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참된 자유란 무엇인가?

짧은 답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죄의 종살이에서 풀려나 사랑으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유는 사람이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값을 치르고 주시는 것이며, 방종과는 반대편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 자유를 빼앗는다는 반론은 진지하게 다룰 만하지만, 성경은 누구도 주인 없이 살지 않는다고 답합니다.

성경의 답

성경에서 자유는 먼저 구출의 이야기로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고, 하나님은 그 고통을 보고 들으셨습니다 (출 3:7-8). 모세를 보내시며 하신 말씀은 단순히 "보내라"가 아니었습니다. 이유가 붙어 있었습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파라오에게 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 백성을 가게 하여 그들이 나를 섬기게 하라.

출 8:1

풀려나는 것은 목적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로를 섬기는 데서 나와 하나님을 섬기도록 불렸습니다. 십계명도 같은 순서로 시작합니다. 먼저 구원이 있고, 그다음에 계명이 옵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곧 속박의 집에서 데리고 나온 주 네 하나님이니라.

출 20:2

계명은 자유를 빼앗으려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유를 얻은 백성이 살아가는 길로 주어졌습니다. 레위기의 희년 규정은 "너희는 그 오십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온 땅에서 두루 온 땅의 모든 거주민에게 자유를 선포하라. 그것은 너희에게 희년이 되리니 너희는 각각 자기 소유로 돌아가고 각각 자기 가족에게 돌아갈지니라."고 명합니다 (레 25:10). 이사야는 오실 분이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전파하리라고 말했고, 예수께서는 나사렛 회당에서 이 말씀을 읽으시며 자신에게 이루어졌다고 하셨습니다 (사 61:1, 눅 4:18).

신약에서 가장 분명한 가르침은 요한복음 8장에 있습니다. 예수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는 말씀에 거하라고 하시며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또 너희가 진리를 알리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시니라." (요 8:32). 그러자 사람들은 이렇게 항의합니다.

그들이 그분께 응답하되, 우리는 아브라함의 씨로서 결코 누구에게도 속박된 적이 없거늘 어찌 네가 이르기를, 너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하매

요 8:33

그들은 정치적 자유를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더 깊은 종살이를 짚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이니라.

요 8:34

그리고 누가 풀어 줄 수 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롭게 되리라.

요 8:36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에서 풀어 줍니다. 사람은 누구나 누군가에게 자기를 드립니다. "너희 자신을 누구에게 종으로 내주어 순종하게 하면 너희가 순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롬 6:16). 주인이 없는 삶은 선택지에 없습니다. 선택은 누구를 주인으로 삼느냐입니다. 죄가 주인일 때 그 열매는 부끄러움이고 끝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되면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너희의 열매를 얻었으니 그 끝은 영존하는 생명이니라."를 얻고 그 끝은 영생입니다 (롬 6:22).

그러므로 자유는 두 방향을 가집니다. 무엇에게서의 자유이면서 무엇을 위한 자유입니다. 갈라디아서는 둘을 함께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유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으니 그러므로 그 자유 안에 굳게 서고 다시 속박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 5:1

형제들아, 너희가 부르심을 받아 자유에 이르렀으나 오직 자유를 육신을 위한 기회로 쓰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라.

갈 5:13

자유는 방종의 허락이 아닙니다. 베드로도 "너희가 자유로우나 너희의 자유를 악을 덮는 도구로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들로서 행하라."고 씁니다 (벧전 2:16). 이 자유의 힘은 성령입니다. "이제 주께서는 그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거기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고후 3:17). 그리고 이 자유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피조물도 장차 "이는 창조물 자신도 썩음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라."에 이르기를 기다립니다 (롬 8:21).

교회의 증언

교회는 자유를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음"이 아니라 "참으로 선한 것을 사랑하고 행할 수 있음"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8장을 풀이하면서 이렇게 권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자유를 죄를 자유롭게 짓는 데 남용하지 말고, 아예 죄를 짓지 않는 데 사용하십시오.

아우구스티누스

그는 또 이 자유가 지금은 시작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자유의 첫 단계는 죄를 멀리하는 것이지만, 육신이 여전히 성령을 거슬러 소욕을 일으키므로 완전한 자유는 맨 나중 원수인 사망이 멸하여질 때에야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그레고리우스는 종살이의 역설을 짚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비뚤어진 욕망을 더 자유롭게 따를수록 그것에 더욱 단단히 매이게 됩니다" 그레고리우스. 크리소스토무스는 예수께서 사람들의 허영을 채워 주려는 것이 아니라 유익을 위하여, 그들이 사람의 종이 아니라 죄의 종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건지실 수 있는 종살이에 있다고 풀어 말씀하셨다고 봅니다 크리소스토무스.

매튜 헨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날카롭게 들리는 관찰을 남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자유에 대해서든 논쟁하면서 정작 어떤 죄악된 정욕의 종이 되어 있는 것을 자주 봅니다" 매튜 헨리.

한 가지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죄에 매인 사람의 의지가 얼마나 자유로운가,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선택이 어떻게 함께 있는가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오랜 논쟁이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잇는 종교개혁 전통(루터파와 개혁파)은 죄인의 의지가 스스로는 하나님께 향할 수 없게 묶여 있고 은혜가 그것을 풀어 준다고 가르칩니다. 아르미니우스와 웨슬리를 따르는 전통은 앞서 오는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 사람이 그 은혜에 응답하거나 거절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가톨릭 교회는 타락으로 자유의지가 약해졌으나 없어지지는 않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움직일 때 의지가 그 은혜에 자유롭게 협력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논쟁은 예정이란 무엇인가?와 하나님은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가?에서 다룹니다. 그러나 어느 전통이든 죄인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하나님께 돌아서는 첫걸음부터 은혜가 앞서며, 아들이 자유롭게 하신다는 데에는 뜻을 같이합니다.

원어로 보기

신약의 "자유"는 엘류테리아(ἐλευθερία)입니다. 그리스 세계에서 이 말은 먼저 종이 아닌 자유인의 신분을 가리켰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유대인들이 "우리는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했을 때도 이 신분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과 짝을 이루는 말이 종, 곧 둘로스(δοῦλος)입니다. 둘로스는 소유된 사람을 뜻합니다.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둘로스)"이라 부르면서 동시에 자유를 가장 크게 외친 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그에게 종 됨과 자유는 누구에게 속하느냐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자유"로 옮겨진 드로르(דְּרוֹר)는 희년에 쓰이는 말입니다. 희년에 종은 풀려나고 땅은 원래 주인에게 돌아갑니다. 자유는 단지 속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로 돌아가는 일이었습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히브리어 아바드(עָבַד)입니다. 이 말은 바로를 위해 종노릇하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모두 쓰입니다. 같은 동사가 쓰이므로 질문은 섬기느냐 섬기지 않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섬기느냐가 됩니다.

흔한 반론과 답

"종교는 자유를 빼앗는다.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자유인데,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뜻에 매이라는 것이다." 이 반론은 가볍지 않습니다. 근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자유는 곧 자율, 곧 자기 삶의 법을 스스로 정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종교가 실제로 사람을 통제하는 데 쓰인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양심을 억누르고 강요한 때도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맞서 싸운 일이며, 복음에 대한 배신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는 사람은 없고, 문제는 무엇이 우리를 이끌고 있느냐입니다. 돈, 인정, 쾌락, 두려움은 모두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연주자가 자유롭게 연주하는 것은 오랜 연습과 규율을 거친 뒤입니다. 물론 이 비유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훈련 조교가 아니라 우리를 지으시고 사랑하시는 분이며, 그분께 순종한다는 것이 정말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지는 결국 그분이 어떤 분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종살이하던 백성을 먼저 건지신 분이라고 답합니다.

"무엇이 종살이인지 남이 정해 주는 것은 오만하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있다면 나는 자유롭다." 이것도 강한 반론입니다. 한 사람의 욕망을 다른 사람이 '노예 상태'라고 부르는 것은 쉽게 오만이 됩니다. 다만 성경은 이것을 남을 향한 판정으로 말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 대해, 바울 자신에 대해서도 말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는 내가 원하는 선은 내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내가 원치 아니하는 악을 곧 그것을 내가 행하기 때문이라."라고 고백합니다 (롬 7:19). 우리는 중독이나 오래된 분노, 습관 앞에서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실제로는 그것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경험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원하는 것 자체가 어디서 왔는지는 물어볼 만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여전히 죄를 짓는다. 그렇다면 자유는 어디 있는가?" 이스라엘도 바로에게서 풀려난 뒤 광야에서 "우리가 이집트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더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이집트 사람들을 섬기리라, 하였노라. 우리가 이집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았으리라, 하니라."고 불평했습니다 (출 14:12). 해방된 뒤에도 옛 주인에 대한 습관은 오래 남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숨기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하고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런즉 이와 같이 내 자신이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되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말합니다 (롬 7:24-25).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교회의 이해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첫 단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더 생각해 보기

참된 자유는 아무도 나를 간섭하지 않는 곳에서가 아니라, 나를 값 주고 사신 분의 사랑 안에서 시작됩니다. 그 자유는 규칙을 없애 주기보다 규칙이 필요한 이유였던 두려움과 자기 증명의 압박을 덜어 줍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홀로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5장의 말씀처럼 서로를 사랑으로 섬기는 자유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에게 가장 많이 순종하고 있습니까? 내가 "자유"라고 부르는 것 가운데 사실은 끌려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이라고 하실 때, 나는 그 말씀을 어떤 부분에서 믿기 어렵습니까?

더 읽으려면 죄란 무엇인가?와 은혜란 무엇인가?를 보십시오. 요한복음 8장 31-36절과 갈라디아서 5장을 함께 읽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