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22과

웨슬리와 감리교 운동

18세기 잉글랜드에서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 형제는 믿음으로 받는 구원과 성령이 주시는 확신, 사랑으로 온전해지는 거룩한 삶을 들판에서 전하고 작은 모임으로 길렀습니다. 이 운동은 감리교회가 되어 세계로 퍼졌고, 1885년 한국에도 들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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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에서 올더스게이트까지

18세기 초 잉글랜드에는 국교회가 온 나라에 교구를 두고 있었고, 경건한 신자들의 모임도 곳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빠르게 커 가던 광산촌과 공업 도시에는 교회의 손이 닿지 않는 노동자가 많았고, 교양 있는 이들 사이에서는 계시보다 이성을 앞세우는 생각이 퍼지고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 마음으로 아는 하나님과 거룩한 삶을 다시 외친 이가 존 웨슬리(1703–1791)와 동생 찰스 웨슬리(1707–1788)입니다.

형제는 엡워스의 국교회 목사 새뮤얼 웨슬리와 수재나 웨슬리의 아들이었습니다. 1729년 무렵 옥스퍼드에서 찰스와 몇몇 학생이 작은 모임을 시작했고, 링컨 칼리지의 펠로였던 존이 곧 그 모임을 이끌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헬라어 신약을 읽고, 자주 성찬에 참여하고, 금식하며, 감옥의 죄수와 가난한 이들을 찾아갔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이들을 ‘신성 클럽’이라 부르고, 규칙대로 산다고 ‘메소디스트’라고 놀렸습니다. 이 놀림이 감리교인의 영어 이름이 되었습니다.

1735년 형제는 북아메리카의 조지아 식민지로 선교하러 떠났습니다. 대서양을 건너던 배가 큰 폭풍을 만났을 때, 함께 탄 모라비아 형제단 신자들은 아이들까지 두려움 없이 찬송을 불렀고, 웨슬리는 자기에게 없는 그 평안 앞에서 흔들렸습니다. 조지아의 사역은 실망으로 끝났습니다. 1738년 초 돌아오는 길에 그는 남을 회심시키러 갔던 자신이 정작 하나님께 돌아서지 못했다고 일지에 적었습니다. 런던에서 만난 모라비아 형제단의 페터 뵐러는 참된 믿음이 용서의 확신과 죄를 이기는 힘을 함께 주며, 한순간에 주어질 수도 있다고 그에게 가르쳤습니다.

그해 5월 21일 찰스가 먼저 그 평안을 얻었습니다. 사흘 뒤인 5월 24일 저녁, 존은 마지못해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한 신앙 모임에 갔습니다. 누군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마음에 이루시는 변화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는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다’고 적었습니다.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 신뢰한다는 것을 느꼈고, 그분이 자기 죄를, 바로 자기의 죄를 없애 주셨다는 확신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웨슬리, 일지 1738년 5월 24일. 루터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말씀에서 (롬 1:17) 붙든 복음이 두 세기 뒤 한 잉글랜드 사제의 마음에 닿은 것입니다.

이 밤이 그의 회심이었는지, 이미 있던 믿음에 확신이 더해진 날이었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립니다. 웨슬리 자신도 훗날 일지의 이 무렵 대목에 단서를 달아, 그때에도 ‘종의 믿음’은 있었다고 고쳐 말했습니다.

들판의 설교와 속회

1739년 봄, 옥스퍼드 시절의 벗 조지 휫필드가 브리스틀 근처에서 광부들에게 야외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웨슬리는 교회 건물 밖에서 설교하기를 몹시 꺼렸지만, 휫필드의 부름에 응해 그해 4월 2일 브리스틀 근처의 들판에서 처음 설교했습니다. 그날 본문은 "주의 영께서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그분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기 때문이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마음이 상한 자들을 고치며 포로 된 자들에게 구출을, 눈먼 자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상처 입은 자들을 자유롭게 하며"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눅 4:18). 그 뒤 반세기 동안 그는 말을 타고 잉글랜드와 웨일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다니며 광부와 노동자와 가난한 이들에게 설교했고, 때로는 폭도에게 맞고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웨슬리는 회심한 이들을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신도회’로 모으고, 1742년부터는 열두 명 안팎의 ‘속회’로 나누어 속장이 매주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살피게 했습니다. 더 깊은 교제를 원하는 이들은 몇 사람씩 ‘반회’를 이루어 "너희 잘못들을 서로 고백하고 너희가 병 고침을 받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 의로운 자의 효력 있고 뜨거운 기도는 많은 유익이 있느니라."라는 말씀대로 (약 5:16)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1743년의 총칙은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고, 하나님이 정하신 은혜의 수단을 부지런히 쓰라는 세 규칙으로 이들의 삶을 묶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평신도 설교자들을 세웠고, 1744년부터 해마다 설교자들과 연회를 열었습니다.

웨슬리는 평생 국교회 사제로 남았고, 감리교인들에게 교구 교회의 예배와 성찬에 참여하라고 권했습니다. 감리교는 교회를 대신하려는 운동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교회를 깨우려는 운동으로 시작했습니다. 찰스는 이 부흥을 수천 편의 찬송으로 노래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찬송가에도 「만 입이 내게 있으면」, 「천사 찬송하기를」, 「하나님의 크신 사랑」 같은 그의 찬송이 실려 있고, 감리교인들은 그 찬송을 부르며 교리를 배웠습니다.

성경적 구원의 길

웨슬리는 큰 교의학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의 신학은 설교와 성경 주해와 찬송에 담겼고, 그 뼈대를 설교 「성경적 구원의 길」에 간추렸습니다 웨슬리, 성경적 구원의 길. 그 길은 ‘앞서 오는 은혜’, 곧 선행(先行) 은총에서 시작합니다. 죄인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구하기 전에 모든 사람에게 먼저 은혜를 베푸셔서 양심을 깨우고 복음에 응답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그 빛은 참 빛으로 세상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비추느니라."을 (요 1:9) 흔히 자연적 양심이라 불리는 것으로 풀면서, 이 빛은 "사람이 방해하지 않는다면 온전한 날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밝게 비칠 것입니다"라고 씁니다 웨슬리.

그 은혜에 응답해 믿는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같은 때에 성령으로 거듭납니다. 웨슬리는 칭의를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 곧 죄의 용서로, 거듭남을 성령으로 우리 안에 하시는 일, 곧 성화의 시작으로 구별했습니다 (교리 과정의 거듭남과 성령의 내주 과 참고). 그가 특히 힘주어 전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자기가 용서받았음을 알 수 있다는 확신이었고, 그 근거는 로마서 8장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롬 8:16

웨슬리는 이 절에서 성령께서 "참된 믿는 자 각 사람의 영과 함께, 그 자신의 영의 증거나 선한 양심의 증거와는 구별되는 증거로 증거하십니다"라고 주해합니다 웨슬리. 내 삶의 열매를 살펴 얻는 결론 말고도, 성령께서 마음에 직접 주시는 증언이 있다는 것입니다. 젊은 날 그는 이 확신이 없으면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 것처럼 말하기도 했으나, 뒤에는 확신을 모든 신자에게 약속된 특권으로 가르치면서도 확신이 약한 이를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많은 논쟁을 부른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이었습니다 웨슬리, 그리스도인의 완전. 웨슬리는 이 말로 실수나 연약함이나 유혹이 없는 상태를 뜻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두 계명이 (마 22:37-39) 은혜로 마음을 채워, 사랑이 마음을 다스리는 상태를 뜻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이생에서 믿음으로 구할 선물로 보았고, 받은 뒤에도 자라야 하며 잃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사랑에는 결코 두려움이 없고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나니 이는 두려움에 고통이 있기 때문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완전하게 되지 못하였느니라."라는 말씀에 (요일 4:18) 그는 이렇게 주해합니다. "자연인은 두려움도 사랑도 없고, 깨어난 사람은 사랑 없는 두려움이 있고, 그리스도 안의 어린아이는 사랑과 두려움이 있고, 그리스도 안의 아비는 두려움 없는 사랑이 있습니다" 웨슬리. 이 가르침을 오늘 여러 전통이 어떻게 보는지는 교리 과정의 성화와 견인 과에서 다룹니다.

이 주해들은 웨슬리가 1755년에 펴낸 『신약성서 주해』에서 왔습니다. 그는 독일 경건주의 학자 벵겔의 주해에 크게 기대어, 모국어밖에 모르는 평범한 신자를 위해 짧고 분명하게 썼습니다. 이 앱의 웨슬리 주해가 바로 이 책과 뒤이은 구약 주해입니다.

벗이면서 맞선 두 사람, 그리고 그 뒤

부흥의 두 큰 설교자 웨슬리와 휫필드는 예정을 두고 갈라섰습니다. 웨슬리는 브리스틀에서 무조건적 예정을 반박하는 설교 「값없는 은혜」를 전하고 펴냈고, 칼뱅주의자였던 휫필드는 1740년 말 공개 편지로 답했습니다. 1741년 무렵 두 사람의 길은 나뉘었고, 그 뒤 부흥 운동 안에는 웨슬리를 따르는 감리교와, 휫필드와 웨일스의 감리교인들이 속한 칼뱅주의 감리교가 나란히 섰습니다.

웨슬리 쪽은 하나님은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말씀을 (딤전 2:4) 붙들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고, 선행 은총으로 누구나 응답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하나님은 믿을 이들을 미리 아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거절될 수 있고, 신자도 떨어져 나갈 수 있습니다. 웨슬리는 사람이 응답하는 것조차 하나님이 먼저 주신 은혜 덕분이라고 강조했고, 무조건적 예정이 하나님의 사랑을 몇 사람에게 한정하고 거룩한 삶과 전도의 힘을 꺾을까 염려했습니다. 이 생각은 아르미니우스와 항론파에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과정의 정통주의와 청교도 과).

휫필드 쪽은 하나님이 "곧 우리가 사랑 안에서 자신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세상의 창건 이전에 그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으며"라는 말씀과 (엡 1:4) 미리 정하신 이들을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는 말씀을 (롬 8:30) 붙들었습니다. 선택은 미리 보신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는 뜻에 근거하며, 그 은혜는 택하신 이들을 반드시 믿음에 이르게 하고 끝까지 지킨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웨슬리의 생각이 구원의 마지막 결정을 사람의 뜻에 맡긴다고 염려했습니다 (개혁주의 신앙 과정의 도르트 신경의 다섯 교리 과). 두 사람 모두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 받는 구원과 거듭남을 전했고,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고 믿으라고 외쳤습니다. 둘은 우정을 되찾았고, 1770년 휫필드가 미국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의 뜻대로 웨슬리가 런던에서 추모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도 신실한 복음주의자들이 두 견해로 나뉘어 있습니다 (구원은 잃을 수 있는가?).

미국이 독립한 뒤 그곳 감리교인들이 성례를 받기 어려워지자, 웨슬리는 1784년 토머스 코크를 안수해 보냈고, 그해 성탄절 무렵 볼티모어에 모인 설교자들이 미국 감리교회를 조직했습니다. 프랜시스 애즈베리를 비롯한 순회 설교자들이 말을 타고 개척지를 누볐고, 감리교회는 19세기 미국에서 가장 큰 개신교회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영국의 감리교인들은 웨슬리가 죽은 뒤 차츰 국교회에서 따로 섰습니다. 1885년에는 미국 북감리회가 보낸 헨리 아펜젤러가 들어오면서 한국 감리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과정의 19세기 복음주의와 선교, 그리고 한국 과). 성결교회와 구세군과 나사렛교회도 웨슬리 전통에 뿌리를 둡니다.

남긴 선물과 물음

웨슬리 운동의 선물은 분명합니다. 믿음으로 받는 구원을 전하면서도 거룩한 삶을 놓지 않았고, 작은 모임에서 서로를 돌보는 훈련과 평신도의 사역을 남겼습니다. 웨슬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벌고, 아끼고, 주라고 설교했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무료 진료소와 학교와 대출 기금을 열었습니다. 노예 무역을 고발하는 글을 썼고, 죽기 며칠 전에는 노예 무역 폐지에 힘쓰던 윌리엄 윌버포스를 격려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개혁교회 쪽은 몇 가지를 물어 왔습니다. 웨슬리가 완전을 말하며 ‘죄’를 알면서 일부러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으로 좁혀 정의한 탓에, 모르고 짓는 죄와 마음 깊이 남은 부패를 가볍게 볼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우리가 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며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라는 말씀과 (요일 1:8) 로마서 7장의 탄식이 그 근거입니다. 또 확신을 마음의 경험에 기대게 하면 어떤 이는 자기 속만 들여다보다 낙심하고, 어떤 이는 들뜬 감정을 확신으로 여길 수 있다고 염려합니다. 웨슬리 쪽은 사랑으로 온전해진 이도 날마다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하며, 웨슬리 자신이 성령의 증언을 늘 회개와 순종의 열매로 시험하라고 가르쳤다고 답합니다.

웨슬리는 "우리가 그분을 사랑함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말씀에 (요일 4:19) "이것은 모든 종교의 요약이요 그리스도교의 참된 본보기입니다"라고 주해했습니다 웨슬리. 이 운동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우리보다 먼저 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고 그 사랑이 마음과 삶 전체를 다스리기를 구하는 일입니다. 성화의 길은 성화란 무엇인가?에서 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연습

  1. 연습 1 / 8

    1738년 5월 24일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모임에서 웨슬리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졌을’ 때 읽히고 있던 글은 무엇입니까?

  2. 연습 2 / 8

    웨슬리가 말한 ‘선행 은총’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3. 연습 3 / 8

    웨슬리는 로마서 8:16을 근거로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4. 연습 4 / 8

    웨슬리가 가르친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무엇입니까?

  5. 연습 5 / 8

    감리교의 ‘속회’는 무엇이었습니까?

  6. 연습 6 / 8

    예정을 두고 웨슬리와 휫필드가 갈라선 일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7. 연습 7 / 8

    다음 일들을 일어난 순서대로 바르게 놓은 것은 무엇입니까?

  8. 연습 8 / 8

    개혁교회 쪽이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해 물어 온 것은 무엇입니까?

출처

  1. 존 웨슬리, 일지 1738 — 1738년 5월 24일 올더스게이트 거리 모임의 기록. 루터의 로마서 서문이 읽힐 때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다고 쓴다.
  2. 존 웨슬리, 성경적 구원의 길 설교 43 / Sermon 43 (1765) — 선행 은총, 믿음으로 받는 칭의와 성화를 설명하는 설교. 읽기
  3. 존 웨슬리, 그리스도인의 완전 1766 — 사랑으로 온전해진 마음(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이생에서 구할 은혜로 가르친다. 죄가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하지는 않는다.

성경과 교회의 신경, 교부와 신학자들의 글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복음주의 신앙에 서서, 각 전통과 신학자를 먼저 그들 자신의 말로 공정하게 소개한 뒤 성경에 비추어 살핍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