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자유
마르틴 루터 · 1520년
영어 본문: R. S. 그리뇽 영역, 웨이스·부크하임 편 『종교개혁의 첫 원리』(1883) · CCEL · 우리말은 이 영어 본문에서 옮겼습니다.
해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마르틴 루터가 파문의 위협 아래 있던 1520년 교황 레오 10세에게 편지와 함께 바친 작은 책으로, 믿음으로 모든 것 위에 자유로운 주인이 된 그리스도인이 사랑으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된다는 역설 안에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담았습니다.
파문을 앞둔 1520년
마르틴 루터(1483–1546)는 비텐베르크의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사이자 성경 교수였습니다. 1517년 10월 면벌부의 효력을 토론하자며 그가 내놓은 『95개 논제』는 이 도서관에서 이 책과 짝을 이루는 글입니다. 그 62번째 논제는 교회의 참된 보화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거룩한 복음이라고 말하는데 62, 세 해 뒤에 쓴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바로 그 복음이 사람을 어떻게 자유롭게 하는지를 풀어 줍니다. 루터의 생애와 신학은 신학 과정의 루터: 십자가 신학과 칭의 과에서, 종교개혁의 사건들은 개혁주의 신앙 과정의 종교개혁 이야기 과에서 볼 수 있습니다.
논제가 퍼지자 다툼은 빠르게 커졌습니다. 편지에서 루터가 돌아보는 대로, 1518년 가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교황 특사 카예탄 추기경은 양쪽이 함께 잠잠하자는 그의 제안을 물리치고 주장을 취소하라고만 다그쳤습니다 편지 12. 이어 교황청에서 온 카를 폰 밀티츠가 화해의 길을 찾았지만, 1519년 여름 라이프치히에서 요한 에크가 본래 카를슈타트와 벌이기로 한 논쟁에 교황의 수위권이라는 새 물음을 꺼내 루터를 겨누면서 그 길도 막혔습니다 편지 13. 루터는 이 모든 일을 상대편의 탓으로 돌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편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1520년 루터는 여러 글을 잇달아 썼습니다. 8월에는 독일어로 『독일 귀족에게 보내는 글』을 써서 세례받은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라고 가르치며 제후와 귀족들에게 교회를 개혁하라고 호소했고 루터, 독일 귀족에게 보내는 글, 10월에는 라틴어로 『교회의 바벨론 포로』를 써서 일곱 성례에 관한 중세 교회의 가르침을 성경에 비추어 따졌습니다. 11월에 나온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흔히 이 두 글과 함께 1520년의 3대 논문으로 불립니다. 앞의 두 글이 싸우는 글이라면, 이 글은 가르치고 위로하는 글입니다.
그사이 로마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레오 10세는 1520년 6월 15일 칙서 『엑수르게 도미네』(주여, 일어나소서)를 내려 루터의 글에서 뽑은 41개 명제를 정죄하고, 칙서가 공포된 뒤 60일 안에 주장을 취소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경고했습니다. 칙서가 독일에 공포되기 전인 8월 말, 밀티츠의 요청을 받은 아우구스티누스회 총회는 수도회의 어른들을 루터에게 보내, 교황에게 겸손한 편지를 써서 교황의 무죄와 자기의 무죄를 함께 밝혀 달라고 청했습니다 편지 16. 9월 말부터 에크가 독일의 여러 교구에 칙서를 게시했고, 루터는 10월에 그것을 받아 보았습니다.
편지 끝에는 1520년 9월 6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습니다 편지 22. 그러나 많은 학자는 루터가 10월 중순 밀티츠를 다시 만나 편지를 쓰기로 약속한 뒤에 이 편지를 썼고, 칙서에 떠밀려 쓴 글로 보이지 않도록 날짜를 앞당겨 적었다고 봅니다.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12월 10일 비텐베르크 성문 밖에서 칙서와 교회법 책들을 불태웠고, 1521년 1월 3일 파문되었으며, 그해 4월 보름스 제국 의회에 섰습니다.
편지 한 통과 작은 책 한 권
이 도서관에는 이 책이 편지와 함께 빠짐없이 실려 있습니다.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낸 편지는 스무 단락 남짓의 짧은 글이고, 본문은 단락마다 번호가 붙은 백 단락 남짓의 글입니다. 루터는 이 책을 독일어와 라틴어로 함께 냈는데, 어느 쪽을 먼저 썼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립니다. 교황에게 편지와 함께 바친 것은 조금 더 긴 라틴어판이고, 이 도서관의 영어 본문도 라틴어판을 옮긴 것입니다.
편지에서 루터는 레오를 한 사람으로서는 높이지만, 그를 둘러싼 교황청은 바벨론과 소돔보다 더 썩었다고 거세게 꾸짖습니다 편지 5. 자기는 누구와도 행실을 두고 다투지 않으며 오직 진리의 말씀을 두고 다툰다고 하고 편지 4, 다른 모든 것은 하겠지만 주장을 취소하는 일과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데 사람의 법을 씌우는 일만은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편지 17. 교황을 반은 신처럼 떠받드는 아첨꾼들을 경계하라고 하면서 편지 18, 사도들은 스스로를 떠나 계신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아니라 곁에 계신 그리스도의 종이라 불렀다고 일깨웁니다 편지 19. 그리고 이 작은 책을 내밉니다. 겉보기에는 작지만 뜻을 헤아리면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짧게 엮은 요약이라는 것입니다 편지 21.
본문은 두 명제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 위에 있는 가장 자유로운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대해 가장 충실한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매인다는 것입니다 3. 루터는 사람에게 영적인 본성과 육체적인 본성이 함께 있다고 보고, 앞의 것을 따라 속사람, 뒤의 것을 따라 겉사람이라고 부릅니다 5. 그래서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6에서 시작하는 앞부분은 속사람이 어떻게 의롭고 자유롭게 되는지를 다루어 첫째 명제를 풀고, 50에서 시작하는 뒷부분은 겉사람이 몸을 다스리고 이웃을 섬기는 일을 다루어 둘째 명제를 풉니다. 93부터 끝까지는 이 자유를 잘못 쓰는 이들을 위한 덧붙임입니다.
두 명제는 서로 어긋나 보이지만, 루터는 둘 다 바울에게서 왔다고 말합니다 4.
내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 9:19
바울은 또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누구에게든지 어떤 것도 빚지지 말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성취하였느니라."고 합니다 (롬 13:8). 사랑은 본디 사랑하는 이를 기꺼이 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물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여자에게서 나시고 율법 아래 나셔서, 자유로운 분이면서 동시에 종이셨다고 루터는 말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것 위에
루터는 먼저 바깥의 어떤 것도 영혼을 의롭게도 자유롭게도 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몸이 건강하든 병들든, 거룩한 옷을 입고 거룩한 곳에서 기도하고 금식하든, 그런 일은 위선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8. 영혼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곧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9, 루터는 그 증거로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롭게 되리라."는 말씀을 듭니다 (요 8:36). 그 말씀은 어떤 행위로도 받을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 받으므로, 영혼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그는 결론짓습니다 12. 성경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하는 그대로입니다 (롬 1:17).
그러면 성경에 그토록 많은 계명과 의식은 왜 있습니까? 루터는 성경 전체가 율법과 약속 두 부분으로 나뉜다고 답합니다 17. 율법은 무엇이 선한지 가르치지만 그것을 행할 힘은 주지 않아서, 탐내지 말라는 계명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모두 죄인으로 드러나고 자기 힘에 절망하여 다른 데서 도움을 찾게 됩니다 18. 그때 약속이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하며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니, 명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이루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20. 이 구별은 루터 신학의 기둥인 율법과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이어서 루터는 믿음이 하는 일을 셋으로 풉니다. 첫째, 약속의 말씀에 굳게 매달린 영혼은 말씀의 모든 능력에 젖어 들어, 불 속의 쇠가 불과 하나 되어 불처럼 달아오르듯 말씀을 닮아 갑니다 22. 그러니 그리스도인에게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 데 행위도 율법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루터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이며, 함부로 살라는 뜻이 아니라고 덧붙입니다.
둘째, 믿음은 믿는 분을 참되고 의로우신 분으로 높여 드립니다. 하나님을 참되시다고 여겨 드리는 것보다 높은 예배는 없고, 그분의 약속을 믿지 않는 것보다 큰 모욕은 없습니다 24. 그래서 루터는 한 분 하나님을 섬기라는 첫째 계명이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32.
셋째이자 가장 이름난 것은, 믿음이 영혼을 신부가 신랑과 하나 되듯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27. 혼인한 두 사람이 가진 것을 모두 함께 나누듯, 은혜와 생명과 구원이 가득하신 그리스도는 신부의 죄와 죽음과 지옥을 자기 것으로 삼으시고, 영혼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생명과 구원을 자기 것으로 받습니다 28. 죄도 죽음도 지옥도 그분을 삼킬 수 없으니, 믿음의 혼인 반지로 그것들을 떠맡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오히려 그것들이 삼켜집니다 29. 이것을 흔히 ‘복된 교환’(‘즐거운 교환’이라고도 옮깁니다)이라고 부릅니다. 가난하고 악한 창녀를 아내로 맞아 모든 악에서 건지시는 부요한 신랑의 그림에서 31,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법정의 말보다 사랑의 말로 그려집니다.
루터는 이 혼인을 호세아의 말씀으로 노래합니다 30.
또 내가 영원토록 너를 나와 정혼하게 하리니 참으로 내가 의와 판단의 공의와 인자함과 긍휼로 너를 나와 정혼하게 하며 신실함으로 너를 나와 정혼하게 하리니 네가 주를 알리라.
호 2:19-20
신랑의 것이 모두 신부의 것이 된다면, 그리스도의 왕권과 제사장직도 믿는 이의 것이 됩니다. 구약에서 맏아들이 누린 왕과 제사장의 두 영예는 참된 맏아들이신 그리스도를 가리켰고, 그리스도는 혼인의 법을 따라 이 영예를 믿는 모든 이와 나누신다고 루터는 말합니다 37.
그러나 너희는 선정된 세대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이니 이것은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께 대한 찬양을 너희가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그리스도인이 왕이라는 것은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일수록 더 많은 고난과 죽음을 겪지만, 믿음 안에서는 십자가와 죽음까지도 그의 구원을 위해 일하게 된다는 영적인 다스림입니다 40. 제사장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일을 서로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41. 루터는 이 제사장직을 근거로 성직자와 평신도를 신분으로 나누는 관습을 비판하면서도, 모두가 공적으로 말씀을 맡아 가르칠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하며 목회자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로 둡니다 44.
이 자유와 존귀를 바로 가르치는 것이 설교의 일입니다. 설교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옛이야기로 들려주는 데 그치지 말고, 그분이 너와 나를 위한 그리스도가 되시도록 믿음을 일으켜야 한다고 루터는 말합니다 47. 그리스도의 세 직분은 교리 과정의 선지자, 제사장, 왕 과에서 더 볼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모든 사람의 종
뒷부분은 믿음이 모든 것을 한다면 왜 선행을 명하는가, 믿음에 만족하고 편히 쉬어도 되는가 하는 반문으로 시작합니다. 루터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답합니다 50. 우리가 온전히 속사람이 되는 것은 마지막 날의 일이고, 이 땅에서는 성령의 첫 열매를 받아 이제 막 자라기 시작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금식과 깨어 있음과 노동으로 몸을 다스려 몸이 믿음을 따르게 합니다. 그것은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영혼이 자기 몸까지 정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53.
루터는 이것을 낙원의 아담에 견줍니다. 의롭게 지음 받은 아담이 동산을 가꾼 것은 의로워지려고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온전히 자유로운 일이었듯, 믿음으로 다시 낙원에 놓인 신자의 행위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55. 그래서 선한 행위가 선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선한 행위를 합니다 58. 예수께서도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또 변질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마 7:18). 열매가 나무를 맺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열매를 맺듯, 사람을 선하게 하는 것은 믿음이고, 그 믿음이 그의 행위도 선하게 합니다 60.
그러나 몸을 다스리는 일은 시작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 살며, 몸을 다스리는 것도 이웃을 더 진실하고 자유롭게 섬기기 위해서라고 루터는 말합니다 70. 그 본보기로 그는 빌립보서의 말씀을 듭니다 75.
너희 안에 이 생각을 품을지니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생각이라.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들의 모습이 되셨으며
빌 2:5-7
모든 것을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섬기시려고 종처럼 사셨듯, 믿음으로 모든 것을 넉넉히 받은 그리스도인도 이 자유를 비우고 종의 형체를 입어,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하신 것처럼 이웃에게 한 사람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77. 이 섬김은 감사를 받든 배은망덕을 당하든 셈하지 않고, 해를 의인과 악인에게 비추시는 아버지처럼 거저 베풉니다 78. 루터는 마침내 이렇게 맺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안에 살지 않고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사랑으로 이웃 안에 살며, 믿음으로는 자기 위로 하나님께 오르고 사랑으로는 자기 아래로 이웃에게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91. 그 그림 뒤에는 "또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로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라."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 1:51).
끝의 덧붙임은 이 자유를 두 방향에서 잘못 쓰는 이들을 다룹니다. 금식일에 고기를 먹고 기도를 빼먹는 것으로 자유를 뽐내는 이들이 있고, 정해진 날 금식하고 의식을 지키는 것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93. 루터는 믿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행위에서가 아니라,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는 헛된 믿음에서라고 말합니다 95. 그래서 행위로 의롭게 된다고 고집하는 이들 앞에서는 자유를 굳게 지키되, 아직 믿음이 약한 이들은 그들이 배울 때까지 참고 배려하라고 권합니다. 이리와는 힘써 싸우되 양을 위해 싸우고, 양과 싸우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98.
루터는 선행을 버리지 않으며 오히려 가장 힘써 가르친다고 말하지만 66, 칭의와 선행에 관한 이 책의 가르침은 교회마다 다르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1547)에서 칭의(가톨릭 교회는 ‘의화’라고 부릅니다)가 죄의 용서일 뿐 아니라 은혜를 받아 속사람이 거룩해지고 새로워지는 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의화에 앞서는 믿음도 행위도 그 은혜를 얻어 내지 못하며, 믿음은 구원의 시작이요 모든 의화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또 의롭게 된 이가 은혜 안에서 행하는 선행은 참으로 은혜의 자람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공로가 되는데, 이는 하나님이 당신의 선물을 그들의 공로가 되게 하시기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 트리엔트 공의회, 의화에 관한 교령. 공의회가 다른 아무것도 협력할 필요 없이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주장을 물리친 것도 이 때문입니다.
1999년 10월 31일 루터교세계연맹과 가톨릭 교회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의화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에 서명했습니다. 두 교회는 우리가 공로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는 기본 진리에 함께 동의하고, 선행이 칭의를 뒤따르는 열매라고 함께 고백했으며, 이 선언이 밝힌 서로의 가르침에는 16세기의 정죄가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의화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 그러나 차이는 아직 남아 있고, 이 선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교회와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개신교회 안에서도 강조점이 다릅니다. 루터교회는 믿음이 반드시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하지만 그 행위를 의지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고백하며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6조, 율법과 복음의 구별을 중심에 둡니다. 개혁교회는 칼뱅을 따라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을 때 화목과 거룩하게 하심이라는 두 겹의 은혜를 함께 받는다고 말하고 3.11.1, 오직 믿음이 의롭게 하지만 의롭게 하는 믿음은 결코 홀로 있지 않다고 가르치며 칼뱅, 트리엔트 공의회에 대한 해독제, 율법이 거듭난 이의 삶을 이끄는 규범이라는 것도 힘주어 말합니다. 웨슬리 전통은 믿음이 칭의의 유일한 조건이라는 데 함께 서면서도 III.1, 의롭다 하심을 받는 바로 그 순간 성화가 시작되어 관계만이 아니라 사람이 실제로 변한다고 강조하고 I.4,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마음을 채우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이생에서 구할 은혜로 가르칩니다.
정교회는 16세기 서방의 이 논쟁 밖에 있었고, 구원을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연합, 곧 신화(테오시스)로 이해합니다. 사람이 본질상 하나님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은혜로 "그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나니 이것은 너희가 이 약속들을 힘입어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가 된다는 뜻이며 (벧후 1:4), 아타나시우스가 ‘그분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가 신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라고 쓴 그대로입니다 54.3. 정교회는 이 길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자유가 함께 일한다고 말합니다. 루터가 쓴 불 속의 쇠라는 그림도 여러 동방 교부가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하나 되는 일을 설명할 때 쓴 그림입니다. 이 가르침들은 교리 과정의 믿음과 칭의 과와 성화와 견인 과, 그리고 가톨릭과 개신교는 무엇이 다른가?에서 나란히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잘 읽으려면
이 책은 짧아서 한두 번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습니다. 편지를 먼저 읽고 본문으로 넘어가면, 이 차분한 글이 어떤 소란 한가운데서 쓰였는지 보입니다. 두 명제는 늘 함께 붙들어야 합니다. 첫째 명제만 들으면 방종이 되고, 둘째 명제만 들으면 또 하나의 율법이 됩니다. 루터는 본문 첫머리에서, 시련에 눌려 믿음의 맛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믿음에 관해 바로 쓰지도 바로 알아듣지도 못한다고 말합니다 1.
아픈 대목도 있습니다. 편지는 레오에게는 정중하지만 교황청을 도둑의 소굴이요 죄와 죽음과 지옥의 나라라고 부르고 편지 5, 본문도 교황들의 전통에서 적그리스도의 일을 본다고 말합니다 99. 그 시대 교황청의 부패는 실제로 깊었고 가톨릭 교회도 뒤에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스스로 개혁에 나섰지만, 오늘의 가톨릭 독자에게 이 말들은 깊은 상처가 되고, 많은 개신교 독자도 사랑이 허락하는 것보다 거칠다고 느낍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 분열에 양쪽 모두의 책임이 있었다고 인정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루터의 거친 말에 머물지 말고 그가 가리킨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이 책을 바로 읽는 길입니다.
또 이 책을 행위를 낮추는 책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금식과 깨어 있음을 권하는 대목은 수도원의 말처럼 들리지만, 루터는 그 목적을 바꿉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몸을 다스리고 이웃을 섬기려는 것입니다. 그는 의식을 건물이 완성되면 치우는 건축자의 준비물에 견주며, 그 준비물을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참된 건물을 이룬다고 믿는 신뢰를 업신여긴다고 말합니다 101. 일상의 일로 이웃을 섬기는 소명의 가르침도 이 생각과 이어져 있습니다 (소명: 삶의 모든 영역).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하는 자유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이미 받았기에 거저 섬길 수 있는 자유입니다. 이 물음은 참된 자유란 무엇인가?에서 더 다룹니다. 바울은 이 책의 두 명제를 한 절에 담았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부르심을 받아 자유에 이르렀으나 오직 자유를 육신을 위한 기회로 쓰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라.
갈 5:13
출처
- 마르틴 루터, 95개 논제 1517 읽기
- 마르틴 루터, 그리스도인의 자유 1520 읽기
- 마르틴 루터, 독일 귀족에게 보내는 글 1520
- 트리엔트 공의회, 의화에 관한 교령 1547
- 루터교 세계연맹·가톨릭교회, 의화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 1999
- 루터교,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1530
- 장 칼뱅, 기독교 강요 1559 읽기
- 장 칼뱅, 트리엔트 공의회에 대한 해독제 1547
- 존 웨슬리, 성경적 구원의 길 설교 43 / Sermon 43 (1765) 읽기
- 아타나시우스,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4세기 / 4th century 읽기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3 (19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