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구원의 길
존 웨슬리 · 1765년(설교 43)
영어 본문: 웨슬리의 원문(1765; 1872년판) · CCEL · 우리말은 이 영어 본문에서 옮겼습니다.
해설
「성경적 구원의 길」은 존 웨슬리가 1765년에 펴낸 설교로, 구원이 무엇이고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이 무엇이며 그 믿음으로 어떻게 의롭다 하심과 거룩하게 하심을 받는지를 짧게 풀어, 감리교 부흥이 전한 구원의 길 전체를 한눈에 보여 줍니다.
부흥 한가운데서
존 웨슬리(1703–1791)는 평생 잉글랜드 국교회의 사제로 살았습니다. 1738년 5월 24일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한 모임에서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진’ 뒤, 그는 이듬해부터 들판에서 광부와 노동자에게 설교하고 회심한 이들을 신도회와 속회로 모아 서로 돌보게 했습니다. 그의 생애와 감리교 운동의 이야기는 신학 과정의 웨슬리와 감리교 운동 과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적 구원의 길」은 그 부흥이 스물다섯 해 남짓 이어진 1765년, 예순을 넘긴 웨슬리가 펴낸 설교입니다. 본문은 에베소서 2장 8절입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엡 2:8
이 설교는 감리교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둘러싼 소란이 막 가라앉던 무렵에 나왔습니다. 1760년 무렵부터 런던을 비롯한 여러 신도회에서 많은 사람이 마음이 죄에서 깨끗해지고 온전한 사랑으로 채워졌다고 고백했습니다. 웨슬리는 이를 기뻐했지만, 그 가운데 일부는 자기들이 천사처럼 완전해졌다거나 다시는 넘어질 수 없다고 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전직 군인 조지 벨은 1763년 2월 28일에 세상이 끝난다고 예언했고, 웨슬리가 일찍 세운 평신도 설교자 가운데 하나인 토머스 맥스필드는 그해 런던 신도회의 일부와 함께 웨슬리를 떠났습니다.
웨슬리는 이 가르침을 거두지 않으면서 그 지나침을 바로잡아야 했고, 1766년에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펴내 자기가 처음부터 무엇을 가르쳐 왔는지 설명했습니다 웨슬리, 그리스도인의 완전. 다른 쪽에서는 그가 칭의는 믿음으로 받는다면서 성화는 행위로 얻는다고 가르친다는 비판이 부흥 초기부터 따라다녔습니다. 이 설교는 두 방향의 오해에 한꺼번에 답하며, 많은 학자가 웨슬리의 구원론을 가장 잘 간추린 설교로 꼽습니다.
웨슬리의 설교들은 감리교 교리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1763년의 표준 증서는 감리교 예배당의 설교자가 그의 『신약성서 주해』와 설교집에 담긴 것과 다른 교리를 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때 가리킨 설교집 네 권은 이 설교보다 먼저 나왔기에, 영국 감리교회가 전통적으로 꼽는 ‘표준 설교’ 44편에는 이 설교가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웨슬리가 뒤에 엮은 전집에서는 설교 권 안에 들어가, 표준 설교를 53편으로 꼽는 셈에는 들어 있습니다. ‘설교 43’이라는 번호도 이 뒤의 판들이 매긴 차례이고, 이 서재의 영어 본문은 1872년판 웨슬리 전집의 것입니다.
두 낱말, 세 물음
웨슬리는 많은 이가 신앙을 복잡하고 알아듣기 어려운 것으로 그려 왔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그려진 그대로의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앙은 쉽고 단순하다는 말로 설교를 엽니다. 그 신앙이 바라보는 끝은 한마디로 구원이고, 거기 이르는 길은 믿음입니다 서론 1. 이 두 작은 낱말에 성경 전체의 골수가 들어 있으니 둘 다 바르게 알아야 한다고 그는 말하고 서론 2, 세 가지를 묻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그 믿음으로 어떻게 구원받는가 서론 3.
설교는 이 물음을 따라 세 대목으로 나뉩니다. 첫째 대목은 아홉 단락에 걸쳐 앞서 오는 은혜에서 칭의와 거듭남을 지나 온전한 성화에 이르는 구원 전체를 그립니다. 둘째 대목은 네 단락으로 믿음을 정의하고, 셋째 대목은 열여덟 단락에 걸쳐 우리가 믿음으로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받고 거룩하게 되는지를 풉니다. 웨슬리 스스로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물음이라고 하니 II.4, 설교의 무게도 여기에 있습니다. 단락 번호는 원문을 따른 것으로, I.2는 첫째 대목의 둘째 단락입니다.
이 서재는 설교를 처음부터 끝까지 싣고 있어서 빠진 부분이 없습니다. 영어로 4,600단어 남짓한 글이라 한자리에서 읽을 수 있지만, 문장마다 성경 구절이 따옴표 속에 촘촘히 들어 있어 천천히 읽을수록 더 많이 보입니다. 서재의 마지막 자리에 놓인 이 설교는 앞의 두 책과 나란히 읽으면 좋습니다. 칼뱅의 『기독교 강요』가 신앙 전체를 네 권에 담고 버니언의 『천로역정』이 멸망의 도시에서 천성까지 가는 순례를 이야기로 그렸다면, 웨슬리는 그 길을 설교 한 편에 간추립니다.
지금 누리는 구원
웨슬리는 먼저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 흔히 생각하듯 죽은 뒤 하늘에 가는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본문이 너희가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니, 구원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는 자비로 이미 누리는 복입니다. 그 말을 ‘구원을 받아 왔다’로 옮길 수도 있으므로, 구원은 영혼에 처음 은혜가 동틀 때부터 영광 가운데 완성되기까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 전체를 가리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I.1.
그 일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기 전에 시작됩니다. 웨슬리는 흔히 ‘자연적 양심’이라고 부르는 것을 더 바르게는 선행(先行) 은총, 곧 앞서 오는 은혜라고 부릅니다.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모든 이끄심과 하나님을 향한 갈망, 그리고 "그 빛은 참 빛으로 세상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비추느니라."이 (요 1:9) 다 여기에 듭니다. 이 빛은 누구에게나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할 길을 보여 주고(미 6:8), 성령은 사람마다 때때로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이 그 깨달음을 되도록 빨리 눌러 버리고 얼마 뒤에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거나 부인한다고 웨슬리는 덧붙이며 I.2, 그의 주해도 요한복음 1장 9절의 빛을 같은 뜻으로 풉니다 웨슬리.
설교가 곧바로 다루는 구원은 두 부분, 곧 칭의와 성화로 이루어집니다. 칭의는 용서의 다른 이름입니다.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이며, 그 값은 그리스도의 피와 의,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고 고난받으신 모든 것입니다. 그 열매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 안에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I.3.
그리고 의롭다 하심을 받는 바로 그 순간 성화가 시작됩니다. 우리는 위로부터,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실제로 새로워지고, 성령으로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이(롬 5:5) 세상 사랑과 교만과 분노와 고집을 몰아내기 시작합니다 I.4.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되 떼어 놓지 않는다는 점에서 웨슬리는 칼뱅과 같은 자리에 섭니다 『기독교 강요』 3권 11장. 거듭남에 관해서는 교리 과정의 거듭남과 성령의 내주 과에서 더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변화를 맛본 사람은 죄가 아주 뿌리째 뽑혔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죄를 느끼지 못하니 죄가 없고, 움직이지 않으니 있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I.5. 그러나 시험이 돌아오고 죄가 되살아나면, 죄가 멸해진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추었을 뿐이고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했을 뿐이었음이 드러납니다. 신자는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너희가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라는 말씀대로 (갈 5:17) 자기 안에서 서로 맞서는 두 원리를 느끼고, 성령께서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언하시는데도 교만이나 고집, 분노나 불신이 이따금 꿈틀대는 것을 봅니다. 그것들이 이기지는 못하니, 주께서 그들을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I.6.
웨슬리는 여기서 그가 천사백 년 전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마카리우스를 증인으로 부릅니다. 은혜를 처음 받은 미숙한 이들은 곧 자기에게 죄가 없다고 여기지만, 분별 있는 이들은 은혜를 받은 사람도 다시 괴로움을 겪을 수 있음을 안다는 것입니다 I.7. 웨슬리는 이 동방 수도사의 설교들을 1749년부터 펴낸 『그리스도인 문고』에 줄여 싣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학자는 이 설교들이 이집트의 마카리우스가 아니라 4세기 말 시리아의 한 수도사의 글이라고 봅니다.
거듭난 때부터 성화는 점차 자라 갑니다.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고, 죄에 대하여 죽을수록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나며, 은혜에서 은혜로 나아갑니다. 모양이라도 악은 버리고,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 주의 모든 규례 안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I.8.
그렇게 기다리는 것이 온전한 성화, 곧 교만과 고집과 분노와 불신을 비롯한 모든 죄에서 온전히 구원받는 일이며, 사도의 말로 하면 "침례들에 관한 교리와 안수와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의 기초를 다시 놓지 말지니라."입니다 (히 6:1-2). 웨슬리는 ‘완전’이라는 말에 여러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온전한 사랑을 뜻한다고 못 박습니다. 죄를 몰아내는 사랑, 마음을 가득 채워 영혼의 모든 자리를 차지하는 사랑입니다 I.9. 그는 그 사랑을 바울의 세 마디로 그립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모든 일에서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18
그의 주해도 이 구절을 두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완전입니다. 이보다 더 나아갈 수는 없으며, 이에 못 미쳐 멈출 필요도 없습니다"라고 씁니다 웨슬리. 다른 글에서 그가 밝히듯, 이 완전은 실수나 연약함이나 유혹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마음을 다스리는 상태입니다 웨슬리, 그리스도인의 완전.
믿음으로, 있는 그대로, 지금
둘째 물음에 웨슬리는 히브리서 11장 1절로 답합니다. 믿음은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할 때 (히 11:1) ‘증거’로 옮긴 헬라어 엘렝코스(ἔλεγχος)는 증거이면서 확신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눈이나 다른 바깥 감각으로는 알 수 없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대한 초자연적인 증거이고, 성령은 영혼에 빛을 비추시는 동시에 그 빛을 알아볼 눈을 열어 주십니다 II.1. 그의 주해도 이 구절을 "믿는 자에게 제시된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증거요, 이로써 믿는 자 안에 생긴 확신이니"라고 풉니다 웨슬리.
좁은 뜻에서 믿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화목하게 하셨다는 확신을 넘어, 그리스도께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분이라는 확신입니다 (갈 2:20). 이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으로, 그분의 모든 직분 안에서 받아들입니다 II.2. 그래서 웨슬리에게 구원하는 믿음은 확신을 품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므로(롬 8:16) 믿는 이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사랑하셨음을 알고, 그 앎에서 어린아이 같은 신뢰가 나오니, 확신이 신뢰보다 먼저라는 것입니다 II.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확신이 믿음의 본질에 속하지는 않아서 참된 신자도 오래 기다릴 수 있다고 말하고 18장 3항, 웨슬리 자신도 뒤에는 확신이 약한 이들을 더 너그럽게 대했습니다.
셋째 대목에서 웨슬리는 먼저 믿음이 칭의의 조건이며 유일한 조건이라고 말합니다. 믿기 전에는 아무도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 순간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III.1. 그러면 회개는 어떻게 되느냐는 반문에 그는, 하나님이 회개하고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라고 명하시니 (마 3:8) 이것들도 어떤 뜻에서는 칭의에 필요하다고 답합니다. 그러나 믿음과 같은 뜻으로, 같은 정도로 필요하지는 않아서, 열매는 시간과 기회가 있을 때에만 필요하고 회개와 그 열매는 믿음에 이르게 하는 데 멀리서 필요할 뿐 칭의에 곧바로 필요한 것은 믿음 하나라는 것입니다 III.2.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열매를 맺을 틈도 없이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는 약속을 들었습니다 (눅 23:43).
성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웨슬리는 자기가 성화는 행위로 받는다고 가르친다는 말을 스물다섯 해 동안 들어 왔지만 늘 그 반대를 증언해 왔다고 하며,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과 꼭 같이 믿음으로 거룩하게 되고 믿음은 성화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말합니다 III.3. 그렇다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에게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칭의 앞의 회개가 있듯 칭의 뒤의 회개가 있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는 선한 일에 힘써야 하며, 그것을 일부러 소홀히 하는 사람은 은혜 안에서 자랄 수도, 받은 은혜를 지킬 수도 없습니다 III.5.
이 둘째 회개에는 죄책도, 정죄의 느낌도,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그것은 거듭난 이의 마음에 아직 남아 있으나 더는 다스리지 못하는 육신의 생각을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일이며 III.6, 웨슬리는 여기서 거듭난 이들 안에도 본성의 부패가 남아 있다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신조를 빌려 옵니다 39개 신조 9조. 이 회개는 가장 선한 행실에도 악이 섞여 있음을 보게 하여, 신자는 전에 가장 나쁜 죄를 부끄러워하던 것보다 지금 가장 선한 의무를 더 부끄러워하게 되고, 그 안에 공로가 될 만한 것이 전혀 없음을 압니다 III.7. 또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가 먼저 다가오고 매 순간 함께하지 않으면 선한 생각 하나도 품을 수 없다는 무력함을 깨닫게 합니다 III.8.
이 회개와 함께 두 가지 선한 일이 따릅니다. 하나는 경건의 일로, 공중 기도와 가정 기도와 골방의 기도, 주의 성찬,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는 일, 몸이 허락하는 만큼의 금식입니다 III.9. 다른 하나는 자비의 일로, 주린 이를 먹이고 헐벗은 이를 입히며 나그네를 맞고 옥에 갇힌 이와 병든 이를 찾아가는 일, 그리고 무지한 이를 가르치고 미지근한 이를 깨우며 흔들리는 이를 굳게 하는 일입니다. 웨슬리는 이것이 온전한 성화에 필요한 회개와 그 열매이며,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온전한 구원을 기다리라고 정하신 길이라고 말합니다 III.10. 그러나 이번에도 그것들은 믿음이 이어지고 자라게 하는 데 필요할 뿐, 성화에 곧바로 필요한 것은 믿음 하나입니다 III.13.
그 사이에서 웨슬리는 신자 안에는 죄가 전혀 없다는, 겉보기에 해롭지 않은 생각이 이 회개를 막아 성화의 길을 막아 버린다고 경고합니다 III.11. 반대로 온전한 구원을 기대하는 데에는 아무 위험이 없습니다. 설령 그런 복이 없다 하더라도 그 기대는 하나님이 맡기신 달란트를 부지런히 쓰게 하기 때문입니다 III.12.
그러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고 사랑으로 온전하게 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웨슬리는 네 가지 확신으로 답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이것을 성경에서 약속하셨다는 확신이며, 그는 모세의 옛 약속을 듭니다.
또 주 네 하나님께서 네 마음과 네 씨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시고 네 마음을 다하며 혼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사 네가 살게 하시며
신 30:6
사랑이 온 마음을 차지한다면 죄가 들어설 자리가 어디 있겠느냐고 그는 묻습니다 III.14. 둘째는 약속하신 분이 이루실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마음을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는 일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해도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 하시니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마 19:26) III.15.
셋째는 하나님이 그 일을 지금 하실 수 있고 하기를 원하신다는 확신입니다. 하나님께는 한순간도 천 년과 같으니 더 많은 시간도, 우리에게서 더 나은 자격도 기다리실 필요가 없고, 그러니 어느 때든 "(그분께서 이르시되, 받아 주는 때에 내가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구조하였노라, 하시나니, 보라, 지금이 받아 주시는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후 6:2) III.16. 넷째는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신다는 확신이며, 그때 믿는 이는 "그러나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만일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서로 교제하고 또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느니라."라는 말씀 (요일 1:7)의 깊은 뜻을 경험합니다 III.17.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이 이 일을 점차 하시는지 한순간에 하시는지를 묻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점차 이루어져 죄가 그치는 순간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은 대개 한순간에 하신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선한 일들 안에서 그것을 믿음으로, 있는 그대로, 지금 기다리라고 권합니다. 이 셋은 떼어 놓을 수 없어서, 먼저 무엇이 되거나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아직 행위로 구하는 것이고 믿음으로 구한다면 있는 그대로 지금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III.18. 설교는 문 앞에서 기다리시는 그리스도를 맞아들이자는 찬송 한 절로 끝납니다.
이 길, 특히 온전한 성화는 전통마다 다르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개혁교회는 성화가 사람 전체에 미치지만 이생에서는 불완전하여 부패의 잔재가 남는다고 고백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3장 2항,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가장 거룩한 사람들도 이생에서는 순종을 겨우 조금 시작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14문. 또 개혁교회의 구원의 서정에서는 하나님의 효과적인 부르심과 거듭남이 믿음을 낳지만, 웨슬리는 선행 은총으로 응답할 수 있게 된 사람이 믿을 때 칭의와 거듭남이 함께 온다고 봅니다. 루터교회는 그리스도인을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으로 보고 루터, 갈라디아서 강해, 『95개 논제』의 첫 논제처럼 신자의 삶 전체를 참회로 여기며 제1논제, 성장을 날마다 세례로 돌아가는 삶으로 이해합니다 루터, 소교리문답. 개혁교회가 웨슬리에게 물어 온 것과 웨슬리 쪽의 답은 웨슬리와 감리교 운동 과에, 여러 전통의 성화 이해는 성화와 견인 과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칭의의 시작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앞서 오는 은혜에 있다고 가르쳤고 트리엔트 공의회, 의화에 관한 교령 5장, 모든 신자가 사랑의 완전으로 부름받았다고 가르치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헌장 40항, 이생에서 다 이루지 못한 정화는 죽은 뒤에 마친다고 봅니다 (연옥). 정교회는 구원을 은혜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해 가는 신화(테오시스)로 말하고,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처럼 완전을 끝없는 자람으로 이해하기에 한순간에 받는 둘째 은혜라는 말은 쓰지 않습니다. 다만 웨슬리가 마카리우스 같은 동방 교부를 즐겨 읽은 까닭에, 많은 학자는 그의 완전 이해에서 동방의 숨결을 듣습니다. 19세기 미국의 성결 운동은 한순간에 받는 ‘두 번째 축복’을 가르침의 중심에 두었고, 나사렛교회와 구세군, 그리고 ‘사중복음’의 하나로 성결을 전하는 한국의 성결교회가 이 흐름에 섭니다. 이 흐름에서 20세기에 나온 오순절 운동은 회심 뒤의 성령 세례를 강조했고 하나님의 성회, 기본 진리 선언, 그 안에는 온전한 성화를 둘째 은혜로 지킨 교회도, 성화를 평생의 과정으로 보는 교회도 있습니다.
이 설교를 잘 읽으려면
교회가 이 설교를 읽는 까닭은, 믿음으로만 받는 구원과 마음과 삶의 거룩함을 이처럼 짧은 글에 함께 붙든 글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웨슬리는 칭의에서 루터와 칼뱅과 같은 말을 하면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사랑으로 온전히 새롭게 하신다는 소망을 끝까지 놓지 않습니다. 감리교회에서 이 설교는 교리의 기준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많은 감리교회는 지금도 목회자 후보에게 웨슬리가 설교자들에게 묻던 대로 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다른 전통의 그리스도인에게는 함께 씨름할 좋은 대화 상대입니다.
이 설교는 묻고 답하는 글입니다. 웨슬리는 반대자나 의문을 품은 독자의 말을 따옴표에 넣어 묻고 스스로 답하므로, 따옴표 안의 물음은 그의 생각이 아닙니다. 『신학대전』의 반론처럼 그 뒤의 답과 구별해 읽으십시오. 또 ‘조건’이라는 말을 공로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가장 선한 일에도 공로가 없다고 하고 III.7, 온전한 사랑을 구하는 사람도 갚을 것도 내세울 것도 없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사실만 붙든 가련한 죄인으로 구하라고 합니다 III.18.
어려운 대목도 있습니다. 웨슬리는 하나님이 이 일을 대개 한순간에 하신다는 것을 편견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사실이라고 말하지만, 다른 전통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대목에서 성경이 정말 그렇게 가르치는지 묻고, 웨슬리 전통 안에서도 한순간의 체험보다 평생의 자람을 더 강조하는 이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는 그의 재촉은 사람을 몰아세우려는 말이 아닙니다. 더 나아진 뒤에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 풀어 주는 초대입니다. 회개와 믿음에 관해서는 회개란 무엇인가?와 믿음이란 무엇인가?도 함께 읽으면 좋습니다.
설교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준비되어 계시고, 문 앞에서 기다리신다는 말로 끝납니다 III.18. 웨슬리가 마지막에 붙든 것은 요한계시록의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문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계 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