the same Son, and only begotten, God the Word, the Lord Jesus Christ, as the prophets from the beginning [have declared] concerning him, and the Lord Jesus Christ himself has taught us, and the Creed of the holy Fathers has handed down to us.

본문: 공개 저작물(Creeds.json; 필립 샤프, 『기독교 신조집』, 1877). 사도신경은 전해 내려온 우리말 고백문.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