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읽기

프로슬로기온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 1077–1078년

영어 본문: S. N. 딘 영역(1903) · 위키문헌 · 우리말은 이 영어 본문에서 옮겼습니다.

해설

『프로슬로기온』은 안셀무스가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린 기도로, 하나님을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며 그분이 참으로 계시고 우리가 믿는 그대로의 분이심을 하나의 논증으로 밝히려 한 짧은 책입니다.

베크의 수도사가 찾은 하나의 논증

캔터베리의 안셀무스는 1033년 이탈리아 북부의 아오스타에서 태어났습니다. 젊어서 고향을 떠난 그는 1060년 무렵 노르망디의 베크 수도원에 들어갔고, 1063년 그곳의 부원장이 되어 젊은 수도사들을 가르쳤습니다. 1078년에는 베크의 원장이, 1093년에는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자유를 두고 잉글랜드 왕들과 부딪혀 두 번 망명길에 올랐고, 1109년 캔터베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생애와 또 다른 책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는 신학 과정의 안셀무스와 스콜라 신학의 시작 과에서 볼 수 있습니다.

『프로슬로기온』은 그가 베크의 부원장이던 1077–1078년에 쓴 책입니다. 서문에서 그는 이 책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들려줍니다. 앞서 그는 형제들의 간청으로 믿음의 근거를 묵상하는 본보기가 될 책 한 권을 썼는데, 1076년 무렵의 『모놀로기온』입니다. 그 책은 여러 논증을 사슬처럼 엮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무엇의 도움도 없이 그 자체만으로 하나님이 참으로 계심을, 그분이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고 다른 모든 것이 있고 잘 있기 위해 필요로 하는 최고의 선이심을,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믿는 모든 것을 밝혀 줄 하나의 논증이 있을지 묻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서문 1.

찾는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손에 잡힐 듯하다가도 사라지기를 거듭하자, 그는 찾을 수 없는 것을 찾고 있는 듯하여 그만두려 했습니다. 다른 일까지 방해받지 않도록 그 생각을 아예 떨쳐 버리려 하자 오히려 그 생각이 더 집요하게 그를 따라왔고, 그것과 싸우다 지친 어느 날 단념했던 증명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고 그는 씁니다 서문 2. 훗날 그를 곁에서 모신 수도사이자 전기 작가인 에드머는 그 깨달음이 수도원의 밤 기도 시간에 찾아왔다고 전합니다.

그는 이 책을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자기 마음을 일으키며 믿는 것을 이해하려 애쓰는 사람의 목소리로 썼습니다 서문 3. 처음 붙인 제목은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fides quaerens intellectum)이었습니다. 몇 해 뒤 많은 사람이, 특히 갈리아에서 교황 사절의 직무를 맡고 있던 리옹의 대주교 후고가 책에 이름을 밝히라고 권하자, 그는 앞의 책을 『모놀로기온』, 곧 독백이라 하고 이 책을 『프로슬로기온』, 곧 담화라 고쳐 불렀습니다. 앞의 책이 홀로 따져 묻는 생각이었다면,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향해 건네는 말입니다.

스물여섯 장으로 드린 기도

여기에는 서문과 스물여섯 장 전체가 한 부분으로 실려 있습니다. 한자리에서 읽을 수 있을 만큼 짧지만, 그 안에 기도와 논증과 찬양이 촘촘히 엮여 있습니다. 1장은 마음을 일으키는 권면과 기도이고, 2장부터 4장까지는 하나님이 참으로 계심을 보이는 논증입니다. 5장부터 13장까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곧 의로우심과 전능하심과 자비하심, 생명 자체이심과 어디에나 언제나 계심을 차례로 생각합니다. 14장부터 18장까지 영혼은 찾은 분을 느끼지 못하는 슬픔을 고백하고, 19장부터 22장까지는 시간과 장소에 매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을 묵상합니다. 23장은 찾은 선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심을 고백하며, 24장부터 26장까지는 그 선을 누릴 이들의 기쁨을 바라보다가 기도로 끝납니다. 사본에는 흔히 가우닐로라는 수도사의 반론과 그에 대한 안셀무스의 답변이 함께 실렸지만, 이 두 글과 『모놀로기온』은 여기에 싣지 않았습니다.

책은 논증이 아니라 권면으로 열립니다. 안셀무스는 보잘것없는 사람인 자기 자신에게, 잠시 바쁜 일과 어지러운 생각을 내려놓고 마음의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과 그분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생각 말고는 모두 내보낸 뒤 문을 닫고 그분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1.1. 예수께서도 기도할 때에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 6:6). 그리고 그는 온 마음으로 시편 기자의 고백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주께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셨을 때에 내 마음이 주께 아뢰기를, 주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시 27:8

그러나 찾는 이는 먼저 자기가 얼마나 먼 데 있는지를 깨닫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뵙도록 지음 받았으나 아직 그 지음 받은 일을 하지 못했다고 탄식하고 1.2, 사람이 지음 받은 목적인 복을 잃고 지음 받지 않은 비참을 얻었다고 웁니다 1.3. 하나님을 향해 애썼으나 자기 자신에게 걸려 넘어졌다는 고백은 이 책에서 가장 정직한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1.5.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가르쳐 주지 않으시면 찾을 수 없고 드러내 주지 않으시면 만날 수 없다고 고백하며, 죄의 연기로 흐려지고 닳아 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지어 달라고 구합니다 1.7.

1장의 마지막 문장들은 책 전체의 열쇠입니다. 안셀무스는 하나님의 높으심을 꿰뚫으려 하지 않고, 마음이 이미 믿고 사랑하는 그 진리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그는 믿기 위해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 믿으며, 믿지 않으면 이해하지도 못하리라는 것까지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1.7. 흔히 라틴어로 ‘크레도 우트 인텔리감’(credo ut intelligam)이라 줄여 부르는 이 고백은, 믿음이 이해에 앞선다고 가르친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을 잇습니다. 신학 과정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과도 이 문장에서 출발합니다.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

2장도 기도로 시작합니다. 안셀무스는 믿음에 이해를 주시는 주님께, 주님이 우리가 믿는 대로 계시며 우리가 믿는 바로 그분이심을 이해하게 해 달라고 구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믿는다고 말합니다 2.1. 이것은 그가 따로 지어낸 정의가 아니라 믿음이 하나님께 드리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시편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어리석은 자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 하였도다. 그들은 부패하여 가증한 일들을 행하였으니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시 14:1

안셀무스의 논증은 이 어리석은 자에게서 출발합니다. 그 사람도 이 이름을 들으면 그 말을 이해하고, 이해한 것은 그의 이해 안에 있습니다. 다만 그는 그것이 실제로 있다고는 이해하지 않습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전에는 그림이 마음속에만 있고, 그린 뒤에야 마음속에도 실제로도 있는 것과 같습니다 2.2. 그런데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이해 안에만 있다면, 그것이 실제로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고, 그쪽이 더 큽니다. 그러면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되어 버리니,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해 안에도, 실제로도 있다는 것입니다 2.4.

3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없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크므로,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만큼 참으로 있습니다. 그리고 안셀무스는 그분이 바로 우리 주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3.1. 하나님 말고 다른 모든 것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 하나님만이 가장 참되게 계십니다. 누군가 하나님보다 나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면 피조물이 창조주보다 높아질 터인데, 그것은 터무니없다는 것입니다 3.2.

그렇다면 어리석은 자는 어떻게 하나님이 없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4장의 답은, 무엇을 생각한다는 데 두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키는 낱말만 생각할 수도 있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불과 물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도 말로는 불이 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참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듯이, 하나님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사람은 그분이 없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4.3. 논증의 끝에서 안셀무스는 다시 무릎을 꿇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선물로 믿던 것을 이제는 하나님의 비추심으로 이해하게 되어, 믿기를 원하지 않는다 해도 이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며 거듭 감사합니다 4.4. 그에게 논증은 믿음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받은 선물을 이해로 맛보는 일이었습니다.

그 뒤로 이 이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생각하는 길잡이가 됩니다. 하나님은 있지 않은 것보다 있는 것이 나은 모든 것이시니, 의롭지 않은 것보다 의로운 것이, 복되지 않은 것보다 복된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5.1.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썩거나 거짓말하실 수는 없는데,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힘이 아니라 무력함이기 때문입니다 7.1. 하나님께는 부분이 없어서, 생명과 지혜와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조각이 아니라 모두 하나이며 저마다 하나님 전체입니다 18.4. 그런데 15장에서 이 이름은 놀라운 데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분이실 뿐 아니라,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그런 존재를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그분이 아니시라면, 하나님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15.1. 이 이름은 하나님을 생각 속에 가두는 정의가 아니라, 생각이 하나님 앞에서 멈추어 무릎 꿇을 자리를 알려 주는 표지입니다.

이 고백을 둘러싸고 14장부터 18장까지 영혼은 낯선 슬픔을 털어놓습니다. 찾던 하나님이 생명이요 빛이요 지혜요 선이심을 찾았는데, 어째서 찾은 분을 느끼지 못하는가? 영혼의 눈이 제 연약함으로 어두워졌고,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에 눈이 부셨기 때문이라고 그는 답합니다 14.4. 바울은 하나님이 "오직 그분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그분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며 아무도 그분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나니 그분께 존귀와 영존하는 권능이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라고 말합니다 (딤전 6:16). 안셀무스는 그 빛이 너무 밝아 볼 수 없지만, 약한 눈이 해를 바로 보지 못하면서도 햇빛으로 모든 것을 보듯이 자기가 보는 모든 것을 그 빛으로 본다고 말합니다 16.1. 하나님은 어디에나 온전히 계시는데 그는 그분을 보지 못하고, 그분 안에서 움직이며 존재하는데도 그분께 나아가지 못합니다 16.2. 바울도 아덴 사람들에게 "이는 우리가 그분 안에서 살며 움직이며 존재하기 때문이라. 너희의 시인들 중의 어떤 사람들도 이르되, 우리 또한 그분의 후손이라, 하였나니"고 전했습니다 (행 17:28). 하나님이 왜 보이지 않으시는지 묻는 이에게는 하나님은 왜 보이지 않는가?도 도움이 됩니다.

공의와 자비, 삼위 하나님, 그리고 기쁨

9장에서 안셀무스는 오래된 물음과 씨름합니다. 하나님이 온전히 의로우시다면 어떻게 악인을 용서하실 수 있는가? 영원한 죽음을 받아 마땅한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 어떻게 의로운가? 그는 하나님의 자비가 흘러나오는 샘이 그 선하심의 가장 깊고 은밀한 곳에 숨어 있다고 말합니다. 강물이 어디로 흐르는지는 보이지만 그 강이 솟는 샘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9.3. 그 앞에서 그는 따지기를 잠시 멈추고, 그 자비가 자기에게도 흘러오기를, 공의로 갚지 마시고 자비로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9.5. 바울도 이런 깊이 앞에서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들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들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찬양합니다 (롬 11:33).

그의 답은 이렇습니다. 의인에게만 선한 이보다 의인과 악인 모두에게 선한 이가 더 선합니다 9.2. 그리고 하나님은 그보다 더 선한 분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선하셔야 하므로, 악인을 용서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걸맞은 의로운 일입니다 9.7. 악인을 벌하실 때는 그들의 행위에 걸맞기에 의롭고, 용서하실 때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걸맞기에 의롭습니다 10.1. 그래서 그는 주의 모든 길이 인자와 진리라는 시편과 주께서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다는 시편을 나란히 놓고, 하나님의 자비가 그분의 공의에서 난다고 결론짓습니다 11.2. 시편은 "주께서는 자신의 모든 길에서 의로우시며 자신의 모든 일에서 거룩하시도다."라고 노래합니다 (시 145:17). 다만 이 책은 그 자비가 십자가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아직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가볍게 넘기지 않으시면서 어떻게 죄인을 용서하시는가 하는 물음은, 스무 해쯤 뒤 그리스도를 한가운데 두고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에서 다시 다루어집니다.

이어서 그는 이해의 끝에 이르렀음을 정직하게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왜 악인을 구원하실 수 있는지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어도, 똑같이 악한 사람들 가운데 왜 이 사람은 최고의 선하심으로 구원하시고 저 사람은 최고의 공의로 정죄하시는지는 어떤 생각으로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11.3. 아우구스티누스를 잇는 이 고백을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다르게 이어받았습니다.

개혁교회는 여기서 하나님이 사람 안의 어떤 조건을 보시지 않고 은혜로 택하신다는 무조건적 선택과, 그 이유를 하나님의 숨은 뜻에 맡기는 겸손을 함께 읽습니다. 루터교회는 구원으로의 선택을 순전한 은혜로 고백하면서도, 사람이 멸망하는 까닭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 사람의 죄와 불신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웨슬리 전통은 하나님이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말씀을 붙들고 (딤전 2:4),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선행 은총을 사람이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에서 그 차이를 봅니다. 가톨릭 교회는 하나님이 아무도 멸망으로 예정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치면서, 이 신비를 설명하는 여러 신학 학파를 함께 인정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고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합니다. 복음주의 안의 여러 견해는 교리 과정의 은혜와 선택 과에서 나란히 볼 수 있습니다.

23장에서 이 모든 선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고백됩니다. 아버지께서 자기를 말씀하시는 말씀이 곧 아들이시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나누시는 하나의 사랑이 두 분에게서 나오시는 성령이십니다 23.1. 세 분 각각이 곧 온 삼위일체이시며, 늘어나지도 달라지지도 않는 하나의 단순한 하나님이십니다 23.2.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신다는 이 고백은 서방 교회의 고백, 곧 필리오케를 따른 것으로, 안셀무스는 1098년 바리 공의회에서 남이탈리아의 그리스계 감독들 앞에서 이 고백을 변호하기도 했습니다. 정교회는 예수께서 "그러나 내가 아버지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위로자 곧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께서 오실 때에 그분께서 나에 대해 증언하실 것이요"이라 하신 말씀을 따라 (요 15:26) 아버지만이 성령의 근원이시라고 고백하며, 서방이 신경에 이 문구를 홀로 더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교리 과정의 삼위일체 과에서 더 다룹니다.

마지막 세 장은 기쁨으로 나아갑니다. 지음 받은 생명이 선하다면 지으신 생명은 얼마나 선하겠느냐고 그는 묻고 24.1, 몸과 영혼의 좋은 것을 찾아 밖으로 헤매지 말고 모든 선이 그 안에 있는 하나의 선을 사랑하라고 자기에게 말합니다 25.2. 그 복을 누릴 이들은 서로를 자기처럼 사랑하므로, 다른 이의 기쁨이 곧 자기 기쁨이 되어 기쁨이 셀 수 없이 불어납니다 25.8. 그 기쁨은 너무 커서 기뻐하는 이들 안에 다 들어갈 수 없고, 오히려 기뻐하는 이들이 그 기쁨 안으로 온전히 들어간다고 그는 말합니다 26.1. 바울은 이사야의 말을 빌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은 "그러나 이것은 기록된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이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도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합니다 (고전 2:9).

이 책을 읽어 온 길, 잘 읽는 길

안셀무스가 살아 있을 때 이미 반론이 나왔습니다. 마르무티에 수도원의 수도사로 알려진 가우닐로는 어리석은 자를 대신해 글을 써서, 그렇다면 바다 어딘가에 있다는 더없이 훌륭한 섬도 생각하기만 하면 실제로 있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안셀무스는 이 논증이 섬 같은 것이 아니라 오직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분께만 맞는다고 답했고, 전해지기로는 두 사람의 글을 이 책과 함께 베끼게 했습니다. 두 세기쯤 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명제가 그 자체로는 자명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을 알지 못하므로 우리에게는 자명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라는 말을 그렇게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이해한다 해도 그것이 생각 속에 있다는 것만 따라 나온다는 것입니다 제1부 2문 1항. 그는 대신 하나님이 이루신 결과, 곧 세상에서 출발해 하나님께 이르는 다섯 가지 길을 내놓았습니다 제1부 2문 3항.

그 뒤에도 이 짧은 논증은 잠들지 않았습니다. 17세기의 데카르트는 이를 새 형태로 되살렸고, 18세기의 칸트는 주로 데카르트의 형태를 겨누어, 있다는 말은 어떤 것의 개념에 아무것도 더해 주지 않는다고 비판했습니다. 이 논증을 존재론적 논증이라 부르게 된 것도 흔히 칸트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신학 과정의 계몽주의와 근대 신학 과). 이 논증은 지금도 철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입니다. 20세기에 카를 바르트는 이 책을 이성으로 믿음의 토대를 놓으려는 증명이 아니라 교회의 믿음 안에서 하는 신학으로 읽었고, 오늘날에도 이 논증을 다듬어 변호하는 그리스도인 철학자들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함께 있습니다.

이 차이 뒤에는 하나님을 아는 길을 두고 전통마다 다른 강조가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토마스가 걸은 길을 따라,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통해 사람 이성의 자연적 빛으로 확실히 알려지실 수 있다고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가르쳤습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 하느님의 아들. 바울도 하나님의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은 세상의 창조 이후로 분명히 보이며 만들어진 것들을 통해 깨달아 알 수 있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합니다 (롬 1:20). 개혁교회는 하나님을 아는 감각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게 새겨져 있다는 칼뱅의 가르침에서 출발하며 기독교 강요 1권 3장, 이런 증명을 믿음의 토대라기보다 성경으로 하나님을 아는 이에게 확신을 더하는 것으로 보는 이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계신지를 묻는 물음 자체는 하나님은 존재하는가?에서 여러 길을 함께 살펴봅니다.

그러니 이 책은 먼저 기도로 읽어야 합니다. 논증만 떼어 읽으면 이 책을 반만 읽은 셈입니다. 2–4장도 하나님을 부르는 말로 이어지고, 논증이 한 걸음 끝날 때마다 감사와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1장을 건너뛰지 말고, 마음의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는 그의 권면을 따라 한 장씩 천천히, 때로는 소리 내어 읽으십시오. 2장의 논증이 말장난처럼 느껴진다면 두세 번 다시 읽어 보십시오. 가우닐로와 칸트가 문제 삼은 곳도 실제로 있는 것이 생각 속에만 있는 것보다 크다는 걸음이었으니, 그 자리를 눈여겨보면 됩니다.

가운데 장들에서는 중세의 낯선 구분 앞에서 서두르지 마십시오. 8장에서 그는 하나님이 자비하시면서도 정념에 흔들리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자비의 결과를 경험하지만,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는 감정에 휩싸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8.2.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차갑다는 말이 아니라 바깥에서 흔들려 일어나는 감정이 아니라는 오랜 가르침이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하나님께 몸과 부분과 정념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장 1항. 근래의 여러 신학자는 하나님이 피조물과 함께 아파하신다고 말하며 이 가르침에 물음을 던집니다. 이 논의는 교리 과정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과와 하나님도 감정이 있으신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 이 책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드물다는 것도 기억하십시오. 아들은 23장에서 아버지의 말씀으로 고백되고, 26장에서는 하나님이 그분을 통해 우리에게 구하라고 권하신다는 말로 나옵니다. 안셀무스는 이 책에서 먼저 믿음이 고백하는 하나님을 이해하려 했고, 그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는지는 다른 책에서 물었습니다. 그러니 성경을 곁에 펴 두고, 특히 시편과 함께 읽으면 좋습니다. 그의 문장 사이사이에는 시편의 말이 흐릅니다.

이 책은 증명으로 끝나지 않고 간구로 끝납니다. 안셀무스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여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기를, 이 세상에서 그 기쁨을 다 누릴 수 없다면 날마다 자라 가다가 마침내 충만해지기를 구합니다 26.3. 주님이 아들을 통해 구하라고 권하시고 받으리라 약속하셨으니 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붙든 약속은 이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받으리니 이로써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 16:24

출처

  1.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프로슬로기온 1077–1078 읽기
  2. 안셀무스,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 1098 읽기
  3.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읽기
  4.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가톨릭 신앙에 관한 교의 헌장(하느님의 아들) 1870
  5. 장 칼뱅, 기독교 강요 1559 읽기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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