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읽기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 1098년

영어 본문: J. G. 보스 영역(1854–55) · 위키문헌 · 우리말은 이 영어 본문에서 옮겼습니다.

해설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는 캔터베리의 안셀무스가 하나님이 왜 사람이 되셔서 죽으셔야 했는가를 제자 보소와 묻고 답하며 이성으로 따져 본 대화로, 죄와 보속과 신인(神人)에 관한 그의 논증은 서방 교회가 십자가를 생각해 온 방식에 깊은 자국을 남겼습니다.

망명길의 대주교

안셀무스는 1033년 이탈리아 북부 아오스타에서 태어나, 1060년 무렵 노르망디의 베크 수도원에 들어갔고 그곳의 원장을 거쳐 1093년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프로슬로기온』을 써서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의 길을 보여 준 그는 무엇보다 기도하는 수도사였습니다. 그러나 대주교가 된 뒤 그는 교회의 자유를 두고 잉글랜드 왕 윌리엄 2세와 거듭 부딪혔고, 1097년 말 잉글랜드를 떠나 로마로 향했습니다. 두 번에 걸친 망명의 첫 번째였습니다. 그의 생애와 신학은 신학 과정의 안셀무스와 스콜라 신학의 시작 과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는 이 고단한 시절의 책입니다. 서문에서 안셀무스는 여러 사람의 간청으로 이 책을 잉글랜드에서 시작해 망명지에서 마쳤으며, 마음의 큰 괴로움 가운데 썼으나 그 까닭은 하나님이 아신다고만 말합니다 서문. 많은 학자는 여기서 왕과의 다툼과 대주교직의 무거운 짐을 떠올립니다. 그의 전기 작가가 전하기로, 그는 1098년 남부 이탈리아 카푸아 근처의 한 산골 마을에 머물며 이 책을 끝냈습니다. 다 쓰기도 전에 앞부분이 그도 모르게 베껴져 돌았기 때문에, 바라던 것보다 서둘러, 그만큼 짧게 마무리해야 했다고도 그는 밝힙니다.

책이 답하려는 물음은 첫 장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나 다른 사람을 통해서, 또는 그저 뜻하시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구하실 수 있었을 텐데, 무슨 까닭과 필요로 사람이 되셔서 자기 죽음으로 세상에 생명을 돌려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1.1.1. 믿지 않는 이들은 이 믿음을 어리석다고 비웃었고, 믿는 이들도 마음속으로 이 물음을 곱씹었습니다. 그 까닭을 글로 남겨 달라고 청한 이들은 이성으로 믿음에 이르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믿는 것을 이해하고 묵상하며 기뻐하고 소망의 이유를 묻는 이에게 답할 준비를 갖추려 했다고 안셀무스는 말합니다 1.1.1. 그 뒤에는 베드로의 권면이 있습니다.

오직 너희 마음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 너희에게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며

벧전 3:15

보소와 나눈 두 권의 대화

묻고 답하는 글이 더 많은 이에게, 특히 생각이 느린 이들에게 쉽게 읽힌다며 안셀무스는 이 물음을 가장 끈질기게 청해 온 보소를 대화의 상대로 삼습니다 1.1.1. 베크의 수도사로 훗날 그 수도원의 원장이 된 보소는 믿음이 흔들려서 묻지 않습니다. 깊은 믿음의 일은 먼저 믿고 그다음에 이성으로 따지는 것이 바른 순서지만, 믿음에 굳게 선 뒤에도 믿는 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은 게으름이라는 것이 그의 말입니다 1.2.1. 그러면서도 그는 믿지 않는 이들의 말을 빌려 반론을 펴겠다고 합니다 1.2.9. 책 끝에서 보소는 이 논증이 이성의 힘만으로 유대인과 이교도를 설득한다고 말하는데 2.22.1, 많은 학자는 그 무렵 수도원 사람들과 유대인 학자들 사이에 오가던 논쟁도 이 책의 배경에 있었으리라고 봅니다.

책의 방법은 서문에 밝혀져 있습니다. 1권은 그리스도에 관해 아무것도 알려진 적이 없는 듯 그분을 제쳐 둔 채, 그분 없이는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음을 반드시 그러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로 증명합니다. 2권도 같은 방식으로, 사람은 몸과 영혼이 함께 복된 영생을 누리도록 지어졌고 그 뜻은 이루어져야 하지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입니다 서문. 라틴어로 ‘레모토 크리스토’(remoto Christo), 곧 그리스도를 제쳐 놓고 따지는 이 방법은 의심이 아니라 시험입니다. 교회가 믿는 것이 믿음 밖에서 출발하는 사람에게도 이치에 맞는지를 보이려는 것입니다.

서재에는 이 책 전체가 논증이 꺾이는 자리를 따라 네 부분으로 실려 있습니다. 서문과 1권 1–10장은 물음을 세우고 반론을 들으며, 1권 11–25장은 죄와 보속이 무엇인지 따져 사람이 스스로는 빚을 갚을 수 없음을 보입니다. 2권 1–9장은 그 빚을 갚을 이가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신 분이어야 함을 논증하고, 2권 10–22장은 그분의 죽음이 어떻게 사람을 구원하는지를 말하며 책을 맺습니다. 현대 라틴어 판본이 책 앞에 싣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이 책을 바치는 짧은 글만은 서재의 본문에 없습니다.

죄의 무게와 신인(神人)의 보속

안셀무스는 먼저 오래된 어울림들을 살핍니다. 사람의 불순종으로 죽음이 왔으니 사람의 순종으로 생명이 돌아오고, 죄가 여자에게서 시작되었으니 구원자도 여자에게서 나시며, 나무 열매로 사람을 이긴 마귀가 사람이 진 나무 위에서 패한다는 것입니다 1.3.2. 바울도 아담과 그리스도를 이렇게 나란히 놓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로운 자가 되리라.

롬 5:19

보소는 이 어울림이 아름답다고 인정하면서도, 단단한 바탕 없이 내놓으면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구름 위에 그린 그림처럼 보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1.4.1. 먼저 그 일이 왜 그래야만 했는지를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화는 여러 교부가 써 온 설명, 곧 마귀가 타락한 사람에 대해 권리를 가졌기에 하나님이 그것을 존중하셔야 했다는 설명도 내려놓습니다. 보소의 말대로 마귀도 사람도 하나님의 것이니 마귀에게는 아무 권리가 없고,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고 한 증서도 (골 2:14) 마귀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결이라는 것입니다 1.7.1.

그다음 보소는 가장 날카로운 반론을 꺼냅니다. 죄인을 풀어 주려고 죄 없는 이를 정죄하는 재판관이라면 그 자신이 정죄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1.8.6, 하나님이 죄 없는 이의 피를 기뻐하시거나 요구하셔서 그 없이는 죄인을 용서하지 못하신다면 이상한 일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1.10.4. 안셀무스의 답은 분명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죄 없는 이를 죄인 대신 죽이지 않으셨고, 그리스도는 억지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하여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죽음을 견디셨다는 것입니다 1.8.7. 아버지께서 요구하신 것은 말과 삶으로 진리와 의를 지키는 순종이었고, 그 순종을 끝까지 놓지 않으셨기에 죽음이 그분에게 닥쳤습니다 1.9.17.

아무도 그것을 내게서 빼앗지 아니하며 내가 스스로 그것을 버리노라. 내게는 그것을 버릴 권능도 있고 그것을 다시 취할 권능도 있노라. 나는 이 명령을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느니라, 하시니라.

요 10:18

1권 11장에서 논증의 중심이 시작됩니다. 사람이든 천사든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늘 드렸다면 죄를 짓지 않았을 것이니, 죄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1.11.5. 그 빚은 이성 있는 피조물의 모든 뜻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 곧 바른 뜻이며,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온전한 영예입니다. 이 영예를 드리지 않는 이는 하나님의 것을 빼앗아 그분을 욕되게 하는 것이므로, 빼앗은 것을 돌려드릴 뿐 아니라 끼친 모욕만큼 더 갚아야 합니다 1.11.9.

이 갚음이 라틴어 ‘사티스팍티오’(satisfactio)이고, 서재의 번역은 이것을 ‘보속(補贖)’으로, 하나님께 드릴 영예(라틴어 honor)를 ‘영예’로 옮깁니다. 흔히 ‘만족’으로도 옮겨서, 그의 생각을 만족설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저 자비로 용서하실 수 없을까요? 안셀무스는 갚음도 형벌도 없이 죄를 넘기면 하나님의 나라에 질서 없는 것이 남고, 하나님 앞에서 죄 있는 이와 없는 이가 다를 바 없게 된다고 답합니다 1.12.9. 그래서 빼앗긴 영예는 갚아지거나, 아니면 형벌이 따라야 합니다 1.13.13. 이 말만 들으면 하나님이 체면을 지키려는 영주처럼 보일 수 있지만, 안셀무스는 하나님의 영예 자체에는 아무것도 더하거나 뺄 수 없다고 못 박습니다 1.15.2. 피조물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때 흐트러지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 피조물이 지켜야 할 자리와 우주의 질서와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갚을 수 있을까요? 보소는 회개와 상한 마음, 절제와 고행, 베풂과 용서와 순종을 꼽지만, 안셀무스는 그것이 모두 죄를 짓지 않았어도 이미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이라고 답합니다 1.20.7. 회개하는 마음 한 번이면 작은 죄쯤은 지워지리라 여기는 보소에게, 그는 아직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 헤아려 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1.21.3. 온 우주가 무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한 번 눈길을 돌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21.9. 게다가 사람은 들어가지 말라는 구덩이에 스스로 뛰어든 종처럼 제 잘못으로 갚을 힘을 잃었으니, 갚지 못한다는 것이 핑계가 되지 않습니다 1.24.3.

2권은 1권이 멈춘 자리, 곧 사람이 갚을 수 없는 빚을 졌고 갚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데서 1.25.10 다시 출발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누리며 복되도록 거룩하게 지어졌고 2.1.1, 하나님은 시작하신 일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어쩔 수 없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셈이니 고마워할 까닭이 있느냐는 보소에게, 안셀무스는 스스로 약속하고 기꺼이 지키는 사람의 선물이 조금도 덜 고맙지 않듯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하시는 일은 모두 은혜이며, 그 필연은 변하지 않는 그분의 선하심일 뿐이라고 답합니다 2.5.2.

6장에서 안셀무스는, 사람의 죄를 위해 하나님께 드릴 값은 하나님 아닌 온 우주보다 커야 하니 하나님밖에 드리실 수 없고, 갚아야 할 쪽은 사람이니 사람 말고는 드려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신 분, 곧 신인(神人)이 이 보속을 이루셔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고갯마루입니다 2.6.9. 보소는 여기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두 본성은 서로 바뀌거나 섞여 제3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온전한 두 본성이 한 위격 안에서 연합되어야 한다고 안셀무스는 말하는데 2.7.1, 칼케돈 공의회(451)가 고백한 신앙 그대로입니다(교리 과정의 참 하나님, 참 사람 과). 그분은 아담의 족속에서 동정녀에게서 나셔야 하고, 삼위 가운데 아들께서 사람이 되시는 것이 가장 마땅합니다 2.9.3.

죄가 없으신 그분은 죽을 빚이 없고, 순종은 모든 이성 있는 피조물이 이미 빚진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이 빚 아닌 것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예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어놓는 일입니다 2.11.29. 사람이 쉽게 죄를 지었으니 어렵게 갚는 것이 마땅하고, 의무 없이 기꺼이 죽음을 받는 것보다 더 어렵고 더 참된 드림은 없다는 것입니다 2.11.35. 그분의 생명이 얼마나 귀하냐는 물음에 보소는 그분을 조금이라도 해치느니 차라리 세상의 모든 죄를 지겠다고 답하고 2.14.5, 그 생명이 무한한 값을 지녔다고 고백합니다 2.14.17. 그분을 죽인 이들도 용서받을 수 있는 까닭은 그들이 알았더라면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는 바울의 말씀에 있습니다 (고전 2:8, 2.15.2).

마지막으로 그는 이 드림이 어떻게 우리에게 이르는지 말합니다. 그토록 큰 선물에는 상이 따라야 하지만 아들은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으시니, 그 상은 그분이 구원하시려고 사람이 되셨고 본을 남겨 주신 이들, 곧 그분의 형제들에게 돌아가 그들의 빚을 면하게 합니다 2.19.15. 안셀무스는 1권에서 사라진 듯했던 하나님의 자비를 이제 찾았다고 말합니다. 피할 길 없는 영원한 형벌 앞에 선 죄인에게 아버지는 내 독생자를 받아 너를 위한 제물로 드리라 하시고, 아들은 나를 받아 너희 영혼을 속량하라 하신다는 것입니다 2.20.1.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삼으셨나니 여기에 사랑이 있느니라.

요일 4:10

여러 갈래의 응답

교회는 십자가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는지를 하나의 공식 이론으로 정한 적이 없습니다. 안셀무스의 논증은 서방 신학에 깊이 남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인 방식은 전통마다 크게 달랐습니다. 각 전통의 말로 그 갈래를 차례로 보면 이렇습니다.

한 세대 뒤 파리의 아벨라르는 보소가 던진 것과 같은 물음, 곧 죄 없는 이의 피를 값으로 요구하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기쁨이 될 수 있느냐는 물음을 더 날카롭게 던졌습니다. 그는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사랑을 일으켜 우리를 죄의 종살이에서 자유롭게 한다는 데 무게를 두었고 아벨라르, 로마서 주석, 이 생각은 훗날 ‘도덕 감화설’로 불렸지만 많은 학자는 그것을 그의 생각 전부로 보지 않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보속의 틀을 이어받되 필연은 누그러뜨려, 하나님은 보속 없이 죄를 용서하셨어도 불의하지 않으셨으리라고 하면서도 『신학대전』 제3부 46문 2항, 그리스도의 수난이 그분의 정의와 긍휼에 함께 맞는 길이었다고 가르쳤습니다 46문 1항.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수난으로 우리를 위해 아버지께 보속하셨다고 가르칩니다 트리엔트 공의회, 의화에 관한 교령. 가톨릭 교회에서 ‘보속’은 고해 성사에서 신자가 하는 일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이 책의 보속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드리신 갚음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사티스팍티오’라는 말을 이어받되(개신교 신학은 이 말을 흔히 ‘만족’으로 옮깁니다), 안셀무스가 보속이 아니면 형벌이라고 나눈 둘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다는 형벌 대속입니다. 칼뱅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만족시키시려고 그 진노의 무게를 몸소 느끼셔야 했다고 가르쳤고 『기독교 강요』 2권 16장,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죄를 지은 바로 그 인간 본성이 만족을 드려야 한다는 안셀무스의 길을 따르다가 16문 그분이 신성의 능력으로 인성에 하나님의 진노의 짐을 지셨다고 고백합니다 17문. 많은 복음주의자는 이 견해를 십자가 이해의 중심에 두고,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법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라는 말씀을 그렇게 읽습니다 (사 53:5).

20세기 스웨덴의 루터교 신학자 구스타프 아울렌은 안셀무스의 견해를 사람 편에서 하나님께 갚음을 드리는 ‘라틴형’이라 부르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몸소 죄와 죽음과 마귀를 이기신다는 교부들과 루터의 ‘고전적’ 견해와 맞세웠습니다 아울렌, 승리자 그리스도. 많은 학자는 그가 선을 너무 날카롭게 그었다고 보지만, 그는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그런즉 자녀들은 살과 피에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의 일부를 취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죽음을 통해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히 2:14) 사람을 놓아주신다는 승리의 그림을 다시 일깨웠습니다. 정교회는 대체로 안셀무스의 틀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정교회는 부활절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죽음을 짓밟으셨다고 노래하며, 십자가와 부활을 죽음과 썩음을 이기시고 사람의 본성을 고쳐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시는 일로 말합니다(『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많은 정교회 신학자는 안셀무스의 말이 지나치게 법정의 말이라고 봅니다.

서방에서도 이 책을 두고 비판과 변호가 이어졌습니다. 비판하는 이들은 이 설명에서 주군의 체면을 중시하던 중세 사회의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의 삶과 부활이 설 자리가 좁다고 말합니다. 변호하는 이들은 그가 말한 영예가 하나님의 허영이 아니라 창조 세계의 바른 질서이고, 그도 그리스도께서 본을 남기셨으며 2.18b.3 사람으로서 마귀를 이기셨다고 말하고 2.19.19, 책이 자비를 찬양하며 끝난다는 점을 듭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이 그림들이 서로를 지우지 않고 한 십자가의 여러 면을 비춘다고 봅니다. 그 그림들은 교리 과정의 십자가와 속죄 과에서, 이 물음은 예수는 왜 죽어야 했는가?에서 나란히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잘 읽으려면

먼저 대화로 읽으십시오. 보소는 허수아비가 아닙니다. 그의 반론은 오늘의 독자가 묻는 물음일 때가 많고, 그가 짧게 동의하는 대답들은 논증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자리를 표시합니다. 안셀무스는 자기 결론을 겸손하게 내놓습니다. 더 높은 권위가 확증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더 밝히 보여 주실 때까지의 자기 생각일 뿐이라고 처음에 말하고 1.2.8, 성경에 분명히 어긋나는 것을 말했다면 그것은 거짓이라고 다짐합니다 1.18.31.

그가 하나님이 ‘해야 한다’, ‘반드시’라고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 위에 있는 어떤 강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주 작은 것도 하나님께 돌릴 수 없고, 아무리 작은 이유라도 더 큰 이유에 밀리지 않으면 필연의 힘을 갖는다는 원칙입니다 1.10.5. 2권은 그 필연이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뜻과 선하심일 뿐이라고 거듭 밝힙니다.

어려운 대목도 있습니다. 구원받을 사람들이 타락한 천사들의 빈자리를 채운다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이어받은 생각을 길게 다루는 1권 16–18장은 처음 읽을 때 가볍게 지나가도 됩니다. 보소 자신도 끝에 가서 곁길에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1.18.32. 그리스도께서 죄를 지으실 수 있었는가, 반드시 죽으셔야 했는가를 따지는 2권 10장과 17–18장의 논증은 촘촘하니 천천히 읽거나 나중에 다시 돌아오십시오. 동정녀가 아들의 죽음을 믿는 믿음으로 미리 깨끗해졌다는 대목 2.16.12나 독신이 결혼보다 낫다는 말 2.18b.7은 전통마다 다르게 받아들이는 대목입니다.

이 책은 증명으로 끝나지 않고 기쁨으로 끝납니다. 모든 것을 알아들은 보소는 이보다 더 이치에 맞고 더 달콤하고 더 바랄 만한 것을 온 세상이 들을 수 없다며 마음이 기뻐 뛴다고 말하고 2.19.16, 안셀무스는 바르게 나아오는 이라면 누구도 버림받지 않으며 어떻게 나아가고 어떻게 살지는 성경이 보여 준다고 답합니다 2.19.17. 그리고 이성으로 얻은 결론이 참되다면 그 공은 자신이 아니라 영원히 찬송받으실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고 말하며 책을 맺습니다 2.22.2. 바울도 구원의 길을 깊이 생각한 끝에 찬송으로 마칩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으며 그분께로 돌아가나니 영광이 그분께 영원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롬 11:36

출처

  1.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프로슬로기온 1077–1078 읽기
  2. 안셀무스,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 1098 읽기
  3. 피에르 아벨라르, 로마서 주석
  4.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읽기
  5. 트리엔트 공의회, 의화에 관한 교령 1547
  6. 장 칼뱅, 기독교 강요 1559 읽기
  7. 구스타프 아울렌, 승리자 그리스도 1930
  8. 아타나시우스,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4세기 / 4th century 읽기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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