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역정
존 버니언 · 1678년
영어 본문: 버니언의 원문(1678) ·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 우리말은 이 영어 본문에서 옮겼습니다.
해설
『천로역정』은 존 버니언이 감옥에서 구상한 꿈 이야기로, 무거운 짐을 진 크리스천이 멸망의 도시를 떠나 십자가 앞에서 짐을 벗고 여러 고난을 지나 천성에 이르기까지를 그려, 그리스도인의 삶을 하나님 나라를 향한 순례로 보여 주는 책입니다.
땜장이 설교자와 베드퍼드의 감옥
존 버니언은 1628년 잉글랜드 베드퍼드 근처의 엘스토 마을에서 땜장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마을 학교에서 읽고 쓰기를 배운 것이 배움의 거의 전부였고,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았으며, 열여섯 살에는 내전 중이던 의회군에 들어가 몇 해를 복무했습니다. 1640년대 말에 맞은 첫 아내는 그와 마찬가지로 가난했지만 경건 서적 두 권을 가지고 왔다고 그는 회고합니다. 1650년대 초 그는 여러 해 동안 깊은 영적 고뇌를 지났습니다. 어떤 날은 성경 한 구절에 위로를 얻었고, 어떤 날은 그리스도를 저버렸다는 생각과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는 두려움에 짓눌렸습니다. 그는 이 싸움을 1666년에 펴낸 영적 자서전 『죄인 중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에 자세히 적었습니다.
1650년대 중반 그는 존 기퍼드가 이끌던 베드퍼드의 분리파 회중에 들어갔습니다. 믿음을 고백한 이들끼리 모인 회중이었고, 버니언은 곧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660년 왕정이 돌아오자 국교회 밖의 설교는 죄가 되었습니다. 그해 11월 그는 한 농가의 모임에서 허가 없이 설교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다시는 설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끝내 거절하여 1672년까지 열두 해 가까이 베드퍼드의 주(州)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끈을 만들어 가족의 생계를 도우며 여러 책을 썼고, 아내와 아이들, 특히 눈먼 큰딸 메리와 떨어져 지내는 일이 뼈에서 살을 떼어 내는 것 같았다고 적었습니다.
1672년 찰스 2세의 관용 선언으로 풀려난 그는, 그해 초 이미 그를 목사로 세운 베드퍼드 회중을 1688년 런던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섬겼습니다. 선언이 이듬해 거두어진 뒤 1676년에서 1677년 사이에 그는 아마도 반년쯤 다시 갇혔던 것으로 보입니다. 버니언은 칼뱅주의의 은혜 교리를 따른 청교도 설교자였습니다. 그가 세례에 대해 정확히 어떤 견해를 가졌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리지만, 그가 목회한 회중은 신자의 세례를 받은 이와 어려서 세례를 받은 이를 함께 교인으로 받았고, 그는 물세례에 관한 견해 차이가 성찬의 교제를 막아서는 안 된다는 글(1673)을 써서 더 엄격한 이들과 논쟁했습니다.
『천로역정』을 언제 쓰기 시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버니언은 책 앞에 붙인 시에서, 성도들이 걷는 길에 관한 다른 책을 쓰다가 문득 그들의 여정을 그린 우의(寓意)에 빠져들었다고 말합니다. 이야기는 화자가 이 세상의 광야를 걷다가 어느 굴에 누워 잠들고 꿈을 꾸는 데서 시작하는데 10, 초기 판의 여백에는 이 굴을 감옥이라고 풀어 놓은 짧은 주가 있습니다. 많은 학자는 그가 긴 첫 투옥의 끝 무렵에 이 책을 시작했다고 보고, 다른 이들은 1676–77년의 짧은 둘째 투옥 때로 봅니다. 책은 1678년 런던에서 나와 곧 판을 거듭했고, 버니언은 뒤따른 판들에 몇 대목을 더 써 넣었습니다. 그 시대의 이야기는 신학 과정의 정통주의와 청교도 과에서 볼 수 있습니다.
꿈으로 들려준 순례
책의 온전한 제목은 이 세상에서 앞으로 올 세상으로 가는 순례자의 여정을 꿈의 비유로 전한다는 뜻입니다. 화자는 꿈에서 누더기를 입고 자기 집을 등진 채 손에 책을 들고 등에 무거운 짐을 진 한 사람을 봅니다. 그는 책을 읽다가 울며 떨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부르짖습니다 10. 그의 이름이 크리스천이라는 것은 조금 뒤에야 나옵니다 20. 그 부르짖음은 빌립보의 간수가 바울과 실라 앞에서 던진 물음과 같습니다 12.
그들을 데리고 나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그들이 이르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고 네 집이 받으리라, 하며
행 16:30-31
짐이 어디서 생겼느냐는 물음에 크리스천은 손에 든 이 책을 읽고 생겼다고 답합니다 41. 짐은 성경 앞에서 깨달은 죄의 무게이고, 길은 그 짐을 벗고 천성에 이르는 믿음의 삶입니다. 버니언은 길 위의 장소와 사람에게 이름을 붙여 그 뜻을 드러냅니다. 대목과 대목 사이에는 짧은 시가 끼어 있고, 버니언이 여백에 적어 둔 성경 구절은 이 서재에서 각 대목 곁에 모아 보여 줍니다.
여기에는 1부의 다섯 대목이 실려 있습니다. 멸망의 도시에서 십자가까지는 크리스천이 집을 떠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해석자의 집을 거쳐 십자가 앞에서 짐을 벗기까지입니다. 고난의 언덕, 아름다운 궁전, 아볼루온,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가파른 언덕과 쉼의 집, 겸손의 골짜기에서 벌어지는 싸움, 그리고 어둠의 골짜기를 지나는 길입니다. 허영의 시장에서는 길동무 신실이 순교하고 소망이 새 길동무가 됩니다. 의심의 성에서는 길을 벗어난 두 사람이 절망 거인에게 갇히고, 쁄라 땅, 강, 천성에서는 마지막 강을 건너 문에 이릅니다. 회심과 싸움, 박해와 절망, 그리고 죽음이라는 순례의 굵은 마디를 고른 것입니다.
빠진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책을 여는 시와 맺는 시가 없고, 둘째와 셋째 대목 사이에서 크리스천이 고향 사람 신실을 따라잡아 그가 겪은 일을 듣고 말만 앞서는 수다쟁이(Talkative)를 만나는 이야기가 빠졌습니다. 허영의 시장 뒤에는 이익을 따라 신앙을 바꾸는 사욕(By-ends)과 은광으로 순례자를 부르는 데마, 두 사람을 의심의 성으로 이끈 샛길 초원(By-path Meadow)이 있습니다. 의심의 성과 강 사이에는 목자들이 천성의 문을 멀리서 보여 주는 기쁨의 산, 자기 마음이 선하다고 믿는 젊은이 무지(Ignorance)와의 만남, 아첨꾼의 그물, 잠이 쏟아지는 마법의 땅에서 소망이 자기 회심을 들려주는 긴 대화가 이어집니다. 1684년에 나온 2부는 크리스천의 아내 크리스티아나와 아이들이 뒤따르는 순례를 그리는데, 이 서재에는 실리지 않았습니다.
짐이 떨어진 자리
첫 대목은 짐을 벗을 길이 어디 있는지를 묻습니다. 전도자는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고 적힌 두루마리를 주고, 넓은 들 너머의 빛을 바라보며 가면 문이 보이리라고 가리킵니다 17. 예수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그 문은 넓고 그 길이 넓어 거기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고 하신 그 문입니다 (마 7:13).
그러나 낙심의 늪을 겨우 빠져나온 크리스천은 세속현자의 말을 듣고 길을 벗어나, 도덕 마을에 산다는 율법주의(Legality) 씨를 찾아갑니다. 그 집 곁의 산은 머리 위로 무너질 듯 기울고 불을 뿜습니다 46. 다시 나타난 전도자는 그 산이 시내 산이며, 율법주의 씨는 누구의 짐도 벗겨 주지 못한다고 일러 줍니다 57. 바울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되는 줄 알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나니 이것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자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의롭게 될 수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갈 2:16).
좁은 문에서 선의는 그가 전에 무슨 일을 했든 탓하지 않고 기꺼이 맞아들입니다 66.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모든 자는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는 약속 그대로입니다 (요 6:37). 그러나 짐은 아직 그대로입니다. 선의는 구원의 자리에 이를 때까지 짐을 지고 가라고, 거기서 짐이 저절로 떨어지리라고 말합니다 68.
해석자의 집에서 그는 그 사이의 일을 그림으로 배웁니다. 한 번도 쓸지 않은 방을 비로 쓸자 먼지가 일어 숨이 막히고, 물을 뿌리자 깨끗해집니다. 비로 쓰는 이는 율법이고 물을 뿌리는 이는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75. 율법은 죄를 드러내고 금하지만 이길 힘을 주지 못하고, 복음이 마음에 들어올 때 죄가 가라앉습니다 76. 율법과 복음을 이만큼 쉽게 그린 장면은 드뭅니다.
마침내 크리스천은 구원이라는 담으로 둘러싸인 길을 달려 언덕 위의 십자가에 이릅니다. 그가 십자가에 다다르자 짐이 어깨에서 풀려 굴러떨어지고, 아래쪽 무덤 입구로 들어가 다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93. 그는 그분이 슬픔으로 자기에게 쉼을, 죽음으로 생명을 주셨다고 기뻐하고, 십자가를 바라본 것만으로 짐이 벗겨진 것이 놀라워 눈물을 흘립니다. 빛나는 세 사람이 와서 죄가 용서되었다고 알리고, 누더기를 벗겨 새 옷을 입히고, 이마에 표를 찍고 봉인된 두루마리를 건넵니다 94. 이 장면에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신 스가랴의 환상과 (슥 3:4)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말씀이 (고후 5:17) 겹쳐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뒤에 이 옷을, 누더기를 벗기던 날 주께서 값없이 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101.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어 의롭다 함을 받는 칭의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왜 짐은 문에서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떨어질까요? 버니언은 설명하지 않고, 독자들은 이 간격을 저마다의 전통에 따라 읽어 왔습니다. 청교도와 개혁교회의 독자들은 흔히 여기서 참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온 사람도 한동안 죄책의 무게를 지고 가다가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분명히 바라볼 때 평안을 얻는 경험을 보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참된 신자가 확신을 얻기까지 오래 기다리며 씨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8.3. 웨슬리는 ‘확신의 믿음’과 ‘의지하는 믿음’을 나누는 구별을 성경이 알지 못한다고 하며, 참된 믿음에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사 자기를 주셨다는 확신이 이미 들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웨슬리, 성경적 구원의 길 II.3. 루터교는 짐 진 양심을 세례와 사죄 선언과 성찬에서 들려오는 약속으로 보내며, 루터는 믿음이 영혼을 신부처럼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여 그리스도의 것이 영혼의 것이 되고 영혼의 죄가 그리스도의 것이 된다고 말합니다 루터, 그리스도인의 자유. 가톨릭 교회는 죄의 용서가 세례에서, 세례 뒤의 중한 죄는 고해 성사에서 주어진다고 가르치고, 하나님의 자비에 굳은 소망을 두되 특별한 계시 없이는 자기가 은혜를 얻었음을 믿음의 확실성으로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트리엔트 공의회, 의화에 관한 교령. 정교회는 구원을 평생 그리스도 안에서 고침받는 길로 보고, 확신보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겸손한 소망을 말합니다.
끝까지 가는 길
십자가 뒤의 길이 더 쉬운 것은 아닙니다. 크리스천은 고난의 언덕 중턱의 정자에서 잠들었다가 두루마리를 잃고, 왔던 길을 울며 되짚어 가서야 그것을 찾습니다. 화자는 그 두루마리가 그의 생명과, 바라던 항구에 받아들여짐을 보증하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109. 아름다운 궁전 앞의 사자들은 쇠사슬에 매여 있었지만 그는 그 사슬을 보지 못했습니다 110. 겸손의 골짜기에서 아볼루온이 그의 지난 실패를 하나하나 들춰 고소하자, 크리스천은 그 말이 다 사실이고 빠뜨린 것도 많지만 자기가 섬기는 왕은 자비로워 용서하신다고 답합니다 148.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는 악한 것이 등 뒤로 다가와 속삭이는 모독의 말을 그가 자기 생각으로 알고 괴로워합니다 162. 『죄인 중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를 읽은 이는 여기서 버니언 자신의 젊은 날을 알아봅니다. 그때 앞서가는 누군가가 시편을 읊는 소리가 들립니다. "참으로 내가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악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며 주의 막대기와 주의 지팡이가 나를 위로하시나이다." (시 23:4).
허영의 시장은 이 세상 자체입니다. 천성으로 가는 길이 이 마을 한가운데로 나 있어서, 이곳을 지나지 않으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화자는 말합니다 218. 집과 땅과 명예와 쾌락과 사람의 몸과 영혼까지 파는 시장에서, 무엇을 사겠느냐는 조롱에 두 순례자는 진리를 사겠다고 답합니다 223.
증선(憎善) 경(Lord Hate-good) 앞의 재판 끝에 신실은 화형을 당하고, 기다리던 수레에 실려 하늘 문으로 올라갑니다 242. 많은 독자는 이 재판에서 버니언 시대에 비국교도를 재판하던 법정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신실의 재에서 소망이 일어나 크리스천의 길동무가 됩니다 244. 베드로는 그런 이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순례자인 너희에게 내가 간청하노니 혼을 대적하여 싸우는 육체의 정욕들을 삼가라."라고 부릅니다 (벧전 2:11).
의심의 성은 십자가를 지난 순례자도 깊은 절망에 빠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편한 샛길로 들어섰다가 길을 잃은 크리스천과 소망은 절망 거인의 땅에서 잠들었다가 붙잡혀 어두운 지하 감옥에 갇힙니다 283. 거인은 아내 소심 부인(Diffidence)의 말대로 그들을 때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부추기지만, 소망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과 이 거인의 손에서 빠져나간 이들도 있다는 사실로 형제를 붙듭니다 286.
토요일 한밤에 기도를 시작한 그들은 동트기 조금 전, 크리스천이 품속에 ‘약속’이라는 열쇠를 줄곧 지니고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그 열쇠가 감옥 문과 성문을 차례로 엽니다 292. 절망을 여는 것은 자기 안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깊은 어둠을 지나는 이에게는 우울증은 믿음이 부족해서인가?도 도움이 됩니다.
마지막 대목에서 두 사람은 다리 없는 강 앞에 섭니다. 강은 그 나라의 왕을 믿는 만큼 깊기도 얕기도 하다는 말을 듣고 들어가지만 390, 크리스천은 지은 죄들에 대한 생각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가라앉고, 소망은 형제의 머리를 물 위로 붙들며 바닥이 느껴진다고, 좋은 바닥이라고 외칩니다 392.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신다는 소망의 말에 크리스천은 그분을 다시 보았다고 외치고, 강을 건널 때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듣습니다 393.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나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강들을 건널 때에 강들이 네 위로 넘쳐흐르지 못하며 네가 불 속을 걸어갈 때에 타지도 아니하고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사 43:2
그러나 책은 기쁜 입성 장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화자가 고개를 돌리자 무지가 헛된 소망(Vain-hope)이라는 사공의 배를 타고 별 어려움 없이 강을 건너 문에 이릅니다. 그에게는 증서가 없었고, 그는 묶여 언덕 옆의 문으로 끌려갑니다. 화자는 하늘 문에서도 멸망의 도시에서처럼 지옥으로 가는 길이 있음을 보았다고 말하고 꿈에서 깹니다 403. 무지는 앞의 빠진 대목에서, 자기 마음과 삶이 선하니 그리스도께서 자기 순종을 받아 주시리라고 믿던 젊은이였습니다. 쉽게 건넌 강이 그를 구원하지 못했고, 거의 빠져 죽을 뻔한 크리스천은 받아들여졌습니다.
끝까지 가는 일을 두고도 전통들은 이 책을 다르게 읽습니다. 버니언이 선 개혁교회의 전통은 하나님이 부르신 이들을 끝까지 지키신다는 성도의 견인을 고백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7.1, 해석자의 집에서 벽 뒤에 숨어 불에 기름을 부으시는 그리스도를 그 그림으로 봅니다 82. 칼뱅도 신자가 때로 두려움에 떨지만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신을 아주 버리지는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칼뱅, 기독교 강요 3.2.17. 웨슬리 전통과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쇠우리에 갇힌 사람 같은 경고를, 참된 신자도 고의로 믿음을 버리고 떠날 수 있으나 회개로 돌아올 수 있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루터교는 의롭다 함을 받은 이도 성령을 잃을 수 있으나 회개하면 다시 용서받는다고 가르치고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12조, 가톨릭 교회는 중한 죄로 잃은 은혜가 고해 성사로 회복되며 끝까지 견디는 것은 하나님의 큰 선물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물음은 구원은 잃을 수 있는가?와 교리 과정의 성화와 견인 과에서 더 다룹니다.
무지가 문 앞에서 쫓겨나는 장면은 믿음과 칭의를 두고 종교개혁에서 갈라진 자리에 서 있습니다. 버니언에게 무지는 그리스도의 의 대신 자기 마음의 선함을 믿은 사람입니다. 가톨릭 교회도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의롭게 된다고 가르치지 않으며, 은혜가 사람을 속에서부터 새롭게 하여 의롭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가톨릭의 가르침은 소망을 거스르는 두 죄로 절망과 자만을 꼽는데 가톨릭 교회 교리서, 버니언의 길에도 쇠고랑을 찬 채 잠든 자만(Presumption)과 절망 거인이 함께 있습니다. 어느 전통에서 읽든 이 책은 떨며 오는 이를 겁주려 하지 않고, 거짓 평안에 잠든 이를 깨우려 합니다.
이 책을 잘 읽으려면
먼저 이 책의 이름들을 사람으로 읽으십시오. 고집쟁이와 변덕쟁이, 세속현자는 생각을 꾸며 낸 꼭두각시가 아니라 버니언이 베드퍼드의 거리와 장터에서 날마다 만난 사람들입니다. 이름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지만, 그들은 실제 이웃처럼 말하고 핑계 대고 비웃고 화를 냅니다. 늪에서 겨우 기어 나와 자기 집 쪽으로 돌아가 버리는 변덕쟁이에게서 30 우리는 이웃의 얼굴과 함께 자기 얼굴을 봅니다.
장소의 이름은 영혼이 지나는 계절입니다. 낙심의 늪은 죄를 깨달은 영혼에 밀려드는 두려움과 의심이 고이는 자리라고 책은 풉니다 33.
또 성경과 함께 읽으십시오. 버니언의 문장은 당시 영어 성경, 특히 흠정역의 말과 이미지로 짜여 있고, 각 대목 곁에 모은 구절을 따라가면 이 이야기가 성경을 그림으로 옮긴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 책은 여러 세대 동안 많은 집에서 성경과 함께 소리 내어 읽혔습니다. 1895년에는 선교사 제임스 게일이 우리말로 옮긴 『텬로력뎡』이 나왔는데, 흔히 우리말로 옮겨진 첫 서양 문학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그 판의 삽화에서 순례자들은 조선 사람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어려운 대목도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아내와 아이들을 떠나 달려갑니다 18. 오늘의 독자에게는 불편한 장면이지만, 버니언이 그 곁에 적어 둔 말씀은 (눅 14:26) 가족을 버리라는 규칙이 아니라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앞세우라는 부르심이고, 크리스천은 뒤에 가족을 데려오지 못한 일을 울며 이야기합니다 125. 2부는 그 아내와 아이들이 뒤따르는 이야기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끝의 동굴에 사는 두 거인 교황과 이교도 167, 허영의 시장에서 로마의 물건이 가장 잘 팔린다는 대목 217에는 그 시대 잉글랜드 개신교인의 로마 가톨릭에 대한 적대가 묻어 있습니다. 메리 여왕 때의 화형을 기억하던 시대였지만, 정작 버니언을 가둔 것은 개신교 국교회의 법이었습니다. 오늘의 많은 독자는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이 대목을 그 시대의 목소리로 읽으며 그 적대가 남긴 상처를 겸손히 기억합니다.
이 책은 꿈으로 끝나지만, 꿈이 가리키는 나라는 꿈이 아닙니다. 두 순례자가 문 안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히는 것을 본 화자는 자기도 그들 가운데 있기를 바랐다고 말합니다 402. 그 바람은 믿음의 선진들이 품었던 바람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그들이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의 본향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분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예비하셨느니라.
히 11:16
출처
차례
싣지 않은 부분: 1부의 다섯 대목을 싣습니다. 그 사이의 이야기와 2부(크리스티아나의 순례)는 싣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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