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1과

종교개혁 이야기

16세기 종교개혁은 교회를 성경으로 돌아가게 하여 새롭게 하려는 운동이었습니다. 루터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다시 발견했고, 츠빙글리와 칼뱅과 불링거와 녹스를 거쳐 개혁교회가 여러 나라에 세워졌습니다.

개혁을 기다리던 교회

중세 말의 교회에는 깊은 경건과 함께 오래된 병도 있었습니다. 교회의 직분이 돈으로 거래되기도 했고, 성경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성직자가 적지 않았으며, 많은 신자는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드리는 예배에 참여했습니다. 개혁을 외친 목소리는 그전에도 있었습니다. 14세기 잉글랜드의 존 위클리프와 15세기 보헤미아의 얀 후스는 성경의 권위를 앞세워 교회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의 인문주의자들은 ‘원천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성경과 교부들을 원래 언어로 읽자는 것입니다. 1516년 에라스무스가 펴낸 헬라어 신약 성경은 그 열매였고 에라스무스, 헬라어 신약성경, 인쇄술 덕분에 빠르게 퍼졌습니다. 학자들은 오래 써 온 라틴어 성경을 헬라어 본문과 견주어 읽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께서 "회개하라"고 하신 말씀도 (마 4:17) 다시 읽혔습니다. 라틴어 번역은 흔히 ‘고해를 행하라’로 읽혔지만, 헬라어 는 마음과 삶의 방향을 돌이킨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루터와 하나님의 의

1517년 10월, 비텐베르크의 수도사이자 성경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는 면벌부(흔히 면죄부라고 부릅니다)의 효력을 토론하자며 95개 논제를 내놓았습니다 루터, 95개 논제. 첫 논제는 주님이 회개하라고 하셨을 때 신자의 삶 전체가 회개이기를 바라셨다고 말합니다. 루터는 교회 안에서 토론을 열려 했지만, 논제는 인쇄되어 빠르게 독일 곳곳으로 퍼졌습니다.

더 깊은 변화는 성경을 가르치는 강의실에서 왔습니다. 루터는 훗날 로마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 앞에서 오래 괴로워했다고 회고합니다. 그는 그것을 죄인을 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다 이 말씀에서 길을 보았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그 복음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그리스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6-17

바울이 인용한 말씀은 하박국의 "보라, 위로 높여진 자의 혼은 그의 속에서 곧바르지 아니하나 오직 의인은 자기 믿음으로 살리라."입니다 (합 2:4).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갖추어 바쳐야 할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믿음으로 받게 하시는 선물입니다. 루터는 이것을 깨달았을 때 다시 태어나 열린 문으로 낙원에 들어간 것 같았다고 회고했습니다 루터, 라틴어 저작 전집 서문. 그 일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학자마다 의견이 다릅니다. 매튜 헨리도 이 구절을 풀며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에서나 진행에서나 모든 것입니다"라고 씁니다 매튜 헨리. 칭의의 교리는 교리 과정의 ‘믿음과 칭의’ 과에서 자세히 다룹니다.

1521년 보름스 제국 의회에서 황제 카를 5세 앞에 선 루터는, 성경의 증언과 분명한 이성으로 설득되지 않는 한 자기 글을 취소할 수 없으며 자기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다고 답했습니다. 흔히 전해지는 ‘내가 여기 섰습니다’라는 말은 초기 인쇄본에 실려 있지만, 그가 정확히 그렇게 말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츠빙글리, 칼뱅, 그리고 개혁교회

스위스에서는 또 하나의 흐름이 자랐습니다. 취리히 대성당의 설교자 울리히 츠빙글리는 1519년부터 마태복음을 처음부터 차례로 강해했습니다. 성경 한 권을 이어서 풀어 가는 이 설교는 개혁교회 강단의 한 전통이 되었습니다. 1523년 그는 공개 토론을 위해 67개 조항을 내놓고,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시요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고백했습니다 츠빙글리, 67개 조항.

1529년 마르부르크에서 루터와 츠빙글리가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열네 조항과 열다섯째 조항의 대부분에 합의했지만,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계시는가에서 갈라졌습니다 마르부르크 조항. 이때부터 종교개혁은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라는 두 가족으로 자랐습니다. 1531년 츠빙글리가 전쟁터에서 죽은 뒤에는 하인리히 불링거가 40년 넘게 취리히 교회를 이끌었고, 그가 쓴 제2 스위스 신앙고백(1566)은 여러 나라 개혁교회가 받아들였습니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

프랑스 사람 장 칼뱅은 1536년 『기독교 강요』 초판을 냈고, 그해 제네바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한때 그곳에서 쫓겨났다가 1541년 돌아와 평생 제네바 교회를 섬겼고, 『기독교 강요』를 거듭 고쳐 1559년 최종판을 냈습니다 칼뱅, 기독교 강요. 제네바는 박해를 피해 온 여러 나라 신자가 배우고 돌아가는 곳이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도 그중 한 사람이었고, 1560년 그와 동료들이 쓴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은 스코틀랜드 교회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개혁교회는 이렇게 프랑스, 네덜란드, 헝가리, 스코틀랜드로 퍼졌습니다. 프랑스의 개혁파 신자들은 위그노라고 불렸고, 잉글랜드에서는 교회를 더 철저히 개혁하려던 청교도들이 그 신앙을 이었습니다.

하나의 교회를 새롭게

종교개혁자들은 새 교회를 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성경으로 새롭게 하려 했습니다. 1539년 추기경 사돌레토가 제네바 사람들에게 옛 교회로 돌아오라고 권하자, 칼뱅은 답신에서 개혁은 새것을 만든 것이 아니라 고대 교회의 신앙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변호했습니다 칼뱅, 사돌레토에게 보낸 답신. 그래서 개혁교회는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을 그대로 고백하고 교부들을 즐겨 읽습니다. 교회의 터는 어느 개혁자도 아닌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무도 이미 놓은 기초 외에 능히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나니 이 기초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고전 3:11

가톨릭 교회도 스스로 개혁에 나섰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성직자의 교육과 규율을 바로잡고 신학교를 세우게 했으며, 칭의와 성례에 관한 가톨릭의 가르침을 정리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 의화에 관한 교령. 가톨릭 교회는 종교개혁을 교회의 하나 됨이 깨어진 분열로 봅니다. 그러면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 분열에 양쪽 모두의 책임이 있었다고 인정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오늘날 가톨릭 교회는 여러 개신교회와 대화를 이어 가고 있습니다. 두 전통이 무엇에서 같고 다른지는 가톨릭과 개신교는 무엇이 다른가?에서 다룹니다.

분열은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개혁자들 사이에도 다툼이 있었고 정치와 권력이 얽히기도 했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진 ‘개혁된 교회는 늘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은, 개혁교회가 먼저 자기 자신을 말씀 앞에 세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왜 이렇게 나뉘었는지는 교회는 왜 이렇게 많이 나뉘었는가?에서 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개혁자들이 남긴 신앙고백들은 다음 과에서 살펴봅니다.

연습

  1. 연습 1 / 8

    1516년 에라스무스가 펴내어 종교개혁의 성경 연구에 큰 도움을 준 책은 무엇입니까?

  2. 연습 2 / 8

    1517년 루터의 95개 논제는 무엇을 토론하자고 제안했습니까?

  3. 연습 3 / 8

    루터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새롭게 깨닫게 된 말씀으로, 바울이 하박국에서 인용한 것은 무엇입니까?

  4. 연습 4 / 8

    1521년 보름스 의회에서 루터가 자기 글을 취소할 수 없다고 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5. 연습 5 / 8

    1529년 마르부르크에서 루터와 츠빙글리가 끝내 합의하지 못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6. 연습 6 / 8

    1519년부터 취리히에서 마태복음을 처음부터 차례로 강해하며 개혁을 이끈 사람은 누구입니까?

  7. 연습 7 / 8

    칼뱅은 사돌레토에게 보낸 답신(1539)에서 종교개혁을 어떻게 변호했습니까?

  8. 연습 8 / 8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출처

  1. 에라스무스, 헬라어 신약성경 1516 — 처음으로 출판된 헬라어 신약성경. 새 라틴어 번역과 함께 실렸고, 루터와 개혁자들이 원문으로 돌아가는 길을 열었다.
  2. 마르틴 루터, 95개 논제 1517 — 면벌부의 효력에 대한 토론을 제안한 논제. 종교개혁의 시작으로 기억된다. 읽기
  3. 마르틴 루터, 라틴어 저작 전집 서문 1545 — 로마서 1:17의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주시는 의로 깨달은 일을 돌아본다.
  4. 울리히 츠빙글리, 67개 조항 1523 — 취리히 첫 공개 토론을 위한 조항.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자 중보자이심을 고백한다.
  5. 루터와 츠빙글리, 마르부르크 조항 1529 — 루터파와 개혁파가 열네 조항과 열다섯째 조항의 대부분에 합의했으나,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임재에 대해서는 갈라졌다.
  6. 하인리히 불링거, 제2 스위스 신앙고백 1566 — 스위스와 여러 나라 개혁교회가 받아들인 신앙고백. 1장: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7. 장 칼뱅, 기독교 강요 1559 — 개혁파 신학의 대표 저작. 읽기
  8. 존 녹스 외,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1560 —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이전 스코틀랜드 교회의 기준이었다.
  9. 장 칼뱅, 사돌레토에게 보낸 답신 1539 — 종교개혁은 새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옛 교회의 신앙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변호한다.
  10. 트리엔트 공의회, 의화에 관한 교령 1547 — 칭의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공식 가르침.
  1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3 (1964) — 교회의 분열에 양편 모두의 책임이 있었다고 인정하고, 갈라진 형제들을 존중하며 일치를 구한다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성경과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벨직 신앙고백, 도르트 신경)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개혁주의 신앙을 가르치되, 다른 전통의 견해도 공정하게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