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읽기

이단 반박

이레나이우스 · 180년경

영어 본문: A. 로버츠·W. H. 램보트 영역, 『니케아 이전 교부들』 1권(1885) · 위키문헌 · 우리말은 이 영어 본문에서 옮겼습니다.

해설

『이단 반박』은 2세기 리옹의 감독 이레나이우스가 ‘숨은 지식’을 내세운 가르침에 맞서, 온 교회가 사도들에게서 받은 한 신앙을 변호하고 그리스도께서 아담 안에서 잃은 것을 되찾아 주시는 구원의 큰 줄거리를 펼친 책입니다.

폴리캅을 기억한 리옹의 감독

이레나이우스가 태어난 해는 알 수 없지만 2세기 전반으로 보이며, 그는 소아시아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서머나의 감독 폴리캅을 보았다고 회고합니다. 폴리캅은 사도들에게 배우고 그리스도를 본 많은 이와 사귄 사람이었습니다 3.3.4. 그러니 이레나이우스는 사도들에게서 두 세대쯤 떨어진 증인인 셈입니다. 그는 뒤에 갈리아(오늘날 프랑스)의 리옹으로 건너가 그곳 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177년 리옹과 비엔의 교회가 큰 박해를 겪고 아흔이 넘은 감독 포티누스가 옥에서 숨지자, 그가 뒤를 이어 리옹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에우세비우스가 전하기로는, 그 무렵 그는 갇힌 신자들이 로마의 감독 엘레우테리우스에게 보내는 편지를 들고 로마에 다녀왔습니다.

그때 교회를 가장 깊이 흔든 것은 바깥의 박해보다 교회 안에서 퍼진 가르침이었습니다. 오늘 영지주의라고 묶어 부르는 여러 무리는 이 물질세계를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아닌 낮은 창조자가 만들었으며, 구원은 소수에게만 전해진 비밀한 지식으로 온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레나이우스가 가장 자세히 다룬 것은 로마에서 가르친 발렌티누스를 따르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읽고 교회의 말을 썼기에 분별하기가 더 어려웠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을 알고 싶어 한 한 벗의 청에 답해, 이레나이우스는 180년 무렵 다섯 권의 책을 써 보냈습니다. 3권에서 그는 엘레우테리우스가 지금 사도들로부터 열두째로 로마의 감독직을 잇고 있다고 적어, 그 권을 쓴 때를 스스로 알려 줍니다 3.3.3.

흔히 『이단 반박』이라 부르는 이 책의 본래 제목은 ‘거짓 지식의 폭로와 논박’쯤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남긴 당부에서 따온 말입니다.

오 디모데야, 속되고 헛된 말장난과 또 거짓으로 과학이라 불리는 것의 반론들을 피하며 네게 맡긴 것들을 지키라.

딤전 6:20

여기서 ‘지식’으로 옮긴 말이 바로 그노시스입니다. 이 한 구절에 책 전체가 하는 두 가지 일이 다 들어 있습니다. 거짓되이 지식이라 일컫는 것은 드러내어 물리치고, 교회가 부탁받은 것은 지키는 일입니다. 이레나이우스는 200년 무렵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이며, 그가 순교했다는 이야기는 훨씬 뒤에야 나타나는 전승입니다. 그의 시대 전체는 신학 과정의 사도 이후의 교회: 변증가와 이레나이우스 과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섯 권과 여기 실린 장들

다섯 권은 하나의 긴 논증입니다. 1권은 발렌티누스파의 가르침을 그들의 말로 자세히 풀어 보이고, 여러 무리의 뿌리를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마리아의 시몬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가르침을 드러내 보이는 것만으로도 이기는 것이라고 그는 믿었습니다. 2권은 그 가르침을 이성으로 반박합니다. 3권은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4권은 주님의 말씀으로 논증하며 구약과 신약이 한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보이고, 5권은 주님의 나머지 말씀과 사도의 편지들로 몸의 부활과 마지막 일들을 변호합니다. 그는 헬라어로 썼지만 원문은 대부분 사라졌고, 전체는 이른 시기의 라틴어 번역으로만 남았습니다. 뒷사람들이 인용한 헬라어 조각들과 4–5권의 아르메니아어 번역이 그 곁에 있습니다.

여기에 실린 것은 그 가운데 그의 가르침이 가장 또렷이 드러나는 다섯 묶음입니다. 온 교회의 한 신앙을 요약하는 1권 10장, 사도들의 전파와 기록과 교회들의 전승을 다루는 3권 1장부터 4장까지,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자기 안에 모아 새롭게 하신다는 가르침을 펼치는 3권 18장과 19장,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사람에게 보이신다는 4권 20장, 그리고 성육신과 하나님의 형상과 새 창조를 다루는 5권 1장, 16장, 36장입니다. 이 장들은 그가 붙든 두 기둥을 보여 줍니다. 진리는 온 교회가 공개적으로 받은 한 신앙이라는 것, 그리고 그 신앙의 한가운데에 사람이 되셔서 아담 안에서 잃은 것을 되찾아 주신 말씀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빠진 부분이 훨씬 많습니다. 1권의 이단 설명 대부분과 2권 전체가 없는데, 그 대부분은 발렌티누스파가 그린 위 세계의 계보를 하나하나 따라가며 따지는 대목입니다. 다만 2권에는 성경이 다 풀어 주지 않는 물음은 하나님께 맡기라는 겸손한 권고도 있습니다. 3권의 다른 장들에는 복음서가 넷이어야 하는 까닭과 함께, 하와의 불순종이 맺은 매듭을 마리아의 순종이 풀었다는 이름난 비교가 있습니다. 4권의 다른 장들은 두 언약이 한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보이고, 사람이 처음부터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아이처럼 자라 가도록 지음 받았다고 말합니다. 5권은 성찬과 몸의 부활을 잇고 적그리스도를 다룬 뒤, 32–35장에서 재림 뒤 새롭게 된 땅에 올 의인들의 나라를 그립니다.

온 교회의 한 신앙

1권 10장은 아홉 장에 걸쳐 발렌티누스파의 세계를 그려 보인 바로 뒤에 놓여, 그것과 대비되는 교회의 신앙을 보여 줍니다. 땅끝까지 흩어진 교회가 사도들과 그 제자들에게서 받은 믿음은 이렇습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지으신 전능하신 아버지 한 분 하나님, 우리 구원을 위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한 분 그리스도 예수, 그리고 선지자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고난과 부활과 승천과 다시 오심을 미리 알리신 성령입니다 1.10.1. 바로 앞 장에서 그는 신자가 세례 때 받아 마음에 지니는 이 요약을 ‘진리의 규칙’이라고 부릅니다. 뒷날 사도신경 같은 신조로 이어지는 바로 그 줄거리입니다.

온 세상에 흩어진 교회는 이 신앙을 마치 한 집에 사는 것처럼, 한 영혼과 한마음과 한 입을 가진 것처럼 지키고 전합니다. 게르마니아와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동방과 애굽과 리비야의 교회들이 다른 것을 믿지 않으며, 말 잘하는 지도자가 더할 수도 말이 서툰 이가 덜 수도 없는 신앙입니다 1.10.2. 그렇다고 생각을 멈추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는 성경의 비유를 신앙의 큰 틀에 맞추어 풀고, 하나님이 왜 여러 언약을 주셨는지, 말씀이 왜 마지막 때에 육신이 되어 고난받으셨는지 감사함으로 설명하는 일을 가르치는 이의 몫으로 듭니다 1.10.3. 깊이 안다는 것은 다른 하나님을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같은 신앙을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3권 첫머리에서 그는 이 신앙이 어디서 왔는지 말합니다.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은 뒤 먼저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했고, 뒤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것을 성경에 기록해 우리 믿음의 터와 기둥이 되게 했습니다 3.1.1. 이어서 그는 마태와 마가와 누가와 요한이 각각 어떻게 복음서를 남겼는지 전하는데, 네 복음서의 기원을 전하는 가장 이른 증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경이 어떻게 모였는지는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서 더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맞수들은 성경으로 반박당하면 성경이 모호해서 전승을 모르는 이는 진리를 끌어낼 수 없다고 했고, 사도들에게서 이어진 교회의 전승을 들이대면 자기들이 사도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성경에도 전승에도 동의하지 않는다고 이레나이우스는 정리합니다 3.2.2. 그의 대답은 단순합니다. 사도들에게 소수만 아는 숨은 비밀이 있었다면 누구보다 교회를 맡긴 이들에게 전했을 것입니다 3.3.1. 그래서 그는 로마 교회의 감독들을 리노와 아나클레투스와 클레멘스부터 당대의 엘레우테리우스까지 하나하나 세고 3.3.3, 폴리캅과 에베소 교회를 사도 전승의 증인으로 세웁니다 3.3.4. 사도들은 부자가 은행에 재산을 맡기듯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교회에 맡겼으니, 누구든 거기서 생명의 물을 길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3.4.1. 글을 모르는 야만족 신자들도 종이와 먹 없이 성령께서 마음에 써 주신 구원을 지니고 옛 전승을 지킨다고 그는 말합니다 3.4.2. 바울도 고린도의 성도들을 두고 "너희는 우리의 사역을 통하여 분명히 드러난 그리스도의 서신인데 이것은 잉크로 쓴 것이 아니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육체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고후 3:3).

이 장들의 한 문장은 오래도록 논쟁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이레나이우스는 베드로와 바울이 세운 로마 교회를 사도 전승의 본보기로 들면서, 그 뛰어난 권위 때문에 모든 교회가 이 교회와 뜻을 같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3.3.2. 헬라어 원문은 사라지고 라틴어로만 남은 이 문장의 동사는 뜻을 같이한다는 뜻으로도, 사방에서 찾아와 모인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가톨릭 교회는 이 대목을 로마 교회의 수위권과, 사도들에게서 이어지는 감독(가톨릭 교회의 말로는 주교)의 계승에 대한 이른 증언으로 읽습니다. 정교회는 사도 계승을 귀하게 지키면서도, 그가 로마와 나란히 서머나와 에베소를 증인으로 세운 데 주목해 로마의 자리를 교회들 가운데 영예의 첫 자리로 이해합니다. 많은 개신교인은 그가 말한 전통이 성경 곁의 또 다른 근원이 아니라 사도들이 전파하고 성경에 기록한 같은 신앙이었으며, 감독 명단은 그 가르침이 공개적으로 이어졌다는 증거였다고 읽습니다. 이레나이우스 자신도 190년 무렵 로마의 감독 빅토르가 부활절 날짜 문제로 소아시아 교회들과의 사귐을 끊으려 하자, 편지를 보내 평화를 지키라고 권했습니다. 에우세비우스는 그가 평화라는 말에서 온 자기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었다고 전합니다. 두 전통의 차이는 가톨릭과 개신교는 무엇이 다른가?에서 더 다룹니다.

둘째 아담, 살아 있는 사람

이레나이우스의 가장 깊은 생각은 흔히 ‘총괄 갱신’이라 부르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은 바울이 하나님의 경륜을 말한 구절에서 왔습니다.

친히 자신 속에서 작정하신 자신의 선하신 기쁨에 따라 자신의 뜻의 신비를 우리에게 알려 주셨으니 이것은 충만한 때의 경륜 안에서 친히 모든 것 즉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곧 그분 안에서 다 함께 하나로 모으려 하심이라.

엡 1:9-10

‘통일되게 하다’로 옮긴 헬라어 아나케팔라이오오마이(ἀνακεφαλαιόομαι)는 흩어진 것을 하나로 모아 요약한다는 뜻입니다. 이레나이우스는 이렇게 풉니다. 처음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신 말씀이 사람이 되셨을 때, 그분은 인류의 긴 줄을 자기 안에서 새로 시작하시고 구원을 간추려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담 안에서 잃은 것, 곧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있는 것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되찾게 되었습니다 3.18.1.

그 중심에는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구가 있습니다. 처녀지 흙으로 빚어진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듯, 동정녀에게서 나신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되어 구원을 받아야 했다고 그는 말합니다 3.18.7. 바울의 말 그대로입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로운 자가 되리라." (롬 5:19). 5권에서 이 대구는 나무에까지 이릅니다. 처음에 나무 때문에 생긴 불순종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나무 위의 순종으로 바로잡으셨다는 것입니다 5.16.3.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야 했을까요? 사람이 사람의 원수를 이기지 않았다면 원수는 정당하게 패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구원을 값없이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것을 굳게 지닐 수 없으며,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 되지 않았다면 썩지 않음에 참여할 수 없었으리라고 그는 답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둘 모두에게 속하셔야 했고, 그분은 사람의 삶의 모든 단계를 지나시며 모두를 하나님과의 사귐으로 되돌리셨습니다 3.18.7.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겉모습으로만 고난받으셨다는 가르침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주께서 참으로 고난받지 않으셨다면,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그분의 부르심을 받아 고난을 견디는 제자들을 그분이 속이신 셈이 된다는 것입니다 3.18.6. 몇 해 전 순교자들을 떠나보낸 리옹 교회의 감독에게 이것은 이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모읍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신 것은, 사람이 말씀과 하나 되어 양자됨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3.19.1.

이 문장은 전통마다 조금씩 다른 빛으로 읽힙니다. 정교회는 여기서 사람이 은혜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테오시스’(theosis), 곧 신화(神化)의 이른 증언을 봅니다. 가톨릭 교회도 교리서에서 이 문장을 인용하며, 말씀이 사람이 되신 까닭을 "그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나니 이것은 너희가 이 약속들을 힘입어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라는 말씀으로 설명합니다 (벧후 1:4). 많은 개신교인은 같은 문장을 양자 됨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풀며,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것은 "이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시고 또 우리가 아들로 입양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과 함께 읽습니다 (갈 4:5). 어느 전통도 사람이 본성으로 하나님이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은 그대로 남고, 사람은 은혜로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습니다.

4권 20장은 같은 진리를 하나님을 뵙는 일로 풉니다. 하나님은 천사나 낮은 권세를 시켜 세상을 지으신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함께 계신 말씀과 지혜, 곧 아들과 성령으로 친히 지으셨습니다. 이레나이우스는 이 둘을 하나님의 ‘손’이라 부릅니다 4.20.1. 그 크심으로는 아무도 하나님을 알 수 없지만, 그 사랑으로는 만물을 지으신 말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언제나 알려지십니다 4.20.4. 빛을 보는 이가 빛 안에 있어 그 밝음을 나누듯, 하나님을 보는 이는 하나님 안에 있어 생명을 받습니다 4.20.5.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사람이요,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을 뵙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4.20.7. 이 말은 흔히 앞 절반만 떼어 인용되지만, 그에게 사람이 참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뵙는 일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도 "마음이 순수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요"라고 하셨습니다 (마 5:8).

5권의 장들은 이 모든 것을 몸에 묶습니다. 우리의 선생이신 말씀이 사람이 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배울 길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자기 피로 우리를 속량하시되, 우리를 부당하게 사로잡은 세력에게서 폭력이 아니라 설득으로 우리를 되찾으셔서 정의를 어기지 않으셨습니다 5.1.1. 그리스도를 그저 요셉의 아들로 본 에비온파에게 그는 하나님과 사람의 결합을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마지막 때에 아버지의 손이 살아 있는 사람을 빚으셔서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다시 지어지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5.1.3.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지만 그 형상의 원본이신 말씀이 아직 보이지 않으셨기에 닮음을 쉽게 잃었고, 말씀이 육신이 되셨을 때 참 형상을 보여 주시고 닮음을 굳게 회복하셨다는 것입니다 5.16.2. 그는 ‘형상’과 ‘모양’을 구별해 읽었는데, 정교회 전통은 이 구별을 이어받아 모양을 성령 안에서 자라 가야 할 하나님 닮음으로 보고, 칼뱅을 비롯한 많은 개신교 해석자는 두 말을 같은 것을 거듭 말하는 히브리어 표현으로 봅니다. 교리 과정의 하나님의 형상 과에서 더 다룹니다.

마지막 장은 새 창조를 바라봅니다. 하나님은 피조 세계의 본질을 없애지 않으시며, 지나가는 것은 바울이 말한 이 세상의 형적뿐입니다 (고전 7:31).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사람은 늘 새롭게 하나님과 사귑니다 5.36.1. 이레나이우스는 사도들의 제자인 장로들의 말을 빌려, 구원받은 이들이 성령을 통해 아들에게, 아들을 통해 아버지께 올라가며, 아들이 마침내 자기 일을 아버지께 돌려드려 하나님이 만유 안에 계시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5.36.2. 여기서 그는 의인들의 부활과 땅 위의 나라도 기대합니다 5.36.3. 그는 파피아스, 유스티누스와 함께 재림 뒤 새롭게 된 땅에서 의인들이 다스리리라고 보았고, 오늘 역사적 전천년설을 따르는 이들은 그를 앞선 증인으로 여깁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서방 교회의 대부분은 요한계시록 20장의 천 년을 교회의 시대로 읽었고, 오늘 복음주의 안에도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휴거와 천년왕국은 무엇인가?).

이 책을 잘 읽으려면

먼저 이 책이 논쟁의 책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레나이우스는 상대를 반박하려고 그들의 가르침을 소개하므로, 아이온이나 플레로마 같은 낯선 이름이 예고 없이 나옵니다. 발렌티누스파는 서른 아이온이 가득한 ‘플레로마’(충만)라는 위 세계를 그리고, 그 가운데 길을 잃은 한 아이온의 생각이 그들 자신과 이 세상을 지은 낮은 창조자의 어머니가 되었다고 가르쳤습니다 1.10.3. 그 신화를 다 알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그것을 왜 거부하는지, 곧 이 세상을 지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라는 것만 붙들면 됩니다.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문서들 덕분에 오늘 학자들은 그의 설명을 영지주의자들 자신의 글과 견주어 볼 수 있고, 그가 반대편의 눈으로 썼다는 것을 기억하며 읽습니다.

그의 말은 때로 거칩니다. 그는 맞수들을 미끄러운 뱀에 견주고, 폴리캅이 마르키온을 사탄의 맏아들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를 칭찬하며 전합니다 3.3.4. 진리를 지키려는 열심이지만, 오늘의 독자는 그 날카로움을 흉내 내기보다 그가 함께 남긴 말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오류에 빠진 영혼이 돌이키기는 쉽지 않아도, 진리를 곁에 가져다 놓으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반박의 목적이 그들을 진리로 돌이키는 데 있다고 밝힙니다 3.2.3. 이단을 분별하는 일은 이단은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에서 더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성경 읽기는 담대합니다. 그는 선지자들의 환상과 삶 속에서 오실 말씀을 보고, 라합이 숨긴 정탐꾼을 셋으로 세어 그들에게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그림자를 읽기까지 합니다 4.20.12. 여호수아서에는 정탐꾼이 두 사람으로 나오니 (수 2:1), 이런 대목은 그의 예표 묵상으로 읽으면 됩니다. 또 그는 니케아 공의회보다 140여 년 앞서 쓴 사람이어서, 잠언 8장의 지혜를 뒷날 교부들 대부분과 달리 성령으로 읽습니다 4.20.3. 뒤에 정리될 말들이 아직 자리 잡기 전이지만, 아들과 성령이 창조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는 고백은 이미 분명합니다.

처음 읽는 이라면 1.10.1과 4.20.7에서 시작해, 총괄 갱신의 논증이 모이는 3.18.7에서 천천히 머물기를 권합니다. 그는 거의 한 문장마다 성경을 인용하니 성경을 곁에 펴 두면 좋습니다. 2세기의 사람이지만 그가 붙든 것은 오늘 모든 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이 곧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말씀은 참 육신이 되셨으며, 몸까지 포함한 사람 전체가 구원받습니다. 그래서 다섯 권의 마지막 문장은 창세기 첫 장의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이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가축과 온 땅과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을 지배하게 하자, 하시고

창 1:26

출처

  1. 이레나이우스, 이단 반박 읽기

차례

싣지 않은 부분: 다섯 권 가운데 교회의 신앙과 사도 전승, 총괄 갱신, 부활을 다룬 장만 싣습니다. 1권의 이단 설명 대부분과 2권 전체는 싣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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