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란 무엇인가?
성화는 하나님이 성령으로 신자를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가시는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면서 신자가 순종으로 응답하는 일이고, 말씀과 기도와 성례와 교제 같은 은혜의 수단을 통해 자라며, 이 세상에서는 싸움과 실패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변화가 어디까지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개혁교회, 웨슬리 전통, 동방 정교회의 강조가 다릅니다.
성경의 답
성경에서 ‘거룩하다’는 말의 기본 뜻은 도덕적 완벽함이 아니라 ‘구별되어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거룩함이 먼저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명령과 약속을 한 절에 함께 두십니다.
너희는 내 법규를 지키고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히 구별하는 주니라.
레 20:8
명령하시는 분이 이루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신약도 같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지난날의 죄를 말한 뒤 이렇게 이어 갑니다.
너희 중에 이 같은 자들이 더러 있었으나 너희가 우리 하나님의 영을 통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씻기고 거룩히 구별되어 의롭게 되었느니라.
고전 6:11
여기서 ‘거룩함’은 이미 얻은 것으로 말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이미 구별되었습니다. 히브리서도 “그분께서는 거룩히 구별된 자들을 단 한 번 헌물을 드림으로 영원토록 완전하게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히 10:14). 그런데 같은 편지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과 거룩함을 따르라. 그것들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도 말합니다 (히 12:14). 이미 거룩하게 되었고, 또 거룩하게 되어 가고 있다는 두 면이 성경에 함께 있습니다. 신분으로는 하나님께 드려졌고, 삶으로는 그 신분에 맞게 자라 갑니다.
이 자람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곧 너희가 거룩히 구별되는 것이라. 너희는 음행을 삼가고
살전 4:3
그리고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 자신이 이루시는 일이라고 기도합니다.
평강의 바로 그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하게 거룩히 구별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흠 없이 보존해 주시기를 구하노라.
살전 5:23
그러면 신자는 무엇을 합니까? 빌립보서는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응답을 한 문장 안에 놓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한 것 같이 내가 있을 때뿐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 너희 안에서 일하사 자기가 참으로 기뻐하는 것을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라.
빌 2:12-13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구원을 얻어 내라는 뜻이 아니라, 이미 받은 구원을 삶으로 살아 내라는 뜻입니다. 그 힘의 근원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예수께서는 포도나무의 비유로 같은 것을 가르치십니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열매를 맺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면 바로 그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나니 나 없이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요 15:5).
그 변화는 어떤 모습입니까? 바울은 이렇게 씁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가리지 않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바라보며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렀나니 이것은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고후 3:18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그분의 모습으로 변해 갑니다. 그 변화의 열매가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열매는 만들어 붙이는 것이 아니라 뿌리에서 자랍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싸움이 쉽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는 내가 원하는 선은 내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내가 원치 아니하는 악을 곧 그것을 내가 행하기 때문이라.” (롬 7:19). 그리고 이어 외칩니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 7:24
대답은 바로 다음 구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런즉 이와 같이 내 자신이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되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는 것입니다 (롬 7:25). 빌립보서 3:12-14에서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하며 푯대를 향해 달려갑니다.
교회의 증언
교회는 거룩함이 ‘은혜의 수단’을 통해 자란다고 보았습니다. 사도행전의 첫 교회는 사도의 가르침과 교제와 떡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습니다 (행 2:42). 말씀, 교제, 성찬, 기도입니다. 예수께서도 아버지께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요 17:17). 이 구절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씁니다. “거룩하게 된 자들은 여전히 거룩함에서 자라야 하고, 이는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요한복음 15:5에 대해서도 그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는 “적게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으십니다”라고 덧붙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성화를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일로 설명하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온 사람이 새롭게 되고 점점 더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 수 있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5문.
이 변화가 이 땅에서 어디까지 가는지에 대해서는 전통마다 강조가 다릅니다.
개혁교회의 강조는 이렇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순간 죄의 지배에서 풀려나지만, 삶 전체의 변화는 평생 계속되는 점진적 과정이며, 이생에서는 죄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매튜 헨리도 데살로니가전서 5:23을 풀며, 바울이 더 온전한 성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가장 선한 사람도 부분적으로만 성화되기 때문입니다”라고 씁니다 매튜 헨리. 이 전통은 로마서 7장을 대개 중생한 사람의 싸움으로 읽습니다. 헨리도 이 대목이 육신을 따라 행한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행하지 않기를 마음으로 크게 원하던 사람”이라고 풉니다 매튜 헨리. 반면 많은 헬라 교부와 웨슬리, 그리고 오늘날의 많은 학자는 이 장을 성령 없이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읽으며, 이는 오랜 논쟁거리입니다.
웨슬리 전통은 하나님이 이생에서 신자를 사랑 안에서 ‘온전하게’ 하실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죄가 없거나 실수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고 의도적인 죄에서 해방되는 것을 말합니다. 웨슬리는 이것이 믿음으로 받는 선물이며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개혁 전통은 이 가르침이 성경이 약속하는 정도를 넘어선다고 보고, 웨슬리 전통은 하나님이 이 사랑을 명하셨고 바울이 “평강의 바로 그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하게 거룩히 구별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흠 없이 보존해 주시기를 구하노라.”라고 기도했으니 (살전 5:23) 그보다 덜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소망을 줄인다고 답합니다. 두 쪽 모두 요한일서 1:8-9, 곧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라는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동방 정교회는 구원의 목적을 ‘신화(神化, 테오시스)’라고 부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베드로후서 1:4의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에 의지하고,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가 신화되게 하시려는 것, 곧 은혜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시려는 것이라는 아타나시우스의 가르침을 이어 갑니다 아타나시우스,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가톨릭 교회도 은혜로 자라는 성화를 가르치며, 성례를 통해 받는 은혜와 성도의 삶을 강조합니다. 모든 전통이 함께 말하는 것은 성화가 은혜와 성령의 일이며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일이라는 점입니다.
원어로 보기
‘거룩하게 하다’는 헬라어 하기아조(ἁγιάζω), 그 명사형은 하기아스모스(ἁγιασμός)입니다. 이 말은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다’는 뜻을 가집니다. 구약의 히브리어 카다쉬(קָדַשׁ)도 같은 생각입니다. 성막의 기구가 거룩하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신자들을 ‘성도’, 곧 ‘거룩한 자들’이라 부르는 것은 그들이 완성되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12의 “이루라”는 카테르가조마이(κατεργάζομαι)로, ‘이루어 내다, 끝까지 해내다’라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해석자는 이것을 구원을 얻으려고 일하라는 뜻이 아니라 받은 것을 끝까지 살아 내라는 뜻으로 읽습니다.
흔한 반론과 답
“그리스도인이 정말 변한다면 왜 교회 안에도 위선과 죄가 이렇게 많은가?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 반론은 가장 진지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변화된다는 주장은 확인될 수 있는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실패는 역사 속에서 분명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이미 더 나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화는 느리고 부분적이며 사람마다 고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치료받는 사람입니다. 사람마다 출발점이 다르므로 같은 은혜 아래서도 변화의 모습은 매우 다를 수 있고, 변화는 큰 일보다 오래 참음과 용서와 정직 같은 작은 일에서 드러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판단은 신자들의 삶을 직접 보며 내릴 일입니다.
“거룩함을 강조하면 결국 율법주의와 정죄로 흐르지 않는가? 은혜로 받아 주신다면서 왜 또 노력하라고 하는가?” 그런 일이 교회에서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순서는 반대입니다. 먼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느니라.”라는 선언이 있고 (롬 8:1), 그 뒤에 거룩함이 따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한 값이 아니라, 이미 받아들여진 사람의 응답입니다. 그리고 죄를 자백하면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하신다고 했으니 (요일 1:9), 실패는 포기의 이유가 아니라 다시 돌아갈 이유입니다. 성화가 은혜 밖의 노력이 되는 순간이 율법주의입니다.
더 생각해 보기
성화는 더 좋은 사람이 되라는 훈계이기 전에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은 끝까지 이루십니다. 바울은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 바로 이것을 나는 확신하노라.”고 말합니다 (빌 1:6). 그래서 신자는 자기 실패 앞에서 절망하지 않고, 자기 진보 앞에서 교만하지도 않습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성장하는 일을 내 노력의 문제로만 생각해 왔습니까, 아니면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문제로 생각해 왔습니까? 지금 내 삶에서 말씀과 기도와 교제는 어떤 자리를 차지합니까?
더 읽으려면 칭의란 무엇인가?, 성령은 누구신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십시오. 갈라디아서 5장을 천천히 읽는 것도 좋은 출발입니다.
관련 질문
- 칭의란 무엇인가?칭의는 하나님이 죄인을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다고 받아 주시는 일입니다. 모든 교회는 이것이 우리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 믿음을 통해 온다고 고백합니다. 다만 칭의가 법정의 선언인지, 사람을 실제로 새롭게 하는 일까지 포함하는지, 믿음과 행함은 어떻게 이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종교개혁 이후 교회들이 다르게 설명해 왔고, 오늘은 상당 부분 서로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 성령은 누구신가?교회는 성령이 하나님의 막연한 힘이 아니라 성부, 성자와 함께 한 하나님이신 위격이라고 고백해 왔습니다. 성령은 창조 때부터 일하셨고, 예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로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며 성품을 빚으십니다. 오늘날 은사가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서로 다른 이해가 있습니다.
- 믿음이란 무엇인가?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눈을 감고 어둠 속으로 뛰어드는 일이 아니라, 신실하신 분을 신뢰하고 그분께 자신을 맡기는 일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고, 선한 삶으로 열매를 맺으며, 의심 속에서도 도움을 구하는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향하는 분, 곧 그리스도께 구원이 있다고 고백해 왔습니다.
-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성경은 삶의 방식을 규칙 목록이 아니라 사랑으로 요약합니다.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삶이며, 이것은 구원을 얻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위선적이라는 반론은 아프지만 정당한 면이 있고, 예수께서 먼저 위선을 꾸짖으셨습니다.
관련 주제
출처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