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읽기

하나님의 도성

아우구스티누스 · 413–426년

영어 본문: M. 도즈 영역(1871) ·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 우리말은 이 영어 본문에서 옮겼습니다.

해설

『하나님의 도성』은 410년 로마가 약탈당한 뒤 아우구스티누스가 413년부터 426년까지 써 낸 스물두 권의 책으로, 자기 사랑과 하나님 사랑이 이룬 두 도성이 역사 속에 뒤섞여 걷다가 마지막 심판에서 갈리는 이야기를 통해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보여 줍니다.

로마가 무너졌을 때

410년 8월,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이 로마에 들어와 사흘 동안 도시를 약탈했습니다. 로마가 외적의 손에 떨어진 것은 거의 팔백 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황제의 궁정은 라벤나에 있었지만 로마는 여전히 세상을 다스리는 도시로 여겨졌기에, 그 충격은 지중해 온 세상에 퍼졌습니다. 피난민들은 바다 건너 아프리카까지 왔습니다. 옛 신들을 섬기던 이들은 로마가 신들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른 탓에 무너졌다고 말했고,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을 허락하셨는지 물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때 북아프리카의 항구 도시 히포의 감독이었습니다. 386년 밀라노에서의 회심과 이듬해의 세례에 이르는 젊은 날은 『고백록』에, 그의 생애와 가르침 전체는 신학 과정의 아우구스티누스: 은혜의 박사 과에 있습니다. 그에게 답을 청한 사람은 황제가 아프리카에 보낸 관리 마르켈리누스였습니다. 411년 카르타고 회의를 맡아 도나투스파 문제를 다룬 바로 그 사람으로, 그는 교양 있는 이교도들의 물음을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전하며 답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머리말에서 그가 권하고 자신이 약속한 이 책을 사랑하는 아들 마르켈리누스에게 바친다고 말하고, 크고도 힘든 일이지만 하나님이 도우신다며 시작합니다 1권 머리말. 마르켈리누스는 책이 시작된 413년,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처형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뒤로 426년까지 이 책을 썼고, 몇 권씩 마무리되는 대로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사이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이 이어졌고, 감독으로서 설교하고 편지를 쓰는 일도 쉬지 않았습니다. 생애 끝 무렵에 쓴 『재론고』에서 그는 이 책의 짜임을 손수 설명했습니다. 430년, 반달족이 히포를 에워싸고 있을 때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물두 권에 담은 두 도성

『하나님의 도성』(De civitate Dei, 우리말로 『신국론』이라고도 옮깁니다)은 스물두 권에 이르는 큰 책입니다. 『재론고』의 설명대로 앞의 열 권은 반박입니다. 1–5권은 이 세상의 번영을 위해 여러 신을 섬겨야 한다는 이들에게, 6–10권은 죽은 뒤의 삶을 위해 신들을 섬겨야 한다는 이들, 특히 철학자들에게 답합니다. 뒤의 열두 권은 그리스도인이 믿는 바를 펼칩니다. 11–14권은 두 도성의 기원을, 15–18권은 그 행로를, 19–22권은 그 마땅한 끝을 다룹니다. 그는 이 계획을 1권 끝 1.36과 11권 첫머리에서도 밝힙니다.

이 도성의 이름은 성경에서 왔습니다. 11권을 열며 그는 하나님의 도성을 노래한 시편 몇 편을 드는데 11.1, 그 첫 구절은 이것입니다.

오 하나님의 도시여, 그들이 너에 대하여 영화로운 것들을 말하였도다. 셀라.

시 87:3

‘도성’으로 옮긴 라틴어 ‘키비타스’(civitas)는 성벽보다 그 안에 함께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먼저 뜻합니다. 그래서 그는 땅 위의 수많은 민족이 말과 풍속과 옷차림이 저마다 달라도, 사람의 사회는 성경의 말을 빌려 두 도성이라 부를 수 있는 두 가지뿐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는 육체를 따라, 다른 하나는 영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이들의 사회입니다 14.1.

여기에 실린 것은 두 도성의 실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도록 여섯 권에서 고른 몇 장씩입니다. 1권에서는 머리말과 로마의 함락을 다룬 첫 장, 그리고 두 도성이 끝날까지 뒤섞여 있음을 말하는 1.35와 앞으로의 계획을 밝히는 36장을 싣습니다. 11권에서는 책의 뒤쪽 절반을 여는 두 장과 사람 안에서 삼위일체의 형상을 찾는 세 장을, 14권에서는 두 도성을 처음 정의하는 장들과 두 사랑을 말하는 14.28을 싣습니다. 가장 긴 부분은 이 땅의 평화와 영원한 평화를 다룬 19권입니다. 20권에서는 최후의 심판과 요한계시록 20장의 천 년을, 22권에서는 하나님을 뵙는 일과 영원한 안식을 노래하는 마지막 두 장을 싣습니다.

빠진 부분이 훨씬 많습니다. 2–10권에는 신들이 로마를 지켜 주지 못한 역사, 정의가 없는 나라가 큰 강도떼와 무엇이 다르냐는 이름난 물음(4권), 그리스도인 황제들에 대한 생각(5권), 로마의 학자 바로가 정리한 신학과 플라톤주의자들과의 긴 대화(6–10권)가 있습니다. 12–13권은 천사들의 선한 뜻과 악한 뜻, 사람의 창조와 죽음을 다룹니다. 15–18권은 가인과 아벨에서 시작해 노아와 아브라함, 이스라엘의 왕들과 선지자들을 거쳐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두 도성이 걸어온 길을 앗수르와 로마의 역사와 나란히 놓고 따라갑니다. 21권은 악인이 받을 영원한 형벌을, 22권의 앞부분은 몸의 부활과 그의 시대에 일어난 기적들을 다룹니다. 약탈 때 폭행당한 여인들을 위로하며 자결의 문제를 다룬 1권의 여러 장도 여기에는 없습니다.

두 사랑, 나그네의 평화

책 전체를 한 문장으로 줄인다면 많은 독자가 14권의 마지막 장을 듭니다. 두 사랑이 두 도성을 이루었으니, 하나님을 업신여기기까지 하는 자기 사랑이 지상의 도성을, 자기를 업신여기기까지 하는 하나님 사랑이 하늘의 도성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14.28. 한 도성은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다른 도성은 주 안에서 자랑합니다. 한 도성에서는 다스리려는 욕망이 다스리는 이와 다스림 받는 이를 모두 붙들고 있고, 다른 도성에서는 다스리는 이와 따르는 이가 사랑 안에서 서로 섬깁니다.

두 도성은 교회와 국가, 그리스도인과 로마인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 아닙니다. 그 시작은 사람의 역사보다 앞서, 하나님 곁에 머문 천사들과 하나님을 등진 천사들 사이의 갈라짐에 있습니다 11.1. 이 세상에서 두 도성은 서로 얽히고 뒤섞여 있다가 마지막 심판에서야 갈립니다. 하나님의 도성의 원수들 가운데에도 장차 그 시민이 될 이들이 숨어 있고, 교회 안에서 함께 성례를 받는 이들 가운데에도 끝내 성도들의 몫에 들지 못할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은 우리와 함께 교회를 메우고 내일은 극장을 메우는 이들을 보면서도 소망을 버리지 말라고 권합니다 1.35.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사람을 따라 사는 것은 거짓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바르게 지으신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 지으신 분의 뜻을 따라 살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죄는 행복을 바라면서도 행복이 있는 유일한 곳인 하나님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14.4. 하나님께 돌아갈 길은 한 분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신성을 잃지 않으신 채 사람이 되셔서 사람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내셨으니, 하나님은 우리가 가야 할 끝이시고 사람이신 그리스도는 그리로 가는 길이십니다 11.2. 바울도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딤전 2:5). 『고백록』에서 중보자를 붙들기까지 하나님을 누릴 힘을 얻지 못했다고 고백한 7.18.24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입니다.

11권 뒷부분에서 그는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곧 삼위일체의 형상을 찾습니다. 우리는 있고, 우리가 있음을 알며, 그 있음과 앎을 사랑합니다. 회의론자들이 네가 속고 있다면 어찌하겠느냐고 물어도, 속는 이도 있어야 속을 수 있으니 나는 있다고 그는 답합니다 11.26. 천이백 년쯤 뒤 데카르트의 이름난 명제를 떠올리게 하는 논증이지만, 그의 눈길은 확실성보다 사랑에 가 있습니다. 몸이 무게에 이끌려 제자리를 찾아가듯 영혼은 사랑에 이끌려 움직이니, 탕자처럼 스스로 돌이켜 일어나 우리가 죄로 떠나온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그는 권합니다 11.28.

이 땅에서 하나님의 도성은 나그네입니다. 첫 문장에서부터 그는 이 도성이 지금은 경건하지 않은 이들 가운데 믿음으로 살며 나그네로 머물고, 장차 영원한 처소에 굳게 설 날을 인내로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1권 머리말. 히브리서가 믿음의 조상들을 두고 한 말 그대로입니다.

이제는 그들이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의 본향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분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예비하셨느니라.

히 11:16

19권은 이 나그네 도성이 가는 길의 평화를 다룹니다. 그는 먼저 철학자들과 최고선을 두고 논쟁합니다. 하나님의 도성은 영원한 생명이 최고선이고 영원한 죽음이 최고악이라고 답하는데, 철학자들은 행복을 이 삶 안에서, 그것도 자기 안에서 찾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19.4. 그는 가정과 도시와 온 세상에 가득한 비참을 길게 늘어놓습니다. 진실을 알 길이 없어 무죄한 이를 고문하고 사형에 처하기까지 하는 재판관 19.6, 정당한 전쟁이라도 그것을 치러야 하는 형편 자체를 슬퍼해야 하는 지혜로운 사람 19.7이 그 예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행복은 지금 손에 쥔 것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어찌하여 사람이 보는 것을 여전히 바라리요?"라고 말합니다 (롬 8:24).

그런데도 모든 사람은 평화를 바랍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이도 자기 뜻에 맞는 평화를 바라고, 강도떼도 자기들끼리는 평화를 지키려 합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비뚤게 흉내 내어 자기의 불의한 평화를 남에게 지우려 할 뿐입니다 19.12. 그는 몸과 영혼과 가정과 도시의 평화를 차례로 정의한 뒤, 하늘의 도성의 평화는 하나님을,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더없이 질서 있게 누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19.13. 만물의 평화를 ‘질서의 평온’(tranquillitas ordinis)이라 부른 이름난 정의도 이 장에 있습니다.

하늘의 도성은 이 땅의 평화를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두 도성이 섞여 있는 동안 하나님의 백성도 바벨론의 평화를 함께 누리니, 바울은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고 예레미야는 사로잡혀 가는 백성에게 바벨론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19.26.

또 내가 너희로 하여금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해서 거하게 한 그 도시의 평안을 구하고 그것을 위하여 주에게 기도하라. 그 도시가 평안하여야 너희도 평안하리라.

렘 29:7

그래서 나그네 도성은 이 죽을 삶에 필요한 것들을 다스리는 지상의 도성의 법을 기꺼이 따릅니다. 모든 민족에게서 시민을 불러 모으면서, 참 하나님을 섬기는 데 걸림이 되지 않는 한 저마다의 풍속과 법과 제도를 없애지 않고 지켜 줍니다. 다만 예배의 법만은 함께할 수 없었기에 미움과 박해를 견뎌야 했습니다 19.17.

그는 로마가 참된 공화국이었는지도 묻습니다. 키케로가 전하는 스키피오의 정의대로 공화국이 백성의 것이고 백성이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공동의 인정으로 묶인 무리라면, 참 하나님께 마땅한 것을 드리지 않은 로마에는 참된 정의가 없었으니 공화국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19.21. 그러나 그는 정의를 바꾸어, 백성이란 사랑하는 것에 대해 한마음으로 묶인 이성적 존재들의 무리라고 말합니다. 한 백성이 어떤 백성인지 알려면 그들이 무엇을 사랑하는지 보면 됩니다 19.24. 이 물음은 나라만이 아니라 교회와 가정과 한 사람에게도 던져집니다.

나그네의 의도 아직 온전하지 않습니다. 이 삶에서 우리의 의는 덕의 완성보다 죄 사함에 있으며, 그래서 나그네 도성 전체가 모든 지체의 입으로 빚을 사하여 달라고 기도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19.27. 주께서 가르치신 대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 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라고 비는 것입니다 (마 6:12). 많은 개신교 독자는 이 대목에서 은혜로 받는 의의 울림을 듣고, 가톨릭 교회는 같은 장이 사랑으로 일하는 믿음을 말한다는 데 주목해, 그가 말하는 의를 죄 사함과 함께 자라 가는 새 생명으로 읽습니다.

이 책은 교회와 나라를 생각하는 서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래 자국을 남겼지만, 그 읽는 길은 저마다 달랐습니다. 아인하르트가 쓴 전기에 따르면 카롤루스 대제는 이 책을 즐겨 읽게 했고, 중세에는 하나님의 도성을 눈에 보이는 교회와, 지상의 도성을 세상 권세와 거의 같은 것으로 보아 교회가 왕들 위에 선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교회가 신비 가운데 이미 와 있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땅 위에서 그 나라의 씨앗이요 시작이라고 가르칩니다. 루터가 하나님이 세상은 칼로, 교회는 복음으로 다스리신다고 구별한 두 나라 가르침에서 많은 학자는 두 도성의 영향을 보지만, 루터에게는 두 다스림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칼뱅과 개혁교회는 세상 권세를 하나님이 세우신 것으로 존중하고 그 안에서 일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소명으로 보았습니다. 정당한 전쟁을 슬퍼하면서도 인정한 그의 생각은 가톨릭, 루터교, 개혁교회, 성공회의 정당한 전쟁론으로 이어졌고, 재세례파 전통은 칼이 그리스도의 온전함 밖에 있다고 고백해 왔습니다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

심판, 그리고 끝없는 안식

20권은 마지막 심판을 다룹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늘 심판하고 계시지만, 지금 우리는 왜 선한 이가 가난하고 악한 이가 번성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날에는 지금 감추어진 모든 판단이 의로웠음을 알게 될 것이며, 경건한 이는 지금도 감추어진 것이 의롭다는 것만은 안다고 그는 말합니다 20.2. 그때까지 두 부활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 일어나는 영혼의 부활, 곧 긍휼의 부활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 끝에 있을 몸의 부활, 곧 심판의 부활입니다 20.6. 그는 예수의 말씀에서 이 구별을 읽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고 있는데 곧 지금이라. 듣는 자들은 살리라.

요 5:25

이 빛 아래에서 그는 요한계시록 20장의 천 년을 읽습니다. 그는 자신도 한때 성도들이 부활해 역사의 여섯째 천 년 뒤에 천 년의 안식을 누리리라고 생각했다고 털어놓습니다. 그 기쁨이 하나님의 임재에서 오는 영적인 것이라면 받아들일 만하지만, 지나친 육적 잔치를 기대하는 생각은 물리칩니다 20.7. 그가 보기에 사단의 결박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강한 자의 결박과 같아서 (마 12:29), 마귀가 교회를 이룰 민족들을 더는 미혹하지 못하게 묶인 것입니다 20.8. 천 년은 그리스도의 첫 오심에서 세상 끝까지의 때이며, 성도들은 지금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고, 교회는 지금도 그리스도의 나라요 천국입니다 20.9.

이 읽기는 중세 서방 교회의 주류가 되었고, 오늘날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 대부분의 루터교회와 많은 개혁교회가 천 년을 지금의 시대로 읽는 무천년설에 서 있습니다. 17–19세기의 많은 청교도와 복음주의자는 복음이 온 세상에 퍼진 뒤 그리스도께서 오시리라는 후천년설의 소망을 품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는 첫째 부활을 몸의 부활로, 천 년을 재림 뒤 땅 위의 통치로 읽는 전천년설을 따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보다 앞서 파피아스와 유스티누스와 이레나이우스가 품었던 소망입니다 이레나이우스, 이단 반박 5.36. 세 견해 모두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다시 오시고 죽은 자가 일어나며 심판이 있다는 것을 함께 고백합니다. 견해들의 비교는 교리 과정의 재림과 천년왕국 과에 있습니다.

22권의 마지막 두 장에서 그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뵙는 일을 그려 봅니다. 그는 자기가 본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을 말한다고 겸손히 밝힙니다 22.29. 지금은 거울로 보듯 희미하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나 그때에는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며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 같이 나도 알리라.

고전 13:12

부활한 몸의 눈으로도 하나님을 볼지는 어려운 물음이라고 그는 인정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서, 서로 안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모든 것 안에서 어디에나 계셔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뵙게 되리라고 기대합니다. 마지막 장은 그 도성의 행복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만유 안에 계실 그곳에서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상이 되시고, 성도들은 끝없이 그분을 뵙고 싫증 없이 사랑하며 지치지 않고 찬양할 것입니다 22.30. 처음 사람이 받은 자유는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지을 수도 있는 자유였지만, 마지막 자유는 더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자유이며, 이것은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역사의 여섯 시대 뒤에는 저녁이 없는 일곱째 날이 오고, 그날에는 우리 자신이 그 일곱째 날이 됩니다. 그 안식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거룩해진 여덟째 날, 곧 영원한 주의 날로 이어집니다. 그는 그 끝을 쉼과 봄과 사랑과 찬양이 차례로 이어지는, 끝이 없는 끝이라고 부릅니다. 안식의 뜻은 왜 쉬어야 하는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잘 읽으려면

이 책은 무엇보다 변증서입니다. 그는 흔들리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교양 있는 이교도들을 독자로 삼았고, 베르길리우스와 키케로, 바로와 플라톤주의자들처럼 그들이 존경하는 이들의 글을 들고 그들의 자리에서 논증합니다. 영혼의 불멸과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에 대해 그리스도인과 뜻이 같은 철학자들을 그는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그들과 다른 점은 분명히 밝힙니다 1.36. 낯선 이름과 긴 곁가지가 나오면 그가 그 시대의 가장 높은 교양과 씨름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두 도성의 실을 놓치지 않으면 됩니다. 처음 읽는다면 14.28에서 시작해 19권으로 가도 좋습니다.

두 도성을 교회와 국가의 설계도로 읽지 마십시오. 그는 교회가 지금도 그리스도의 나라라고 말하면서도, 그 나라에는 가라지가 곡식과 함께 자란다고 덧붙입니다. 두 도성의 경계는 교회의 담장과 같지 않고, 그것을 온전히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생각은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라는 구별로 이어졌습니다. 이 책이 독자에게 거듭 묻는 것은 어느 편에 서 있느냐보다 무엇을 사랑하느냐입니다.

어려운 대목도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것은 짐승을 다스리게 하려는 것이지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으며, 노예 상태는 본성이 아니라 죄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종들에게 주인을 성실히 섬기라고 권할 뿐 그들을 놓아주자고 하지는 않습니다 19.15. 오늘의 독자는 여기서 그의 한계를 느끼고, 훗날 노예제에 맞선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창조의 진리에 호소했습니다. 이 문제는 성경은 노예제를 인정하는가?에서 더 다룹니다. 재판관의 고문을 슬퍼하면서도 받아들인 데서도 많은 독자는 그 시대의 한계를 봅니다. 하나님을 향하지 않은 덕은 교만으로 부풀어 있어 덕이라기보다 악덕이라는 말도 있는데 19.25, 흔히 그의 말로 전해지는 ‘이교도의 덕은 빛나는 악덕’이라는 표현은 그의 글에 그대로 나오지 않는 후대의 요약입니다. 하나님의 도성에 속하지 않은 이들이 받을 둘째 사망 19.28은 그가 교회의 대부분과 함께 믿은 것이며, 여러 견해는 교리 과정의 부활, 심판, 새 하늘과 새 땅 과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천을 열의 세제곱으로 풀어 온전함의 수로 읽는 숫자 풀이는 그 시대에 흔하던 성경 읽기의 방식입니다.

열세 해의 수고 끝에 그는 너무 짧다고 여기는 이도, 너무 길다고 여기는 이도 자기를 용서해 달라고, 알맞다고 여기는 이는 함께 하나님께 감사하자고 청하며 펜을 놓습니다 22.30. 로마는 무너졌지만 그가 바라본 도성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도성의 시민은 "여기에서는 우리에게 영구한 도시가 없고 우리가 다가오는 도시를 찾나니"라고 고백하며 이 땅을 걷습니다 (히 13:14).

출처

  1.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읽기
  2. 아우구스티누스, 하나님의 도성 읽기
  3. 스위스 형제단,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 1527
  4. 이레나이우스, 이단 반박 읽기

차례

싣지 않은 부분: 스물두 권 가운데 두 도성의 뜻과 평화, 심판, 영원한 안식을 다룬 장만 싣습니다. 로마의 신들을 논박하는 2–10권의 대부분은 싣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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