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17과

츠빙글리, 칼뱅, 개혁파 신학

스위스에서 자란 개혁파 신학은 교회의 예배와 삶 전체를 성경으로 다시 세우려 했습니다.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성경을 차례로 강해하며 예배를 단순하게 했고 성찬을 두고 루터와 갈라졌으며,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와 성화라는 두 겹의 은혜, 하나님의 주권을 가르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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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 말씀으로 다시 세운 예배

개혁교회가 생겨난 이야기는 개혁주의 신앙 과정의 종교개혁 이야기 과에서, 그 신앙고백들은 개혁교회의 신앙고백 과에서 다룹니다. 이 과에서는 이 흐름이 무엇을 가르쳤는지를 봅니다. 루터가 죄인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를 물었다면, 스위스의 개혁자들은 여기에 한 물음을 더했습니다. 교회의 예배와 삶 전체를 어떻게 성경대로 다시 세울 것인가?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는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사제였습니다. 1519년 첫날 취리히 대성당의 설교자가 된 그는 정해진 성구 대신 마태복음을 처음부터 차례로 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1523년에는 공개 토론을 위해 67개 조항을 내놓고, 복음은 교회의 승인에서 권위를 얻지 않으며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츠빙글리, 67개 조항.

츠빙글리에게 개혁은 교리만이 아니라 예배의 문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드릴 예배를 피조물에게 돌리게 하는 것은 교회에서 치워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1524년 취리히의 교회들에서 성상이 치워졌고, 1525년 부활절부터는 미사 대신 회중이 자리에 앉은 채 떡과 잔을 받는 단순한 성찬이 거행되었습니다. 뛰어난 음악가였던 그가 오르간까지 멈추게 한 것은 말씀 중심의 예배를 그만큼 진지하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마르부르크: “이것이 내 몸이니라”

츠빙글리와 루터는 주의 식탁에서 갈라졌습니다. 1529년 가을, 헤센의 영주 필리프는 개신교 세력을 하나로 묶으려고 두 사람을 마르부르크로 불렀습니다. 루터는 주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붙들었습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집으사 축복하시고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마 26:26

전해지기로 루터는 회담 탁자 위에 분필로 이 말씀을 라틴어로 써 놓고 물러서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에게 이 말씀은 비유가 아니라 약속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다’라고 하셨으니 그분의 참 몸과 피가 떡과 포도주와 함께 주어지며, 사람의 이성이 그 방법을 다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은 약속을 의심할 까닭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츠빙글리는 같은 식탁에서 다른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살을 먹으라는 말씀에 걸려 넘어진 이들에게 "살리는 것은 영이며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요 6:63). 츠빙글리는 ‘이다’를 ‘뜻한다’로 읽었고, 하늘에 오르신 그리스도의 몸이 여러 식탁 위에 동시에 있을 수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성찬은 단번에 드려진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감사하며 기념하고 교회가 자기 믿음을 함께 고백하는 식탁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지키려 한 것은 구원이 떡을 먹는 데가 아니라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다는 진리였습니다.

루터 편은 이 구절의 ‘육’이 그리스도의 살이 아니라 육신적인 생각을 가리킨다고 보았습니다. 교부들 가운데도 그렇게 읽은 이가 있습니다. 크리소스토무스는 육이 무익하다고 하실 때 "그분은 자기 살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말씀을 듣는 육신적인 청중의 육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라고 썼습니다 크리소스토무스.

결국 두 편은 열다섯 조항 가운데 열네 조항과 열다섯째 조항의 대부분에 합의했지만, 그리스도의 참 몸과 피가 떡과 포도주 안에 몸으로 계시느냐는 한 가지에서 갈라졌습니다 마르부르크 조항. 그래도 그들은 양심이 허락하는 한 서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보이기로 약속했습니다. 이 물음은 세례와 성찬은 무엇인가?에서 더 다룹니다.

칼뱅: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프랑스 사람 장 칼뱅(1509–1564)은 루터와 츠빙글리의 다음 세대였습니다. 1536년 바젤에서 『기독교 강요』 초판을 낸 그는 그해 제네바에 머물게 되었고, 이 책을 평생 고쳐 써서 1559년 네 권으로 된 최종판을 냈습니다 칼뱅, 기독교 강요. 책의 첫머리는 참되고 건전한 지혜가 거의 모두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는 자신을 바로 알 수 없고, 자기의 비참을 알 때 사람은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로 흐려진 사람은 창조 세계에 비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로 읽지 못합니다. 그래서 칼뱅은 성경을 안경에 견주었습니다. 눈이 흐린 노인이 아름다운 책을 받아도 두 낱말을 잇기 어렵지만 안경을 쓰면 또렷이 읽듯, 성경은 우리 마음속의 흐릿한 하나님 지식을 모아 참 하나님을 분명히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앙 과정의 오직 성경 과 참고). 시편 기자도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시 119:105).

칼뱅 신학의 심장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밖에 계시고 우리가 그분과 떨어져 있는 한, 그분이 우리 구원을 위해 겪으시고 행하신 모든 일은 우리에게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로 묶으시는 띠가 되십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하나 될 때 우리는 ‘두 겹의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흠 없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여 하늘에 재판관 대신 은혜로운 아버지를 모시는 칭의,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룩하게 되어 흠 없고 정결한 삶을 가꾸는 성화입니다 칼뱅, 기독교 강요 3.1.1, 3.11.1. 바울도 그리스도께서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사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별과 구속이 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고전 1:30). 칼뱅은 이 둘을 나눌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조각내어 가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칼뱅은 이 모든 일의 뿌리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서 보았습니다. 그에게 섭리는 차가운 운명이 아니라, 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에 담긴 아버지의 돌보심이었습니다 (마 10:29). 예정도 사색거리가 아니라 겸손과 확신의 근거로 가르쳤습니다 (개혁주의 신앙 과정의 작정과 예정 과 참고). 매튜 헨리는 에베소서 1:4를 풀며 이렇게 씁니다. "목적으로서의 행복에 이르도록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은 수단으로서의 거룩함에 이르도록 택함을 받았습니다" 매튜 헨리. 루터교회와 웨슬리 전통은 선택을 다르게 설명하며, 복음주의자들 사이의 이 차이는 이 과정의 뒤에서 다시 만납니다.

칼뱅은 교회의 삶도 말씀대로 세우려 했습니다. 1541년 제네바 교회 법규는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의 네 직분을 두고, 목사와 장로가 함께 교인의 삶을 돌보는 치리회를 세웠습니다 칼뱅, 제네바 교회 법규. 1559년에는 제네바 아카데미를 열어 목회자를 길렀고,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그 가르침을 고향으로 가져갔습니다.

한 가족의 두 목소리, 그리고 아픈 대목

취리히에서는 1531년 츠빙글리가 전쟁터에서 죽은 뒤 하인리히 불링거(1504–1575)가 40년 넘게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의 은혜 언약이라는 생각을 일찍부터 풀어, 개혁파 언약 신학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가 쓴 제2 스위스 신앙고백(1566)은 여러 나라 개혁교회가 받아들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합니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

1549년 칼뱅과 불링거는 취리히 일치 신조로 성례, 특히 성찬의 이해를 하나로 모았습니다 취리히 일치 신조. 성찬의 떡과 잔은 빈 표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참되게 교제하게 하는 은혜의 표요 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고전 10:16). 개혁교회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라고 부릅니다 (개혁주의 신앙 과정의 성찬: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 과 참고).

루터교회는 이 합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두 교회의 차이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이해로까지 이어졌습니다. 1577년의 일치신조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과 하나 되어 신적 위엄에 참여하므로,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곳에 그분의 몸이 계실 수 있으며 ‘하나님 우편’은 한 장소가 아니라 어디에나 미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고백합니다 일치신조 8조. 그래야 그리스도께서 나뉘지 않으시고 그분의 약속이 비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개혁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참된 사람의 몸으로서 하늘에 계시고, 영원한 아들은 그 몸 밖에서도 온전히 하나님으로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인성이 참 인성으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양쪽 모두 칼케돈의 고백을 지키려 한 것입니다 (이 과정의 칼케돈 과).

제네바의 역사에는 아픈 대목도 있습니다. 삼위일체를 부인한 스페인 의사 미카엘 세르베투스는 가톨릭 종교재판을 피해 달아나다 1553년 제네바에서 붙잡혔습니다. 칼뱅은 그의 가르침을 고발하는 데 앞장섰고, 다른 스위스 교회들도 처벌에 동의했으며, 제네바 시의회는 그를 화형에 처했습니다. 칼뱅은 덜 잔혹한 처형을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단을 사형에 처하는 일이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에서 받아들여지던 시대였지만, 그때에도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옹 같은 이는 이에 항의했습니다. 1903년 칼뱅을 존경하는 개혁교회의 후예들은 처형 장소에 속죄의 기념비를 세우고, 그것을 그 시대의 잘못으로 고백했습니다.

개혁파 신학이 남긴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입니다. 성경을 안경 삼아 하나님을 알고,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의롭다 하심과 거룩하게 하심을 함께 받으며, 예배와 교회와 일상을 말씀대로 세우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개혁자들 역시 은혜가 필요한 죄인이었음을 정직하게 보여 줍니다.

연습

  1. 연습 1 / 7

    츠빙글리가 1519년부터 취리히에서 시작한 설교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2. 연습 2 / 7

    1529년 마르부르크 회담의 결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3. 연습 3 / 7

    성찬 논쟁에서 츠빙글리가 자기 견해의 근거로 붙든 말씀은 무엇입니까?

  4. 연습 4 / 7

    『기독교 강요』의 첫머리는 참되고 건전한 지혜가 무엇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까?

  5. 연습 5 / 7

    칼뱅이 성경을 안경에 견준 뜻은 무엇입니까?

  6. 연습 6 / 7

    칼뱅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받는다고 말한 ‘두 겹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7. 연습 7 / 7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적 위엄에 참여하므로 약속하신 곳에 그분의 몸이 계실 수 있고, ‘하나님 우편’은 어디에나 미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고백하는 전통은 어디입니까?

출처

  1. 울리히 츠빙글리, 67개 조항 1523 — 취리히 첫 공개 토론을 위한 조항.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자 중보자이심을 고백한다.
  2. 루터와 츠빙글리, 마르부르크 조항 1529 — 루터파와 개혁파가 열네 조항과 열다섯째 조항의 대부분에 합의했으나,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임재에 대해서는 갈라졌다.
  3. 장 칼뱅, 기독교 강요 1559 — 개혁파 신학의 대표 저작. 읽기
  4. 장 칼뱅, 제네바 교회 법규 1541 —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의 네 직분으로 제네바 교회의 질서를 세웠다.
  5. 하인리히 불링거, 제2 스위스 신앙고백 1566 — 스위스와 여러 나라 개혁교회가 받아들인 신앙고백. 1장: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6. 칼뱅과 불링거, 취리히 일치 신조 1549 — 제네바와 취리히가 성례, 특히 성찬의 이해에 합의한 문서.
  7. 루터교, 일치신조 8 (1577) — 8조: 그리스도의 인격. 높아지신 그리스도는 인성으로도 하나님의 권능에 참여하시며, ‘하나님 우편’은 한 장소가 아니라 어디서나 미치는 하나님의 권능이다.

성경과 교회의 신경, 교부와 신학자들의 글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복음주의 신앙에 서서, 각 전통과 신학자를 먼저 그들 자신의 말로 공정하게 소개한 뒤 성경에 비추어 살핍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