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회개란 무엇인가?

짧은 답

회개는 죄를 두고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이키는 일입니다. 그것은 후회나 죄책감에 빠져 있는 것과 다르고,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신 집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성경은 회개를 사람이 해야 할 응답이자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 말하며, 한 사람이 돌아올 때 하늘이 기뻐한다고 가르칩니다.

성경의 답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처음 전하신 말씀에 이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왔으니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회개는 복음의 문턱에 서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이 먼저이고, 그 소식 앞에서 방향을 돌이키라는 초대가 따릅니다.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린 사람들이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묻자, 베드로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회개하고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 죄들의 사면을 얻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님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8

그리고 조금 뒤에는 "그런즉 너희는 회개하고 회심하라. 그리하면 새롭게 하는 때가 주의 앞으로부터 이를 때에 너희 죄들이 말소될 것이요"고 말합니다 (행 3:19). 이 말씀들에서 회개는 생각의 변화이면서 방향의 전환입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친 것처럼 (마 3:8), 바뀐 마음은 삶에서 드러납니다.

회개의 가장 깊은 모습은 다윗의 기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우리아에게 죄를 지은 뒤 선지자 나단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때 쓴 시편 51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에 따라 내게 긍휼을 베푸시며 주의 친절한 긍휼의 풍성함에 따라 내 범법들을 지워 주소서.

시 51:1

다윗은 핑계를 대지 않습니다. "내가 주께만 오직 주께만 죄를 짓고 주의 눈앞에서 이 악을 행하였사오니 이로써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롭게 되시고 판단하실 때에 깨끗하시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시 51:4). 그가 구하는 것은 용서만이 아니라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오 하나님이여, 내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속에 올바른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0). 그리고 이런 마음을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지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희생물은 상한 영이라. 오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회개는 사람이 하나님께 바치는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부서진 마음입니다. 예수께서도 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오는 아들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자기 아버지께로 가니라. 그러나 그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그에게 입을 맞추매

눅 15:20

그리고 이 일에 하늘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로운 아흔아홉 사람보다 회개하는 한 죄인으로 인하여 더 기쁨이 있으리라." (눅 15:7). 마지막으로 성경은 회개가 하나님의 선물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이 믿게 된 것을 보고 "그들이 이것들을 듣고는 잠잠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라고 찬양했고 (행 11:18), 바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사람을 회개로 인도한다고 말합니다 (롬 2:4).

교회의 증언

교회는 오래전부터 회개를 감정보다 방향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마가복음 1:15를 풀면서 위(僞)히에로니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알맹이를 얻으려는 사람은 껍질을 깨뜨리고 … 건강에 대한 소망은 약의 괴로움을 덜어 주기 때문입니다" 위(僞)히에로니무스. 회개의 쓴맛은 그 끝에 있는 선한 것 때문에 감당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베다는 믿음과 회개를 함께 묶습니다. "선한 행위의 공로가 믿음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먼저 시작되어 선한 행위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베다.

탕자의 비유를 풀면서 크리소스토무스는 아버지의 자리에서 말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회개를 알아보고 그의 고백의 말을 받으려고 기다리지 않고 그의 간구를 앞질렀으며 불쌍히 여겼으니" 크리소스토무스. 암브로시우스도 같은 대목에서 "그분은 여러분을 마중하러 달려오시니"라고 씁니다 암브로시우스. 돌아오는 사람을 맞이하시는 하나님은 먼저 달려가시는 분이라는 것이 교회의 변함없는 증언입니다.

매튜 헨리는 고린도후서 7장을 풀면서 참된 회개의 모습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깊은 겸손과 모든 죄에 대한 미움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새 마음과 새 생활과 함께하여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룹니다" 매튜 헨리.

회개를 어떻게 실천하는지에 대해서는 교회 안에 다른 이해가 있습니다.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는 세례 뒤에 지은 죄의 용서를 무엇보다 고해성사에서 받습니다.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를 주셨고 (요 20:23), 사제의 사죄 선언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친히 용서하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개신교회는 한 분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해 누구나 하나님께 직접 죄를 고백할 수 있다고 가르치며, 요한일서 1:9의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를 근거로 삼습니다. 루터 교회와 성공회는 개인 고해와 사죄 선언을 의무가 아닌 도움으로 지켜 왔습니다. 회개와 믿음의 순서에 대한 설명도 다르지만, 용서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점과 마가복음 1:15가 회개와 믿음을 함께 말한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합니다.

원어로 보기

신약에서 회개를 뜻하는 말은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이고, 그 동사는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입니다. 문자 그대로는 '마음을 바꾸다, 생각을 바꾸다'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이 말은 머릿속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삶의 방향 전체가 바뀌는 것으로 쓰입니다. 바울이 "먼저 다마스쿠스 사람들에게 또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두루 모든 유대 지방과 이방인들에게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에 합당한 일들을 행하여야 함을 보이매"고 선포한 것 (행 26:20)은 이 뜻을 잘 보여 줍니다.

구약에서 이와 가장 가까운 말은 슈브(שׁוּב)입니다. '돌아오다'라는 아주 일상적인 동사입니다.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슈브이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도 슈브입니다. 호세아는 "오라,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우리를 낫게 하시리라. 그분께서 우리를 치셨으나 우리를 싸매어 주시리라."고 외치고 (호 6:1), 요엘은 "너희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으며 주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분은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사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시나니"라고 말합니다 (욜 2:13). 구약의 회개는 처음부터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의 말입니다.

한편 마태복음 27:3에서 유다가 "스스로 뉘우쳐"라고 할 때 쓰인 동사는 메타멜로마이(μεταμέλλομαι)로, 메타노이아와는 다른 말입니다. 이것은 일어난 일에 대한 마음의 아픔, 곧 후회를 가리킵니다. 성경은 두 말을 늘 엄격하게 구별하지는 않지만, 후회와 회개의 차이를 생각해 보는 데 이 단어는 좋은 실마리가 됩니다.

흔한 반론과 답

"나는 너무 많은 일을 저질러서 용서받을 수 없다." 이것은 가볍게 넘길 말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정말 되돌릴 수 없는 일이 있고, 남에게 입힌 상처는 사과로 지워지지 않습니다.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는 느낌은 자주 정직한 양심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용서의 근거를 우리가 한 일의 크기에 두지 않습니다. 이사야 1:18은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살인과 간음을 저질렀지만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고백했을 때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주께 죄를 지었노라, 하거늘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주께서도 왕의 죄를 치우셨으므로 왕이 죽지 아니하리이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삼하 12:13). 바울은 스스로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부르며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셨다는 말이 "미쁘다"고 증언합니다 (딤전 1:15).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도 갈릴리 호숫가에서 다시 불리었습니다 (요 21:15). 용서를 가로막는 것은 대개 죄의 크기가 아니라, 돌아서기를 망설이는 마음입니다. 물론 용서받았다고 해서 지난 일의 결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회개한 사람도 그 결과를 안고 살아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그 길을 함께 걸으십니다.

"회개란 죄책감에 빠져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아닌가?" 이 오해는 그리스도인에게서도 생겨납니다. 그러나 성경은 회개와 자책을 구분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거니와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느니라."이라고 말합니다 (고후 7:10). 유다와 베드로가 그 차이를 보여 줍니다. 유다는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말하고 은을 돌려주었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마 27:3-5). 베드로는 주께서 돌이켜 자기를 보시자 "나가서 비통하게 우니라."했습니다 (눅 22:61-62). 두 사람 모두 깊이 괴로워했습니다. 다른 점은 향한 곳입니다. 매튜 헨리는 유다에 대해 "그는 고백하였으나 하나님께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라고 말하고 매튜 헨리, 베드로에 대해서는 그를 회복시킨 것이 "그리스도의 눈길만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매튜 헨리. 성경은 유다에 대해 엄중하게 말하지만 (마 26:24), 이 대조의 요점은 그의 운명을 따지는 데 있지 않고 슬픔이 어디로 향하는지가 중요함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회개는 자신을 벌하는 일이 아니라, 아버지께 가는 일입니다.

"회개는 내가 스스로 마음먹으면 되는 일인가, 아니면 그것조차 하나님이 주셔야 하는가?" 성경은 두 면을 모두 말합니다. 예수와 사도들은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지만, 사도행전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이것들을 듣고는 잠잠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라고 하고 (행 11:18), 디모데후서는 "스스로 반대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일깨워 주어야 하리라. 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를 허락하사 진리를 인정하게 하시리니"라고 말합니다 (딤후 2:25). 개혁 전통은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사람의 마음을 여신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웨슬리·아르미니우스 전통은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응답할 힘을 주고 사람은 그 은혜에 자유로이 응답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두 전통 모두 회개하는 사람이 자기 공로를 자랑할 수 없고, 돌아서려는 마음 자체를 이미 하나님의 손길로 알아본다는 점에서는 만납니다.

더 생각해 보기

회개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멀어지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가까이 오라는 초대입니다. 하나님은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사악한 자가 죽는 것을 내가 조금이라도 기뻐하겠느냐? 그가 자기 길들에서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겔 18:23). 먼 곳에서도 아버지는 보고 계십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내가 돌아서기를 미루고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나는 죄를 고백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후회나 두려움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면, 내가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더 읽으려면 죄란 무엇인가?와 은혜란 무엇인가?, 용서는 어떻게 가능한가?를 보십시오. 시편 51편과 누가복음 15장 11-32절을 천천히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