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주의와 청교도
17세기 개신교회는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정밀하게 정리하고 지키는 일에 힘썼습니다. 루터교와 개혁교회의 정통주의 신학자들, 아르미니우스와 도르트 총회의 논쟁, 웨스트민스터 총회와 청교도들은 바른 교리와 거룩한 삶을 함께 붙들려 했고, 그 열매는 요리문답과 가정 예배와 매튜 헨리의 주석으로 오늘까지 이어집니다.
종교개혁을 물려받은 세대
루터와 칼뱅이 세상을 떠난 뒤 그다음 세대에게는 다른 과제가 남았습니다. 종교개혁의 신앙을 대학에서 가르치고 목사를 길러 내야 했으며, 예수회 신학자들의 날카로운 반박에 답하고, 루터교와 개혁교회 사이의 차이도 따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중세 스콜라 신학의 방법, 곧 낱말을 정확히 정의하고 구별을 세우며 주제별로 차근차근 논증하는 방법을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16세기 말부터 18세기 초까지 이어진 이 흐름을 ‘개신교 정통주의’라고 부릅니다.
루터교에서는 예나 대학의 요한 게르하르트(1582–1637)가 대표적입니다. 그는 여러 권으로 된 『신학의 주제들』(Loci Theologici)에서 루터교의 가르침을 주제별로 정리했고, 젊은 시절에는 『거룩한 묵상』이라는 경건 서적도 썼습니다. 개혁교회에서는 제네바의 프랜시스 튜레틴(1623–1687)이 1670–80년대에 펴낸 『변증 신학 강요』가 대표적입니다. 그는 질문마다 반대 견해를 먼저 소개하고 성경과 이성으로 답하는 방식으로 개혁파 신학을 변호했고, 이 책은 오랫동안 여러 개혁파 신학교의 교과서로 쓰였습니다.
이 시대의 신학은 흔히 ‘죽은 정통’이라는 말을 듣고, 메마른 논쟁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강의실에서만 아니라 강단에서 설교했고, 기도서와 묵상집을 썼으며, 그들이 다듬은 교리는 신자들이 부르는 찬송과 배우는 요리문답에 담겼습니다. 같은 시대의 루터교 목사 파울 게르하르트는 오늘도 불리는 찬송들을 지었습니다. 정확함은 차가움이 아니라, 받은 진리를 그대로 전하려는 성실함일 수 있습니다. 바울도 디모데에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 안에서 네가 내게 들은 건전한 말씀들의 틀을 굳게 붙들고
딤후 1:13
웨슬리는 이 ‘바른 말’을 "순수하고 건전한 교훈의 모범"이라고 풉니다 웨슬리. 바울이 바른 말을 ‘믿음과 사랑으로써’ 지키라고 한 것이 이 시대를 재는 잣대가 됩니다.
아르미니우스와 도르트 총회
이 시대의 가장 큰 논쟁은 네덜란드에서 일어났습니다. 레이던 대학의 교수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1560–1609)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을 자들을 미리 아시고 그들을 택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아르미니우스, 소신 선언. 그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610년, 그를 따르는 목사들은 다섯 조항의 항론서를 냈습니다 항론서. 하나님은 믿고 끝까지 믿음에 머물 이들을 구원하기로 정하셨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며, 은혜 없이는 아무도 믿을 수 없지만 그 은혜는 거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항론파는 은혜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말씀을 (딤전 2:4) 붙들고, 하나님이 죄의 원인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 했으며,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않은 자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님을 거역하되 너희 조상들이 행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행하는도다."라는 스데반의 말에서 (행 7:51) 은혜를 거스를 수 있음을 읽었습니다. 개혁교회는 구원이 "그런즉 이와 같이 그것은 원하는 자에게서 나지도 아니하고 달리는 자에게서 나지도 아니하며 오직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에게서 나느니라."이라는 말씀과 (롬 9:16), 하나님이 "곧 우리가 사랑 안에서 자신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세상의 창건 이전에 그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으며"라는 말씀으로 (엡 1:4) 답했습니다.
1618년부터 이듬해까지 도르트레히트에서 열린 총회에는 네덜란드 교회와 여러 나라 개혁교회의 대표들이 모였고, 총회는 항론서의 다섯 조항에 답하는 도르트 신경을 내놓았습니다. 그 다섯 교리는 개혁주의 신앙 과정의 도르트 신경의 다섯 교리 과에서 다룹니다. 총회 뒤 항론파 목사들은 면직되거나 나라 밖으로 쫓겨났고, 이 논쟁은 당시의 정치 다툼과 얽혀 있었습니다.
이 질문에서 복음주의자들은 오늘도 서로 다릅니다.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는 도르트의 고백을 따르고, 한 세기 뒤의 존 웨슬리와 감리교회를 비롯한 여러 교회는 아르미니우스에 가까운 견해를 따릅니다. 두 견해 모두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라고 고백하며 성경으로 자기 견해를 변호합니다. 도르트의 편에 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예정이라는 이 높은 신비의 교리는 특별한 신중함과 주의로 다루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장 8절. 두 견해는 예정이란 무엇인가?에서 더 살펴볼 수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와 청교도
잉글랜드에서는 교회를 더 철저히 개혁하려던 청교도들의 바람이 왕과 의회의 내전 한가운데서 기회를 만났습니다. 1643년 의회는 교회의 예배와 정치와 교리를 정비하려고 웨스트민스터에 신학자들을 불러 모았고, 스코틀랜드 교회의 대표들도 함께했습니다. 1649년까지 이어진 이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6)과 대요리문답, 소요리문답을 내놓았습니다. 소요리문답은 첫 물음부터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묻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
이 답의 뜻은 개혁주의 신앙 과정의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 과에서 풀어 봅니다. 청교도들에게 신학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윌리엄 에임스는 신학을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삶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정의했고, 그래서 청교도의 신학을 흔히 ‘실천적 신학’(practical divinity)이라 부릅니다. 그들은 본문을 풀어 교리를 세우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쉬운 설교를 했고, 주일을 일과 오락에서 떠나 예배와 쉼으로 지키는 날로 여겼으며, 집집마다 날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가정 예배를 힘써 지켰습니다.
이 시대의 청교도 가운데 세 사람이 특히 오래 읽힙니다. 옥스퍼드 대학을 이끌기도 한 존 오웬(1616–1683)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음의 죽음』에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가 주신 이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변호했고 오웬,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음의 죽음, 신자 안에 남은 죄를 성령으로 죽이는 일과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서도 깊이 썼습니다. 키더민스터의 목사 리처드 백스터(1615–1691)는 『참 목자상』에서 목사가 먼저 자기를 살피고 교인을 한 집 한 집 찾아가 가르치라고 권했습니다 백스터, 참 목자상. 땜장이 출신의 설교자 존 버니언(1628–1688)은 허가 없이 설교했다는 이유로 오래 갇혀 지냈고, 감옥에서 구상한 『천로역정』(1678)에서 순례자 크리스천이 멸망의 도시를 떠나 하늘 도성에 이르는 길을 그렸습니다 버니언, 천로역정.
1660년 왕정이 돌아온 뒤 1662년의 통일령은 모든 목사에게 『공동기도서』를 그대로 따르라고 요구했고, 양심상 그럴 수 없었던 이천 명가량의 목사가 설교단을 잃었습니다. 이 일을 ‘대추방’이라 부릅니다. 쫓겨난 목사 필립 헨리의 아들로 바로 그해 태어난 매튜 헨리(1662–1714)는 아버지의 가정 예배 속에서 자랐고, 훗날 체스터에서 비국교도 회중을 섬기며 이 앱이 간추린 판으로 싣고 있는 성경 주석을 썼습니다 (매튜 헨리 간추린 주석). 그는 신명기 6장을 풀며 "여기에 우리 마음과 집에서 신앙을 유지하고 지켜 나가는 방법들이 있습니다"라고 쓰고 매튜 헨리, 묵상과 자녀의 신앙 교육과 경건한 대화와 말씀을 자주 읽는 일을 차례로 꼽습니다. 청교도의 가정이 어떻게 살았는지 보여 주는 한 장면입니다.
그들이 남긴 것
정통주의 신학자들과 청교도들은 바른 교리와 거룩한 삶을 떼어 놓지 않으려 했습니다. 베드로는 "오직 너희를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 같이 너희도 온갖 종류의 행실에서 거룩할지니라."고 말합니다 (벧전 1:15). 그들이 남긴 요리문답은 세대를 이어 수많은 아이와 새신자에게 신앙을 가르쳤고, 한국 장로교회도 이 문답으로 신앙을 배웠습니다. 박해 속에서도 양심을 지킨 목사들과 감옥에서 순례의 이야기를 쓴 설교자는 고난 속의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그늘도 있었습니다. 루터교와 개혁교회,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사이의 논쟁은 자주 거칠었고, 같은 청교도인 오웬과 백스터도 칭의와 그리스도의 죽음의 범위를 두고 글로 날카롭게 맞섰습니다. 권력을 쥐었을 때는 그들도 다른 이들을 몰아냈습니다. 도르트 총회 뒤의 항론파가 그러했고, 1640–50년대 청교도가 힘을 쥔 잉글랜드에서는 『공동기도서』를 지키던 많은 목사가 자리를 잃었습니다. 주일과 생활의 규칙이 때로 지나치게 엄격해지기도 했습니다.
매튜 헨리가 같은 신명기 6장에서 의심스러운 논쟁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분명한 진리와 우리의 평안에 속한 일을 이야기하라고 권한 것은 이 시대가 스스로에게 준 좋은 처방이었습니다. 진리를 지키는 열심과 사랑의 온유함은 함께 가야 합니다.
다음 세대의 어떤 이들은 이 정통이 머리에만 머물렀다고 느끼고 마음의 신앙을 새롭게 찾았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 과정의 경건주의와 대각성 과에서 이어집니다.
연습
- 연습 1 / 8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힘쓴 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2 / 8
1610년 항론서가 말한 내용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3 / 8
도르트 총회(1618–1619)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4 / 8
다음 가운데 훗날 아르미니우스에 가까운 견해를 따른 사람은 누구입니까?
- 연습 5 / 8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무엇이라고 답합니까?
- 연습 6 / 8
1662년의 ‘대추방’은 무엇이었습니까?
- 연습 7 / 8
매튜 헨리는 신명기 6장에서 우리 마음과 집에서 신앙을 지켜 나가는 방법으로 무엇을 꼽았습니까?
- 연습 8 / 8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1678)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출처
-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 소신 선언 1608 — 하나님이 믿을 자들을 미리 아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다는 자신의 예정론을 네덜란드 의회 앞에서 밝혔다.
- 항론파, 항론서(다섯 조항) 1610 — 아르미니우스를 따르는 이들의 고백. 예지된 믿음에 따른 선택, 모든 이를 위한 속죄, 거부할 수 있는 은혜를 말한다.
- 존 오웬,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음의 죽음 1647 —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이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제한 속죄’(확정 속죄)의 고전적 변호.
- 리처드 백스터, 참 목자상 1656 — 목사가 먼저 자신을 살피고, 교인을 한 집 한 집 찾아가 가르치라고 권한다.
- 존 버니언, 천로역정 1678 — 감옥에서 구상한 우의(寓意) 이야기. 순례자 크리스천이 멸망의 도시를 떠나 천성에 이르는 길을 그린다. 읽기
성경과 교회의 신경, 교부와 신학자들의 글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복음주의 신앙에 서서, 각 전통과 신학자를 먼저 그들 자신의 말로 공정하게 소개한 뒤 성경에 비추어 살핍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