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복음주의와 선교, 그리고 한국
1792년 윌리엄 캐리의 호소로 시작된 근대 선교 운동은 19세기에 복음을 온 세계로 실어 날랐습니다. 영국과 미국에서 설교자와 신학자들이 복음과 성경의 권위를 붙드는 동안, 한국에는 선교사보다 한글로 옮긴 성경이 먼저 들어왔고 1885년 부활절에 선교사들이 제물포에 닿았습니다.
캐리와 근대 선교 운동
종교개혁 뒤 개신교회는 오랫동안 먼 나라 선교에 큰 힘을 쏟지 못했습니다. 모라비아 형제단 같은 예외도 있었지만, 대위임령은 사도들에게 주어진 명령이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잉글랜드 중부의 구두 수선공이자 침례교회 목사였던 윌리엄 캐리(1761–1834)는 이 생각에 맞섰습니다. 그는 1792년의 소책자에 세계 여러 민족과 종교를 조사한 표를 싣고, 주님의 명령이 오늘의 교회에도 그대로 주어졌다고 논증했습니다 캐리, 이교도 개종 수단 탐구.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능이 내게 주어졌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며 무엇이든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의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하시니라. 아멘.
마 28:18-20
캐리는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이 오늘의 교회에 주어졌다면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도 그러하다고 보았습니다. 같은 해 그는 이사야 54장의 "네 장막 터를 넓히며 그들이 네 처소의 휘장들을 널리 펼치게 하라. 아끼지 말고 네 줄을 길게 하며 네 말뚝을 강하게 하라."라는 말씀으로 (사 54:2) 설교하며, 하나님께 큰일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하자고 외쳤다고 전해집니다. 그해 10월 침례교 목사들이 선교회를 세웠고, 이듬해 캐리는 가족과 함께 인도로 떠났습니다.
인도에서 그는 오랜 열매 없음과 어린 아들의 죽음, 아내의 깊은 병을 견뎌야 했습니다. 1800년부터는 동료들과 세람포르에서 일하며 벵골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로 성경을 옮기고 학교를 세웠고, 남편을 잃은 여인을 남편의 장작더미 위에서 함께 태우던 관습에 반대했습니다. 그는 끝내 영국에 돌아가지 않고 인도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캐리 뒤로 선교회들이 잇달아 생겼습니다. 1795년 여러 교파가 함께 세운 런던 선교회는 남태평양과 아프리카와 중국으로 사람을 보냈고, 중국에 간 첫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도 이 선교회 사람이었습니다. 영국의 허드슨 테일러(1832–1905)는 해안 도시를 넘어 중국 내륙으로 가려고 1865년 중국 내지 선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는 교파를 가리지 않고 선교사를 받았고, 후원금을 직접 요청하지 않고 기도로 구했으며, 동료들과 함께 중국 옷을 입고 머리를 땋아 서양 사람의 모습이 복음을 가리지 않게 하려 했습니다.
이 운동을 움직인 것은 듣지 못한 이들을 향한 사랑과 바울의 물음이었습니다. "그런즉 그들이 자기들이 믿지 아니한 분을 어찌 부르리요? 자기들이 듣지 못한 분을 어찌 믿으리요? 선포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어지지 아니하였으면 그들이 어찌 선포하리요? 이것은 기록된바, 화평의 복음을 선포하며 좋은 일들의 반가운 소식을 가져오는 자들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함과 같으니라." (롬 10:14-15). 매튜 헨리는 이 대목을 이렇게 풉니다. "신적 구주이신 주 예수에 대하여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분을 부를 수 있겠습니까? …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어야 했던 것은 필연이었습니다. 누군가가 그들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보여 주어야 합니다" 매튜 헨리. 듣지 못한 이들에 대한 물음은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에서 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영국과 미국의 설교자와 신학자
런던의 찰스 스펄전(1834–1892)은 이 세기에 가장 널리 알려진 설교자였습니다. 열다섯 살 때 눈 오는 주일, 작은 감리교 예배당에서 "땅의 모든 끝이여, 나를 바라보라. 그리하여 너희는 구원을 받을지어다. 나는 하나님이요,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느니라."는 말씀을 (사 45:22) 듣고 그리스도께 돌아섰고,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런던에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칼뱅주의 침례교 목사였던 그의 설교는 해마다 책으로 묶여 여러 나라 말로 옮겨졌고, 그는 목회자 학교와 고아원을 세웠습니다. 말년에는 교단 안에서 성경의 권위와 속죄의 가르침이 흐려진다고 경고하며 침례교 연맹을 떠났습니다.
미국의 D. L. 무디(1837–1899)는 시카고의 구두 판매원이었다가 주일학교와 YMCA 일을 거쳐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안수받은 목사가 아니었던 그는 1873년부터 찬양 사역자 아이라 생키와 함께 영국을 돌며 큰 집회를 열고, 하나님의 사랑과 거듭남을 쉬운 말로 전했습니다. 1886년 그가 연 여름 학생 수련회에서 많은 대학생이 해외 선교에 헌신하기로 서약했고, 이것이 학생 자원 운동의 시작이 되어 수많은 젊은이를 선교지로 보냈습니다.
신학에서는 프린스턴 신학교가 개혁 신앙의 보루가 되었습니다. 찰스 하지(1797–1878)는 반세기 넘게 그곳에서 가르치고 1872–1873년 『조직신학』을 펴냈습니다 찰스 하지, 조직신학. 그는 자연 과학자가 자연의 사실들을 모아 정리하듯 신학자는 성경에 담긴 사실들을 모아 정리한다고 보았습니다. 앞 과에서 본 역사 비평이 성경의 권위를 흔들자, 그의 아들 A. A. 하지와 B. B. 워필드는 1881년의 글 「영감」에서 성경이 원본에서 성령의 영감으로 오류 없이 기록되었다고 변호했습니다 A. A. 하지·B. B. 워필드, 영감. 그들은 바울이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한 말씀에 (딤후 3:16) 기대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은 헬라어로 , 곧 하나님이 숨을 내쉬셨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기록자들의 인격과 문체를 지우지 않고 쓰시면서도 그 말씀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셨다고 보았고, 이 성경관은 20세기 복음주의의 큰 뿌리가 되었습니다.
한국: 말씀이 먼저 오다
한국 개신교의 이야기는 선교사보다 성경이 먼저 들어온 데서 시작됩니다. 만주에서 일하던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존 로스(1842–1915)는 동료 존 매킨타이어와 함께, 국경을 오가던 의주 사람 이응찬, 서상륜, 백홍준 같은 한국인 조력자들과 성경을 한글로 옮겼습니다.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먼저 나왔고, 1887년에는 신약 전체가 『예수셩교젼셔』로 나왔습니다 로스 외, 예수셩교젼셔. 첫 번역들의 정확한 제목과 해는 자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전해집니다.
서상륜 같은 권서들은 이 성경을 품고 위험을 무릅쓰며 국경을 넘었습니다. "그러므로 널리 흩어진 사람들이 각처로 다니며 말씀을 선포하니라."라는 말씀처럼 (행 8:4) 그들은 고향 마을과 서울에 말씀을 전했고, 황해도 소래에는 한국인들이 스스로 모인 신앙 공동체가 생겼다고 전해집니다. 일본에서는 그곳에서 세례를 받은 이수정이 마가복음을 옮겼고, 선교사들이 이 책을 들고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왔을 때 이미 말씀을 읽고 세례를 기다리는 한국인들이 있었습니다.
1882년 조선이 미국과 조약을 맺으면서 길이 열렸습니다. 1884년 의료 선교사 호러스 알렌이 먼저 들어왔고,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는 미국 북장로교의 호러스 언더우드(1859–1916)와 미국 북감리회의 헨리 아펜젤러(1858–1902)가 함께 제물포에 닿았습니다. 두 사람은 1887년 각각 새문안교회와 정동교회를 세웠고, 학교를 열고 성경 번역에 힘을 모았습니다. 아펜젤러는 1902년 성경 번역 회의에 가던 길에 배가 가라앉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교사들은 한문 대신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한글로 성경과 전도 책자를 펴냈고, 많은 이는 이것이 한글이 널리 읽히는 데도 이바지했다고 평가합니다. 감리교회의 뿌리는 이 과정의 웨슬리와 감리교 운동 과에서 보았습니다.
1890년에는 중국 산둥에서 일하던 미국 장로교 선교사 존 네비우스(1829–1893)가 서울을 찾아 자기의 선교 원칙을 소개했습니다 네비우스, 선교 교회의 설립과 발전. 교회는 스스로 전하고, 스스로 다스리고, 스스로 살림을 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삼자’ 원칙은 앞서 영국과 미국의 선교 지도자들도 말한 것이었지만, 한국의 장로교 선교사들은 그해 이를 받아들이고 사경회, 곧 성경 공부 모임을 그 한가운데 두었습니다. 신자들은 제 일터에 머물며 이웃에게 말씀을 전했고, 교회는 제 손으로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그 뒤 장로교회가 자라 간 이야기는 개혁주의 신앙 과정의 한국의 장로교회 과에서 다룹니다.
사랑의 수고와 시대의 한계
이 세기의 선교사들은 많은 것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많은 이가 풍토병으로 쓰러지거나 자녀를 잃었고, 1900년 중국의 의화단 사건 때는 많은 선교사와 훨씬 더 많은 중국인 그리스도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낯선 말을 배워 성경을 옮기고 학교와 병원을 세웠습니다. 그 수고의 뿌리는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한계도 정직하게 보아야 합니다. 19세기 선교는 서구 열강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힘을 넓히던 때와 겹쳤습니다. 중국에서는 아편 전쟁 뒤 맺은 불평등 조약이 선교사의 활동을 보장했고, 선교사 가운데는 서양 문명을 복음과 거의 같은 것으로 여기거나 현지 사람들을 낮추어 본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로 비치기도 했습니다. 한편 캐리는 과부를 태우는 관습에, 테일러는 아편 무역에 맞섰고, 네비우스의 원칙은 선교사가 아니라 현지 신자들이 이끄는 교회를 세우려 했습니다. 무엇보다 한국에서는 선교사가 오기 전에 한국인들이 먼저 말씀을 읽고 전했습니다.
복음은 서양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시아의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고, 요한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어린 양 앞에 선 것을 보았습니다 (계 7:9). 이 물음은 기독교는 서양 종교인가?에서 더 다룹니다. 이 과정은 1900년 무렵에서 멈추지만, 이야기는 1907년 평양의 큰 회개 운동으로 이어집니다.
연습
- 연습 1 / 8
윌리엄 캐리가 1792년의 소책자에서 논증한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2 / 8
허드슨 테일러가 세운 중국 내지 선교회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3 / 8
A. A. 하지와 B. B. 워필드가 1881년 「영감」에서 변호한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4 / 8
존 로스와 한국인 조력자들이 만주에서 옮긴 한글 신약 전서가 나온 해는 언제입니까?
- 연습 5 / 8
선교사들이 오기 전 한국 개신교에 대해 바르게 말한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6 / 8
1885년 부활절에 제물포에 함께 닿은 두 선교사는 누구입니까?
- 연습 7 / 8
1890년 한국의 장로교 선교사들이 받아들인 네비우스 방법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 연습 8 / 8
이 과가 19세기 선교의 한계로 정직하게 짚은 것은 무엇입니까?
출처
- 윌리엄 캐리, 이교도 개종 수단 탐구 1792 — 대위임령이 오늘의 교회에도 주어졌다고 논증하며 해외 선교를 촉구한 소책자.
- 찰스 하지, 조직신학 1872–1873 — 프린스턴 신학의 대표 교의학. 성경을 사실들의 창고로, 신학을 그 사실들을 정리하는 학문으로 본다.
- A. A. 하지·B. B. 워필드, 영감 1881 — 성경의 원본이 성령의 영감으로 오류 없이 기록되었다고 변호한 논문.
- 존 로스 외, 예수셩교젼셔 1887 — 만주에서 존 로스와 한국인 조력자들이 옮긴 첫 한글 신약 전서.
- 존 네비우스, 선교 교회의 설립과 발전 1886 — 스스로 전하고, 스스로 다스리고, 스스로 서는 교회를 세우라는 선교 원칙. 한국 선교부가 1890년에 받아들였다.
성경과 교회의 신경, 교부와 신학자들의 글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복음주의 신앙에 서서, 각 전통과 신학자를 먼저 그들 자신의 말로 공정하게 소개한 뒤 성경에 비추어 살핍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