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 · 397–400년
영어 본문: E. B. 퓨지 영역(1838) ·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 우리말은 이 영어 본문에서 옮겼습니다.
해설
『고백록』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방황하던 젊은 날과 하나님께 돌아온 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써서, 죄의 고백과 찬양의 고백을 한 목소리에 담은 책입니다.
감독이 돌아본 젊은 날
아우구스티누스는 354년 북아프리카의 작은 도시 타가스테(오늘날 알제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모니카는 믿음이 깊고 기도를 쉬지 않는 그리스도인이었고,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아들의 공부를 밀어주었으나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생애 끝 무렵이었습니다. 총명한 아들은 수사학 교사가 되었고, 아홉 해 동안 마니교도로 지냈으며, 출세의 길을 따라 로마를 거쳐 밀라노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서 386년에 회심한 그는 이듬해 부활절에 밀라노의 감독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프리카로 돌아간 그는 391년 히포에서 회중의 간청에 못 이겨 장로가 되었고, 390년대 중반 그곳의 감독이 되어 43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섬겼습니다. 그의 생애와 가르침 전체는 신학 과정의 아우구스티누스: 은혜의 박사 과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고백록』은 그가 감독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397년 무렵, 마흔을 조금 넘긴 나이에 쓰기 시작한 책입니다. 그는 세례를 받고 어머니를 떠나보내기까지의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썼을까요? 그는 책 안에서 답합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 알려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와 같은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이며, 읽는 이마다 우리가 얼마나 깊은 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2.3.5. 그 말 뒤에는 시편 기자의 부르짖음이 있습니다.
오 주여, 내가 깊음들 속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시 130:1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 그는 평생 쓴 글을 하나하나 되짚은 『재론고』(Retractationes, 『재고록』으로도 옮깁니다)에서 이 열세 권을 짧게 요약했습니다. 자신의 악한 일과 선한 일을 두고 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읽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께로 일으키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열세 권으로 드린 기도
『고백록』을 펴는 사람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 책이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책은 ‘주님, 주님은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받으실 분이십니다’라는 찬양으로 열립니다 1.1.1. 시편의 노래를 그대로 이어받은 첫 문장입니다.
주께서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지어다. 그분의 위대하심은 헤아릴 수 없도다.
시 145:3
그때부터 마지막 쪽까지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에 관해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 말합니다. 독자는 그 기도를 곁에서 엿듣는 셈입니다. 라틴어 ‘콘페시오’(confessio)는 잘못을 털어놓는 일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과 믿음을 고백하는 일도 뜻하는데, 그는 이 셋을 한꺼번에 합니다. 죄를 떠올리면 그 죄를 참아 주신 자비를 찬양하고, 받은 선물을 떠올리면 그것을 그릇 쓴 일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첫 장에서 책 전체를 꿰는 실을 내보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주님을 위하여 지으셨으므로, 우리 마음은 주님 안에서 쉬기까지는 안식이 없습니다’ 1.1.1.
열세 권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9권은 갓난아기 때부터 387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까지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10권은 글을 쓰는 지금으로 돌아와, 기억이 무엇인지 살피고 감독이 되어서도 겪는 유혹을 고백합니다. 11–13권은 창세기 첫 장을 묵상하며 시간과 영원, 창조와 교회를 다룹니다. 이 갑작스러운 전환은 오래도록 독자들의 물음거리였는데, 많은 학자는 한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이야기를 하나님에게서 나와 하나님 안에서 쉼을 얻는 온 창조의 이야기 안에 놓은 것으로 읽습니다. 성경 밖의 책 가운데 이만큼 여러 전통의 그리스도인에게 오래 사랑받은 책은 드뭅니다.
여기에 실린 것은 그 가운데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는 다섯 권입니다. 어린 시절의 1권, 열여섯 살에 배를 훔친 일을 고백하는 2권, 악이 어디서 오는가를 두고 씨름한 7권, 밀라노의 정원에서 일어난 회심을 들려주는 8권, 세례와 어머니의 죽음을 담은 9권입니다. 이 다섯 권은 쉼 없는 마음이 쉼을 얻기까지의 길을 따라갑니다. 죄를 그 뿌리에서 보고,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그림에서 생각이 풀려나고, 사슬에 묶인 의지가 자유를 얻고, 교회 안에서 새 삶이 시작됩니다.
빠진 부분도 많습니다. 3–6권에는 카르타고의 학창 시절, 열아홉 살에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지혜를 사랑하게 된 일, 악을 빛과 싸우는 어둠의 실체로 설명하던 마니교에 머문 세월, 가까운 친구의 죽음, 로마와 밀라노로 옮겨 간 일, 그리고 구약을 새롭게 열어 준 암브로시우스의 설교가 나옵니다. 10권에는 너무 늦게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탄식이, 11권에는 시간에 관한 이름난 성찰이 있습니다. 2권에서 7권으로 건너갈 때 그 사이에 열다섯 해 남짓한 세월이 있었음을 기억하면 좋습니다.
배나무에서 정원까지
1권과 2권에서 그가 고백하는 죄는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말도 못 하면서 젖형제를 질투로 노려보는 갓난아기에게서 본 자기 모습 1.7.11, 베르길리우스의 시에 나오는 디도의 죽음에는 울면서도 ‘주님을 사랑하지 않은 탓에 맞는 자기 죽음에는 울지 않는’ 소년 1.13.21, 그리고 한밤에 친구들과 집 포도밭 가까이 있던 배나무를 턴 일입니다. 그는 그 배를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몇 개 맛만 보고 나머지는 돼지에게 던졌습니다. 그가 사랑한 것은 배가 아니라 잘못 그 자체였고, 그는 스스로 망하기를 사랑했다고 고백합니다 2.4.9.
이 작은 일에서 그는 죄가 무엇인지 봅니다. 죄는 사랑의 질서가 무너진 것, 곧 하나님이 지으신 낮은 선들을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2.5.10. 죄는 하나님을 비뚤게 흉내 내기까지 합니다. 배를 훔친 그는 금지된 일을 벌 받지 않고 해치우며 불구가 된 자유를 누려 보는 죄수와 같았고, 그렇게 하나님의 전능을 어둡게 닮아 보려 했다는 것입니다 2.6.14. 바울도 사람들이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자보다 창조물을 더 경배하고 섬겼느니라. 그분은 영원히 찬송 받으실 분이시로다. 아멘."고 진단합니다 (롬 1:25). 이 생각은 교리 과정의 원죄와 그 결과 과에서 더 이어집니다.
7권은 그 밑에 있는 물음, 곧 악은 어디서 오는가를 묻습니다 7.5.7. 마니교는 서로 싸우는 두 실체로 답했는데, 그렇게 보면 죄는 온전히 내 탓이 아니게 됩니다. 그를 이 생각에서 풀어 준 것은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옮긴 플라톤주의자들의 책이었습니다 7.9.13. 8권에서 그는 이 책들을 옮긴 이가 로마의 이름난 수사학자 빅토리누스였다고 밝히지만 8.2.3, 어떤 글이었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많은 학자는 플로티노스의 글 몇 편과, 아마도 그 제자 포르피리오스의 글이 들어 있었으리라고 봅니다. 그 책들에서 그는 하나님을 공간에 끝없이 퍼져 있는 무엇이 아니라 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웠고, 악은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있는 것은 모두 선하며 7.12.18, 악은 선이 모자란 것이고, 죄악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등지고 낮은 것들로 기울어진 의지의 뒤틀림이라는 것입니다 7.16.22.
그러나 그 책들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없었습니다. 태초에 계신 말씀에 관해서는 말은 달라도 같은 뜻을 거기서 읽었지만,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것은 읽지 못했다고 그는 말합니다 7.9.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철학자들은 먼 산꼭대기에서 평화의 땅을 바라보게 할 수는 있었지만 그리로 가는 길은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7.21.27. 그 길은 한 분이십니다. 바울은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고 말하는데 (딤전 2:5),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중보자를 붙들기까지 하나님을 누릴 힘을 얻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7.18.24. 그 뒤 바울 서신을 읽으며 그는 플라톤주의자들에게서 본 참된 것을 모두 은혜를 찬양하는 말씀 가운데서 다시 찾았습니다. 그 한가운데에 "누가 너를 다른 사람과 구별되게 하느냐? 네가 가진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이제 네가 그것을 받았을진대 어찌하여 그것을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라는 물음이 있습니다 (고전 4:7). 훗날 그가 회고하기로는, 『고백록』을 쓰기 얼마 전 감독이 된 첫 무렵에 8권에 나오는 바로 그 심플리키아누스의 물음에 답하는 글을 쓰다가, 이 구절로 믿음까지도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도의 예정.
8권에 이르면 그의 생각은 이미 설득되었습니다. 이제 바라는 것은 하나님을 더 확실히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더 굳게 서는 것이었다고 그는 말합니다 8.1.1. 싸움은 의지에서 벌어집니다. 비뚤어진 의지가 정욕을 낳고, 정욕을 따르다 보니 습관이 되고, 습관을 거스르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 되어, 그 고리들이 사슬처럼 그를 묶었습니다 8.5.10. 젊은 날 그는 정결을 달라고 기도하면서도 그 기도가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랐다고 털어놓습니다 8.7.17. 플라톤주의자들의 책을 옮긴 바로 그 빅토리누스가 늘그막에 로마에서 모든 사람 앞에 그리스도를 고백한 이야기 8.2.5와 이집트의 수도사 안토니우스의 이야기는 그를 부끄럽게 했고, 한 영혼 안에서 두 의지가 싸웠습니다.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무화과나무 아래 엎드려 울던 그는 이웃집에서 소년인지 소녀인지 모를 아이가 ‘톨레 레게’(tolle, lege), 곧 집어서 읽으라고 되풀이해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8.12.29. 그는 이것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 바울 서신을 펴고, 처음 눈에 들어온 말씀을 읽었습니다.
낮에 하듯이 우리가 정직하게 걸으며 흥청거리거나 술 취하지 말고 침실을 더럽히거나 방탕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자. 오직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육신에게 기회를 주지 말라.
롬 13:13-14
그는 더 읽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문장이 끝나자 평온의 빛 같은 것이 마음에 부어져 의심의 어둠이 모두 사라졌다고 그는 씁니다 8.12.29. 9권은 일어난 일을 이렇게 풉니다. 자기가 원하던 것을 원하지 않게 되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원하게 된 것, 그 모두가 주님의 선물이었다는 것입니다 9.1.1.
이 이야기는 몇 해 뒤 은혜를 둘러싼 논쟁의 한가운데 놓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훗날 전하는 바로는, 로마에서 한 감독이 10권의 짧은 기도, 곧 명하시는 것을 주시고 원하시는 것을 명하시라는 기도를 인용하자 그 자리에 있던 펠라기우스가 참지 못하고 거세게 반박했다고 합니다. 도덕적 책임을 무겁게 여긴 그에게는 이 기도가 사람이 힘써야 할 몫을 가볍게 여기는 말로 들렸던 듯합니다. 은혜가 아우구스티누스를 앞서갔다는 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동의하지만, 그 은혜를 설명하는 방식은 전통마다 다릅니다.
개혁교회는 『기독교 강요』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끊임없이 인용한 칼뱅을 따라, 은혜가 원하는 마음을 돕는 데 그치지 않고 원하지 않던 마음을 새롭게 하여 기꺼이 돌아서게 한다고 읽습니다. 한때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사였던 루터는 구원에 관해서는 하나님이 풀어 주시기까지 사람의 의지가 묶여 있다고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논증했습니다 루터, 노예 의지론. 아우구스티누스를 교회 박사로 기리는 가톨릭 교회는 은혜가 의지를 고치고 풀어 주며, 자유를 얻은 의지가 참으로 동의하고 협력한다고 가르칩니다. 웨슬리 전통은 은혜가 언제나 먼저라는 데 동의하면서, 그 선행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미쳐 의지를 깨우므로 사람은 응답할 수도 거절할 수도 있다고 가르칩니다 웨슬리, 성경적 구원의 길. 정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기리면서도 은혜와 사람의 자유가 함께 일한다고 말하며, 많은 정교회 신학자는 아담에게서 물려받는 것을 죄책보다는 죽음과 상처 입은 본성으로 설명합니다. 복음주의 안의 여러 견해는 은혜와 선택 과에서 나란히 볼 수 있습니다.
세례, 그리고 어머니 모니카
9권은 한결 고요합니다. 그는 포도 수확기 방학을 기다려 교수직을 내려놓고, 가족과 벗들을 데리고 친구 베레쿤두스가 내준 카시키아쿰의 시골집으로 물러갑니다 9.3.5. 밀라노 북쪽의 시골로 짐작되지만 정확한 자리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시편을 읽으며 하나님을 향해 타오릅니다 9.4.8. 387년 부활절에는 벗 알리피우스,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세례를 받고, 밀라노 교회의 찬송을 들으며 울었습니다 9.6.14.
그 뒤 아프리카로 돌아갈 배를 기다리던 오스티아에서, 그와 어머니는 정원이 내다보이는 창가에 기대어 성도들이 누릴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했습니다. 두 사람은 생각 속에서 지어진 모든 것을 넘어 올라가, 한순간 온 마음을 다해 영원한 지혜에 살짝 닿았다고 그는 씁니다 9.10.24. 닷새쯤 지나 모니카는 열병에 걸렸습니다. 어머니는 몸은 어디에 묻어도 좋으니 어디에 있든지 주의 제단에서 자기를 기억해 달라는 부탁 하나만 남겼습니다 9.11.27. 모니카는 나이 쉰여섯째 해에, 병이 난 지 아흐레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아들은 서른셋째 해를 살고 있었습니다 9.11.28.
장례 때 눈물을 참던 그는 혼자 남은 뒤에야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리고 여러 해 동안 자기를 위해 울어 준 어머니를 위해 잠시 운 것을 누구도 비웃지 말고, 차라리 자기 죄를 위해 하나님께 울어 달라고 독자에게 청합니다 9.12.33. 그리스도인의 슬픔은 금지된 것이 아니라 소망이 있는 슬픔입니다. 바울은 "그러나 형제들아, 잠자는 자들에 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것은 너희가 아무 소망 없는 다른 사람들 같이 슬퍼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살전 4:13). 슬픔을 지나는 이에게는 슬픔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가?도 도움이 됩니다.
9권은 그가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고,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주의 제단에서 모니카와 파트리키우스를 기억해 달라고 청하며 끝납니다 9.13.37.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는 여기서 성찬 가운데 세상을 떠난 이를 위해 기도하던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보고 그 전통을 이어 갑니다. 가톨릭 교회는 이것을 연옥 교리의 오랜 뿌리 가운데 하나로 여깁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이 이를 가르치지 않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는 이미 주와 함께 있다고 보아 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예배에서 거두었고, 많은 개신교인은 이 대목을 아들의 사랑과 그 시대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는 증언으로 읽습니다. 어느 쪽에서 읽든 아우구스티누스가 소망을 어디에 두었는지는 분명합니다. 사람이 자기 공로라고 내세우는 것도 결국 하나님이 주신 선물일 뿐이며 9.13.34, 고소하는 자 앞에서 어머니는 자기에게 빚이 없다고 대답하지 않고, 아무 빚도 없으면서 우리를 위해 값을 치르신 그분께 죄를 용서받았다고 대답하리라는 것입니다 9.13.36. 이 문제는 죽음과 중간 상태 과에서 더 다룹니다.
이 책을 잘 읽으려면
먼저 기도로 읽으십시오. 아우구스티누스는 다른 사람들이 엿듣고 함께 기도하도록 이 책을 썼습니다. 그러니 한 번에 한 장씩, 천천히, 때로는 소리 내어 읽으면 좋습니다. 그의 문장에는 성경, 특히 시편이 따로 표시도 없이 촘촘히 엮여 있어서, 성경처럼 들리는 구절은 대개 성경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드리는 물음이 나의 물음이 되게 하십시오.
또 이 책이 무엇이 아닌지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책은 모든 것을 털어놓는 오늘날의 회고록이 아닙니다. 그는 찬양에 쓰일 일을 골라 이야기하고, 열 해도 더 지난 일을 성경의 빛 아래에서 풀어 읽습니다. 정원에서 드린 기도를 전하면서도 꼭 그 말은 아니었지만 그런 뜻으로 기도했다고 밝힙니다 8.12.28. 학자들은 그의 이야기가 얼마나 문학적으로 다듬어졌는지를 두고 의견이 갈리지만, 그 정원에서 그의 삶을 바꾼 일이 일어났다는 데에는 거의 이견이 없습니다.
어려운 대목도 있습니다. 7권에서 마니교와 점성술을 반박하는 논증은 처음 읽을 때 가볍게 지나가도 괜찮습니다. 대신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변하지 않는 빛을 본 7.10.16과 중보자 그리스도를 만나는 7.18.24에서는 천천히 머무십시오. 아픈 대목도 있습니다. 그는 열 해 넘게 한 여인과 살며 아들 아데오다투스를 낳았지만 끝내 그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출세에 걸맞은 혼인이 정해지자 그 여인은 그의 곁에서 떼어져 아프리카로 돌아갔고, 다른 남자를 알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서원했습니다(6권). 그는 이 일을 아픔과 함께 고백하지만, 오늘의 독자는 그녀가 겪은 부당함을 먼저 느낍니다. 그의 회심은 결혼까지 내려놓는 길이었습니다 8.12.30.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는 그가 택한 독신의 삶을 귀한 소명으로 기리고, 결혼을 거룩한 소명으로 존중해 온 개신교인들은 성적 욕망을 바라보는 그의 경계가 성경보다 지나쳤다고 보는 일이 많습니다.
이야기는 오스티아의 무덤가에서 멈추지만, 이 책은 슬픔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첫 장의 쉼 없는 마음은 사람이 되신 말씀 안에서 쉼을 찾았습니다. 그는 플라톤주의자들의 책 어디에서도 수고하는 이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7.21.27. 복음서에서 우리는 그 음성을 듣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 위에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마 11:28-29
출처
차례
싣지 않은 부분: 13권 가운데 1, 2, 7, 8, 9권을 싣습니다. 3–6권과 10–13권은 싣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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