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쉬어야 하는가?
성경에서 쉼은 게으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 때 복 주신 리듬이며, 종 되었던 백성을 위한 자유의 선물입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수고하는 자를 쉬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쉬는 것은 내 수고가 세상을 붙들고 있지 않다고 인정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안식일과 주일을 어떻게 지킬지에는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의 답
성경은 쉼에 대해 세상이 하는 말과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쉼은 일을 더 잘하려고 취하는 휴식만이 아닙니다. 쉼은 창조의 이야기 맨 끝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히 구별하셨으니 이는 그 날에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며 만든 자신의 모든 일에서 떠나 안식하셨기 때문이더라.
창 2:3
하나님이 복을 주신 날은 일곱째 날, 곧 쉼의 날입니다. 하나님이 피곤해서 쉬신 것은 아닙니다. 매튜 헨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피곤한 사람처럼 쉬신 것이 아니라 만족하신 분으로서 쉬셨습니다" 매튜 헨리. 창조가 선하게 이루어졌으므로 그 위에서 기뻐하며 머무신 것입니다. 사람은 그 쉼에 초대받습니다.
이 초대는 시내산에서 계명이 됩니다. 십계명은 쉼의 이유를 창조에서 찾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출 20:8
엿새 동안에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것들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주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20:11
그런데 신명기에서 같은 계명이 다시 주어질 때는 이유가 다릅니다. 여기서는 노예 생활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기억하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종이었을 때에 주 네 하나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거기서 데리고 나왔나니 그러므로 주 네 하나님이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게 하였느니라.
신 5:15
애굽에서 이스라엘은 쉼 없이 일해야 했고, 쉬는 날은 자기 마음대로 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우선 자유의 표입니다. 같은 구절 앞에서는 종과 육축과 나그네까지 "일곱째 날은 주 네 하나님의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안에 거하는 네 나그네나 아무 일도 하지 말지니 이것은 너뿐만 아니라 네 남종이나 네 여종도 안식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명합니다 (신 5:14). 쉼은 부유한 사람의 특권이 아니라 가장 낮은 사람에게도 보장된 권리였습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가 말하는 이유와 신명기가 말하는 이유는 서로 다른 설명이 아니라 같은 하나님의 두 면을 보여 줍니다. 세상을 지으신 분이 종을 해방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날을 짐이 아니라 선물로 되돌리셨습니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이삭을 잘랐다고 바리새인들이 비난했을 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만들어지지 아니하였나니
막 2:27
이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니라, 하시니라.
막 2:28
안식일은 사람을 누르는 규칙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주인이 지금 사람이 되어 이 자리에 계십니다. 그분은 쉼을 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마 11:28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 위에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마 11:29
여기서 쉼은 시간의 문제를 넘어섭니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외딴 곳에 가서 잠시 쉬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그들에게 먹을 겨를도 없었기 때문이더라." (막 6:31). 사람들이 오고 가서 음식 먹을 겨를도 없던 때였습니다. 쉬라는 말씀은 일이 가장 급할 때에 나옵니다.
히브리서는 이 쉼을 더 먼 곳으로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한 안식이 남아 있도다.
히 4:9
그분의 안식에 이미 들어간 자는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들을 그치신 것 같이 이미 자기 일들을 그쳤느니라.
히 4:10
일곱째 날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완전한 안식의 예고입니다. 한 주에 한 번 쉬는 것은 그 안식을 미리 맛보는 일입니다.
교회의 증언
교회는 처음부터 쉼과 예배를 함께 이해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을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을 위해 지으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그분 안에서 쉬기까지 쉼이 없다는 말로 엽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1.1.
마태복음 11:28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수고하는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고 말씀하심은 무엇을 위함이겠습니까? 너희가 수고하지 않게 하려 함이 아니겠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
매튜 헨리는 마가복음 2:27을 이렇게 풀이합니다. "안식일은 거룩하고 신적인 제도이며 특권이요 유익이지 짐이나 고역이 아닙니다" 매튜 헨리. 또 히브리서 4장에 대해서는 일곱째 날의 안식이나 여호수아가 인도해 들어간 안식보다 "더 영적이고 뛰어난 안식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음이 분명합니다"라고 씁니다 매튜 헨리.
다만 안식일을 오늘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의 견해가 갈립니다. 첫째 견해는 안식일 계명이 영원한 창조 질서이므로 지금도 유효하며, 부활하신 주님의 날인 주일이 그 날을 이어받았다고 봅니다. 장로교와 개혁 교회 전통의 많은 사람이 이렇게 가르쳐 왔고, 그 날을 일과 오락에서 떠나 예배와 쉼에 바치려 합니다. 둘째 견해는 안식일이 모세 언약의 표였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이 견해에서도 주일은 부활을 기념하여 모이는 날이지만 안식일 계명이 그대로 옮겨진 것은 아닙니다. 루터교를 비롯해 여러 교회가 이 이해에 가깝고, 그래도 규칙적인 쉼은 지혜로운 선물로 지킵니다. 셋째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처럼 토요일 안식일을 지금도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주일에 미사에 참여하고 일을 삼가도록 가르칩니다. 이들 모두가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쉼을 주셨고, 쉼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신뢰하는 일과 이어져 있으며, 안식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신약에는 그리스도인이 첫날에 모였다는 흔적이 있습니다. 드로아에서 "주의 첫날에 제자들이 빵을 떼려고 함께 오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려고 준비한 채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며 계속해서 한밤중까지 말을 하니라."라고 했고 (행 20:7), 요한은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었다고 합니다 (계 1:10). 그러나 이 구절들이 안식일 계명을 옮긴 것인지에 대해서는 위의 견해가 갈립니다.
원어로 보기
"안식일"의 히브리어 샤밧(שַׁבָּת)은 "그치다"를 뜻하는 동사 샤바트(שָׁבַת)와 이어집니다. 안식은 졸리거나 지쳐서 눕는 것이 아니라 일을 그치는 일입니다. 창세기 2:2에서 하나님이 "안식하셨다"고 할 때 쓰인 동사가 이것입니다. 일을 그치는 것은 일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인정하는 행동입니다.
히브리서 4:9의 "안식"은 신약 전체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말 사바티스모스(σαββατισμός)입니다. "안식일 쉼" 정도의 뜻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앞으로 누릴 쉼을 가리킵니다. 반면 마태복음 11:28의 "쉬게 하리라"는 아나파우오(ἀναπαύω), 그 명사형은 아나파우시스(ἀνάπαυσις)입니다. 짐을 내려놓고 숨을 돌리게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쉼은 일을 멈추라는 명령보다 지친 사람을 쉬게 해 주겠다는 약속에 가깝습니다.
흔한 반론과 답
"안식일은 구약의 율법이고, 그리스도인은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이 반론에는 성경적 근거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아무도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으로 인하여 또 거룩한 날이나 월삭이나 안식일에 관하여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고 쓰고 (골 2:16), "어떤 사람은 한 날을 다른 날보다 귀히 여기고 다른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 사람은 자기 마음에서 완전히 확신할지니라."고 합니다 (롬 14:5). 그러므로 날짜를 두고 서로를 정죄하는 일은 바울의 가르침과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쉼이 필요 없다는 결론이 되지는 않습니다. 쉼의 리듬은 창조 때 있었고 (창 2:3), 예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 계명을 오늘 어떻게 지켜야 하느냐는 위에서 본 대로 견해가 갈리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쉬는 일 자체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점은 갈리지 않습니다.
"쉴 여유가 없다. 쉬면 먹고살 수 없다." 이것은 가볍게 넘길 말이 아닙니다. 교대 근무자, 돌봄을 맡은 사람, 일용직으로 사는 사람에게 쉼은 현실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이 점을 모르지 않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여섯째 날에 이틀 치 양식을 주셨고, 백성은 일곱째 날에 쉬었습니다 (출 16:29-30). 안식일 계명이 처음 겨냥한 사람들이 바로 쉴 수 없는 종이었습니다. 쉼은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재는 눈금이기도 합니다. 쉬지 못하는 구조는 개인의 게으름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고민할 일입니다. 개인으로서는 시편 기자의 말에 기댈 수 있습니다. "너희가 일찍 일어나고 늦도록 앉아 있으며 고통의 빵을 먹음이 헛되도다. 이처럼 그분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 (시 127:2). 이 말은 일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내 수고가 나를 지킨다는 믿음에서 놓여나라는 말입니다. 하루를 쉬는 것은 하나님이 먹이신다는 신뢰를 몸으로 고백하는 일입니다.
"쉼은 게으름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하나님도 지금 일하신다고 하지 않았는가." 예수께서는 안식일 논쟁 가운데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시되,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고 하셨습니다 (요 5:17). 하나님은 세상을 붙드시고 돌보시는 일을 쉬지 않으십니다. 쉼은 긍휼의 일을 멈추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일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쉼은 생산하려는 일을 그치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누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게으름도 분명히 경계합니다. 그러나 게으름은 일을 피하는 것이고, 안식은 일의 의미를 다시 찾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가 출애굽기 20장에서 말하듯 "나태와 게으름은 육신적인 쉼일 수는 있어도 거룩한 쉼은 아닙니다" 매튜 헨리.
더 생각해 보기
쉬라는 말은 우리가 가장 하기 어려운 순종일 수 있습니다. 쉬면 불안하고, 쉬지 못하는 것을 성실의 증거처럼 여기기 쉽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쉼을 믿음의 행위로 봅니다. 내가 멈춰도 세상은 하나님의 손에 있고, 내 가치는 내 성과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일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돌이켜 안식하여야 구원을 받으며 조용히 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터이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고" (사 30:15).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쉴 때 죄책감을 느낍니까? 그 죄책감은 누구의 목소리입니까? 내 쉼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이 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또 하나의 소비가 되고 있습니까? 내 곁에서 쉬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더 읽으려면 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염려와 불안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참된 자유란 무엇인가?를 보십시오.
관련 질문
- 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성경에서 일은 타락 이후에 생긴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기신 처음의 소명입니다. 타락 이후에 달라진 것은 일 자체가 아니라 일에 따라붙는 수고와 헛됨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일을 구원의 수단이나 존재의 증명으로 삼지 않고, 주께 하듯 이웃을 섬기는 길로 받으며, 쉼과 은혜 안에서 일의 한계를 배웁니다.
-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성경은 삶의 방식을 규칙 목록이 아니라 사랑으로 요약합니다.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삶이며, 이것은 구원을 얻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위선적이라는 반론은 아프지만 정당한 면이 있고, 예수께서 먼저 위선을 꾸짖으셨습니다.
- 염려와 불안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성경은 염려하는 사람을 꾸짖기보다 염려를 맡길 분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며, 기도는 불안을 그분께 가져가는 길이고, 그분의 평강은 느낌이 아니라 지켜 주심으로 주어집니다. 불안장애는 몸의 병처럼 치료받을 수 있는 병이므로 기도와 함께 의사와 상담자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표시가 아닙니다.
- 참된 자유란 무엇인가?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죄의 종살이에서 풀려나 사랑으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유는 사람이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값을 치르고 주시는 것이며, 방종과는 반대편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 자유를 빼앗는다는 반론은 진지하게 다룰 만하지만, 성경은 누구도 주인 없이 살지 않는다고 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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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읽기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