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대전
토마스 아퀴나스 · 1265–1274년
영어 본문: 영국 도미니코회 수도자들 영역, 초판(1911–17) · 인터넷 아카이브 · 우리말은 이 영어 본문에서 옮겼습니다.
해설
『신학대전』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하나님에게서 시작해 우리를 하나님께 이끄시는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가르침 전체를, 반론을 먼저 듣고 답하는 짧은 항들로 엮은 미완의 책으로, 그 명료함과 공정함, 그리고 은혜가 자연을 완성한다는 확신 때문에 지금도 읽힙니다.
초보자를 위해 쓴 책
토마스 아퀴나스는 1225년 무렵 로마와 나폴리 사이의 로카세카에서 태어났습니다. 1244년 새로 생긴 설교자 수도회, 곧 도미니코회에 들어갔고, 대 알베르투스에게 배운 뒤 1256년 파리에서 신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중세의 신학 교수가 맨 먼저 할 일은 성경 강의였고, 그도 평생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생애는 신학 과정의 토마스 아퀴나스 과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신학대전』은 그가 1265년 무렵 로마에서 쓰기 시작한 책입니다. 서문에서 그는 이 책이 초보자를 위한 것이며, 쓸데없는 물음과 되풀이를 덜고 배우기에 알맞은 순서로 신앙의 가르침을 펼치려 한다고 밝힙니다. 셋째 부를 한창 쓰던 1273년 12월, 그는 미사를 드리다 무언가를 겪은 뒤 글쓰기를 멈추었고, 자기가 쓴 모든 것이 지푸라기처럼 보인다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책은 참회의 성례를 다루던 곳에서 멈추었고, 그는 이듬해 3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뒷부분은 그의 젊은 날 글에서 뽑아 엮은 보충부가 채웠습니다.
세 부, 그리고 서재의 스물아홉 항
책은 세 부로 되어 있습니다. 제1부는 하나님과, 하나님에게서 나온 모든 것을 다룹니다. 제2부는 이성을 지닌 피조물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다루는데, 제1편(I-II)은 행복과 사람의 행위, 덕과 법과 은혜를 두루 살피고, 제2편(II-II)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비롯한 덕을 하나하나 다룹니다. 제3부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하나님께 가는 길이 되신 그리스도와 성례를 다룹니다. 많은 독자는 이 짜임에서 바울의 찬송을 듣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으며 그분께로 돌아가나니 영광이 그분께 영원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롬 11:36
각 부는 여러 문(問)으로, 각 문은 여러 항(項)으로 나뉘고, 한 항은 한 가지 물음을 매듭짓습니다. 제1부 2문 3항은 흔히 I.2.3으로, 제2부 제1편 109문 2항은 I-II.109.2로 적습니다. 이 서재에는 그 가운데 스물아홉 항이 아홉 부분으로 실려 있습니다.
먼저 제1부에서 거룩한 가르침을 다루는 1문 열 항 전체(제1부 1문 1항부터), 하나님이 존재하시는지를 묻고 다섯 가지 길로 마무리하는 2문의 세 항(제1부 2문 3항까지), 하나님이 물체인지, 보일 수 있는지, 이름 붙여질 수 있는지를 묻는 세 항(3문 1항, 12문 1항, 13문 1항), 영혼에 관한 첫 항(75문 1항)이 있습니다. 제2부에서는 은혜가 왜 필요한지를 묻는 네 항(제2부 제1편 109문 1항부터)과 은혜를 받았는지 알 수 있는지를 묻는 한 항(112문 5항), 믿음에 관한 첫 항(제2부 제2편 1문 1항)을 실었습니다. 제3부에서는 하나님이 왜 사람이 되셨는지를 묻는 두 항(제3부 1문 1항부터),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세 항(46문 1항부터),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바뀌는 일을 다루는 문의 첫 항(75문 1항)을 실었습니다. 대부분 큰 논의의 첫머리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토마스를 두고 가장 자주 의견을 나누어 온 대목들입니다.
빠진 것은 거의 전부입니다. 삼위일체, 창조와 섭리, 덕과 법에 관한 논의(자연법도 여기에 있습니다), 칭의와 공로, 그리스도의 인격과 생애, 세례를 비롯한 다른 성례가 실리지 않았습니다. 성찬의 떡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지 설명하는 제3부 75문 1항 뒤의 항들도 없습니다.
한 항을 읽는 법
모든 항은 중세 대학에서 소리 내어 벌이던 토론의 모양을 따라 같은 다섯 걸음으로 나아갑니다. 물음, 반론, 재반론, 답변, 그리고 반론에 대한 답변입니다. 하나님은 존재하는가를 묻는 제1부 2문 3항을 예로 들어 봅시다. 물음 다음에는 반론들이 나오는데, 토마스는 자기가 내릴 답과 반대되는 쪽이 옳아 보인다는 말로 그 답에 맞서는 가장 강한 논거를 먼저 세웁니다. 첫째 반론은 악의 문제로, 하나님이 무한히 선하시다면 악은 있을 수 없을 텐데 세상에는 악이 있으니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론 1.
이어 재반론이 반대편에서 한마디를 놓습니다. 대개 성경이나 교부의 말 같은 권위이며, 여기서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알려 주신 이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곧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스스로 계신 이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느니라, 하라."입니다 (출 3:14). 재반론은 답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 보여 줄 뿐 아직 논증이 아니고, 언제나 토마스의 생각 전부도 아닙니다. 제2부 제1편 109문 3항의 재반론은 어떤 이들의 주장을 전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재반론.
그다음 답변에서 토마스는 하나님의 존재가 다섯 가지 길로 증명될 수 있다고 답합니다 답변. 움직임, 원인,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것들, 완전함의 정도, 세계의 질서에서 출발하는 다섯 논증은 저마다 첫째 원인에 이르러, 이것을 하나님이라 부른다는 말로 끝납니다. 그 첫째 원인이 어떤 분인지는 뒤따르는 여러 문이 밝혀야 할 몫입니다. 마지막으로 반론마다 반론에 대한 답변이 하나씩 붙는데, 반론 안의 옳은 것을 인정하면서 그 한계를 짚을 때가 많습니다. 악의 문제에 대해 토마스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하나님은 악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실 만큼 선하시기에 악을 허락하신다고 답합니다 반론 1에 대한 답변.
그래서 첫째 규칙은, 반론에 나오는 말이 토마스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1부 3문 1항의 다섯 반론은 하나님께 팔과 눈과 보좌가 있다고 말하는 듯한 성경 구절들입니다. 토마스는 그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반론에 대한 답변들에서 제1부 1문 9항이 가르친 대로 그것을 비유로 읽습니다. 제1부 2문 1항의 둘째 반론은 안셀무스가 『프로슬로기온』 2장에서 편 논증인데, 토마스는 이것을 증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반론 2에 대한 답변. 반론을 토마스의 말로 인용하는 것이 그를 잘못 인용하는 가장 흔한 길입니다.
처음에는 물음과 답변을 먼저 읽고, 그다음 반론과 그에 대한 답변을 짝지어 읽으면 좋습니다. 토마스가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하는 대목도 눈여겨보십시오. 어떤 명제는 그 자체로는 자명하지만 우리에게는 자명하지 않습니다 제1부 2문 1항. 어떤 것은 음식이 생명에 필요하듯 없어서는 안 되어서 필요하고, 어떤 것은 말이 여행에 필요하듯 목적을 더 잘 이루게 하므로 필요합니다 제3부 1문 2항. 모순처럼 보이는 많은 것이 이런 구별에서 풀립니다.
토마스는 권위에 기대어 논증하며, 그 첫째는 성경입니다. 본문에서 사도는 바울이고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자주 나오는 디오니시우스는 500년 무렵의 저자로, 바울이 아덴에서 얻은 회심자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 굳게 붙어 믿었는데 그 가운데는 아레오바고의 일원인 디오니시우스와 다마리스라 하는 여자와 또 그들과 함께한 다른 사람들도 있더라."의 이름으로 글을 썼습니다 (행 17:34).
토마스는 라틴어 불가타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회가 외경으로 여기는 『집회서』와 『지혜서』도 성경으로 인용하고, 시편은 대부분 우리 성경보다 번호가 하나 적습니다. 그가 시편 52편 1절로 인용하는 "어리석은 자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 하였도다. 그들은 부패하여 가증한 불법을 행하였으니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는 우리 성경의 53편 1절이며 (시 53:1), 이 서재의 성경 링크는 우리 성경의 번호를 따릅니다.
이성과 은혜, 그리고 사람이 되신 말씀
왜 신학이 있어야 하는가라는 첫 물음에 토마스는 사람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계시하신 앎이 꼭 필요했다고 답합니다 제1부 1문 1항. 사람의 목적이신 하나님은 이성이 붙잡을 수 있는 것을 넘어서시고, 이성으로 알 수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진리조차 계시가 없었다면 소수만이, 오랜 시간 뒤에, 많은 오류와 섞인 채 알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성이 할 일이 없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은 세상의 창조 이후로 분명히 보이며 만들어진 것들을 통해 깨달아 알 수 있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하는데 (롬 1:20), 토마스는 이 말씀을 들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그분이 하신 일에서 증명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책 전체를 꿰는 원칙은 은혜가 자연을 없애지 않고 완성하므로 자연적 이성은 믿음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1부 1문 8항.
같은 대목에서 토마스는 정경 성경만을 반박할 수 없는 증거로 쓰고, 교회 박사들의 권위는 개연적인 근거로만 쓴다고 말합니다. 우리 믿음은 정경을 기록한 사도와 선지자에게 주신 계시에 기대기 때문입니다. 복음주의 독자는 여기서 반가운 목소리를 듣고, 가톨릭 독자는 토마스가 다른 곳에서 교회의 가르침을 믿음이 성경을 붙드는 무오한 규범이라고도 말한다는 점을 덧붙입니다.
신학의 끝은 하나님을 뵙는 것입니다. 제1부 12문 1항의 재반론은 요한의 약속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라.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되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을 그분께서 계신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
요일 3:2
토마스는 복된 이들이 하나님의 본질을 보게 된다고 답하면서도 답변,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을 다 헤아리지는 못한다고 덧붙입니다 반론 3에 대한 답변. 이 세상에서 우리는 피조물에서 출발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뿐, 어떤 이름도 그분의 본질을 다 말하지 못합니다 제1부 13문 1항.
은혜에 관해 토마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제자입니다. 그는 은혜 없이도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을 스승의 말을 빌려 펠라기우스주의 이단이라 부릅니다 제2부 제1편 109문 4항. 타락한 사람도 집을 짓고 포도원을 가꾸는 것 같은 선은 행할 수 있지만, 스스로 몇 걸음은 움직여도 약으로 낫기 전에는 건강한 사람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병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109문 2항. 이 항의 재반론은 "그런즉 이와 같이 그것은 원하는 자에게서 나지도 아니하고 달리는 자에게서 나지도 아니하며 오직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에게서 나느니라."는 바울의 말씀입니다 (롬 9:16). 고치시는 은혜 없이는 하나님을 무엇보다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109문 3항.
은혜를 받았는지 알 수 있느냐는 물음에 토마스는 세 길을 나누어 답합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계시해 주시면 알 수 있고, 스스로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며,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고 세상의 것을 가볍게 여기는 것 같은 표지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제2부 제1편 112문 5항. 그가 재반론에 놓은 전도서 9장 1절은 불가타 성경에서 사람은 자기가 사랑받을 만한지 미움받을 만한지 알지 못한다고 읽히는데, 개역한글은 이 구절을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고 옮깁니다 (전 9:1). 토마스는 하나님이 소망 가운데 약속하신 영광은 믿음으로 가장 확실히 안다고 말합니다 반론 4에 대한 답변. 그가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영혼의 상태입니다.
여기서 전통들이 갈라집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심해서는 안 되지만, 누구도 믿음의 확실성으로 자기가 은혜를 얻었다고 알 수는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 의화에 관한 교령 9장. 칼뱅은 하나님의 호의를 도덕적 짐작으로밖에 알 수 없다는 스콜라 신학의 가르침을 해롭다고 하면서 3권 2장 38절, 믿음을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에 기대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호의를 굳고 확실하게 아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3권 2장 7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신자가 흔들릴 때가 있어도 무오한 확신에 이를 수 있다고 고백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8장, 웨슬리는 의롭게 하는 믿음에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셨다는 확신이 들어 있다고 설교했습니다 II.3. 그가 기댄 말씀은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입니다 (롬 8:16).
하나님이 왜 사람이 되셨느냐는 물음에 토마스는, 자기를 남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선의 본성이므로 가장 높은 선이신 하나님께는 피조물에게 가장 높은 방식으로 자기를 나누어 주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답합니다 제3부 1문 1항. 성육신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실 유일한 길은 아니었지만 가장 알맞은 길이었습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레오의 말을 엮어 성육신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어떻게 북돋우는지 보여 줍니다. 그 가운데에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도 있는데, 토마스는 이것을 신성에 온전히 참여하는 사람의 참된 복을 가리키는 말로 읽습니다 제3부 1문 2항. 아타나시우스가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에서 먼저 한 말이기도 합니다 54.3.
수난도 강요된 필연이 아니라 목적을 위한 필연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리스도가 이런 일들로 고난을 당하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함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시고"고 물으셨습니다 (눅 24:26). 토마스는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의 안셀무스와 달리 1권 12장, 하나님이 보속 없이 죄를 용서하셨어도 정의를 거스르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봅니다 제3부 46문 2항. 그런데도 십자가를 택하신 것은 그 길로 사람이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고 사랑으로 응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46문 3항.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위해 보속하셨으니 정의에 맞고, 스스로 보속할 수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아들을 주셨으니 긍휼에 맞으며, 이것은 보속 없이 용서하시는 것보다 더 풍성한 긍휼이라고 말하며 46문 1항 그는 바울을 인용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救贖)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느니라. 그분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한 화해 헌물로 제시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참으심을 통해 과거의 죄들을 사면하심으로써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려 하심이요,
롬 3:24-25
토마스는 보속을 공로와 희생 제사와 구속과 함께 말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다고 덧붙였고, 개신교 신학은 같은 라틴어 낱말을 흔히 ‘만족’으로 옮깁니다(십자가와 속죄 과).
성찬에 관한 항에서 토마스는 "또 그분께서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준 내 몸이라.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시고"는 말씀을 붙들어 (눅 22:19), 그리스도의 참 몸이 이 성례 안에 참으로 계신다고 답합니다. 이 임재는 감각이나 지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에 기대는 믿음으로만 알 수 있으며 제3부 75문 1항, 그것이 표징일 뿐이라는 견해를 그는 이단이라 부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참 몸이며 하늘에 있다는 셋째 반론은 반론 3 훗날 개혁교회가 펼 논증과 가깝고, 토마스는 그 몸이 장소에 있듯이가 아니라 성례의 방식으로 계신다고 답합니다 반론 3에 대한 답변.
가톨릭 교회는 화체설을 가르치며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이를 확인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 성체성사에 관한 교령. 정교회는 참된 변화를 고백하되 그 방식은 신비로 남겨 둡니다. 루터교는 떡과 포도주 안에, 함께, 아래에 그리스도의 참 몸과 피가 계신다고 고백하고, 개혁교회는 믿는 이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참으로 받아 먹는다고(영적 임재), 츠빙글리를 따르는 많은 교회는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식탁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차이는 세례와 성찬 과에서 나란히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토마스를 읽어 온 길
가톨릭 교회는 1323년 토마스를 성인으로, 1567년 교회 학자로 선포했고, 그를 ‘공통 박사’라 부르며, 1879년 교황 레오 13세 이래 그의 사상을 가톨릭 교육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모든 견해에 스스로를 매지는 않습니다.
루터는 아리스토텔레스에 기댄 스콜라 신학을 거세게 비판했는데, 많은 학자는 그가 스콜라 신학을 주로 가브리엘 비엘 같은 후대 학자들을 통해 알았다고 봅니다. 칼뱅은 스콜라 신학자들이 믿음을 지성의 단순한 동의로만 보고 마음의 신뢰를 놓쳤다고 비판했습니다 3권 2장 33절. 토마스도 믿음을 하나님이 계시하셨기에 하는 동의로 정의하지만 제2부 제2편 1문 1항, 살아 있는 믿음은 사랑으로 형성된다고 봅니다. 그러면서도 피터 마터 버미글리와 지롤라모 잔키 같은 개혁파 신학자들은 토마스의 구별과 용어를 즐겨 썼고, 성공회의 리처드 후커는 법에 관한 그의 가르침에 크게 기대었습니다.
오늘의 복음주의자들도 그를 여러 갈래로 읽습니다. 프랜시스 쉐퍼는 그가 자연과 이성에 은혜와 떨어진 자리를 내주었다고 비판했는데, 이 물음은 죄가 진리를 아는 일보다 선을 바라는 일을 더 크게 망가뜨렸다는 그의 말에서 따져 볼 수 있습니다 제2부 제1편 109문 2항. 다른 이들은 그에게서 동지를 봅니다. 변증가들은 그의 다섯 가지 길을 다루고(하나님은 존재하는가?), 최근 수십 년 동안 많은 개혁파와 복음주의 신학자가 종교개혁자들도 토마스와 함께 지녔던 고전적 신론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공로와 확신과 성례에 관한 차이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토마스는 가장 높은 것에 관한 가장 작은 앎이 낮은 것에 관한 가장 확실한 앎보다 더 바랄 만하다고 말했습니다 제1부 1문 5항. 그에게 이성의 빛과 은혜의 빛은 모두 우리 안에 비치시는 한 태양, 곧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제2부 제1편 109문 1항. 시편 기자도 그 빛을 노래합니다.
생명의 샘이 주께 있으므로 우리가 주의 빛 안에서 빛을 보리이다.
시 36:9
출처
차례
싣지 않은 부분: 3,000개가 넘는 항 가운데 거룩한 가르침, 하나님, 영혼, 은혜, 믿음, 성육신, 수난, 성찬을 다룬 29개 항만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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