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18과

재세례파와 급진 종교개혁

1525년 취리히에서 믿음을 고백한 어른들이 서로 세례를 베풀면서 재세례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회개하고 믿는 이들의 교회, 신자의 세례, 권징, 칼과 맹세를 거부하는 제자의 길을 가르쳤고, 가톨릭과 개신교 양쪽에서 박해를 받으면서도 메노파와 후터파로 이어졌습니다.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는 유아세례와 위정자와 맹세에서 그들과 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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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 1525년 1월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를 성경으로 새롭게 하려 했지만, 무엇을 언제 바꿀지는 대개 도시의 시의회나 영주와 함께 정했습니다. 츠빙글리 곁에서 헬라어 성경을 읽던 젊은 제자들 가운데 몇은 여기서 더 나아갔습니다. 콘라트 그레벨과 펠릭스 만츠 같은 이들은 신약성경에서 교회를,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스스로 결단한 사람들의 모임으로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고백할 수 없는 아기에게 주는 세례는 성경이 말하는 세례가 아니라고 그들은 보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명령에서 순서를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며 무엇이든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의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하시니라. 아멘.

마 28:19-20

오순절에도 "그때에 그의 말을 기쁘게 받아들인 자들이 침례를 받으매 바로 그 날에 삼천 혼 가량이 그들에게 더해지니라." 받았습니다 (행 2:41). 제자를 삼는 일과 믿음이 먼저이고 세례가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오래전 히에로니무스도 이 구절에서 같은 순서를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먼저 모든 민족을 가르치고, 가르친 뒤에 물에 담급니다" 히에로니무스. 다만 히에로니무스 시대의 교회는 이미 유아에게도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1525년 1월 취리히 시의회는 공개 토론 끝에 모든 아기에게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고 이들의 모임을 금했습니다. 후대 연대기의 기록에 따르면 며칠 뒤인 1월 21일 저녁, 만츠의 어머니 집에 모인 이들 가운데 옛 사제 게오르크 블라우로크가 그레벨에게 세례를 청했고, 세례를 받은 그가 다른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반대자들은 이들을 ‘다시 세례를 주는 자들’, 곧 재세례파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유아세례를 세례로 여기지 않았으므로 다시 준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서로를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슐라이트하임: 값비싼 제자의 길

1527년 2월 독일 국경에 가까운 스위스 마을 슐라이트하임에 흩어진 형제들이 모였습니다. 베네딕도회 수도사였던 미하엘 자틀러가 중심이 되어 일곱 조항의 합의를 내놓았는데, 이것이 재세례파의 첫 신앙고백인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입니다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 1조는 회개와 삶의 고침을 배우고 그리스도께서 죄를 없애셨음을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세례를 주라고 말합니다. 2조는 권징입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면 먼저 혼자서, 다음에는 증인과 함께,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 앞에서 권하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마 18:15-17) 교회가 서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조는 한 떡을 떼는 이들이 먼저 세례로 한 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4조는 악한 세상과 구별되어 살라고, 5조는 회중이 목자를 세우라고 말합니다.

가장 큰 논란이 된 것은 6조와 7조였습니다. 6조는 칼이 그리스도의 온전함 밖에서 악한 자를 벌하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온전함 안에서는 권징만 쓰인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칼을 쓰는 위정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악에게 맞서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그에게 다른 뺨도 돌려대며"는 말씀이 (마 5:39) 그 근거였습니다. 7조는 주께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결코 맹세하지 말라. 하늘을 두고도 하지 말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왕좌이기 때문이요"라고 하셨으니 (마 5:34) 어떤 맹세도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것을 새 율법이 아니라 산상수훈을 그대로 살려는 제자도로 이해했습니다.

그 길은 값비쌌습니다. 1526년 취리히 시의회는 다시 세례를 주는 자를 물에 빠뜨려 죽이도록 정했고, 1527년 1월 펠릭스 만츠는 리마트 강에 빠뜨려져 개신교 당국의 손에 죽은 첫 재세례파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5월 자틀러는 가톨릭 당국에 의해 로텐부르크에서 화형을 당했고, 그의 아내도 며칠 뒤 물에 빠뜨려져 죽었습니다. 가톨릭과 루터교와 개혁교회의 땅 어디서나 많은 재세례파가 감옥에 갇히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찬송으로 부르고 책으로 엮어 기억했습니다. 1660년에 나온 『순교자의 거울』은, 1569년 네덜란드의 디르크 빌럼스가 자기를 쫓다 얼음이 깨져 물에 빠진 사람을 돌아가 건져 주었다가 붙잡혀 화형을 당했다고 전합니다.

뮌스터, 메노, 그리고 여러 갈래

재세례파의 이름을 가장 어둡게 만든 것은 뮌스터 사건이었습니다. 1534년 종말이 가까웠다는 설교에 이끌린 무리가 독일의 도시 뮌스터를 장악하고 ‘새 예루살렘’을 선포했습니다. 그들은 무력으로 도시를 지키며 재산 공유와 일부다처까지 강요하다가 1535년 포위 끝에 무너졌습니다. 이 일은 오래도록 모든 재세례파를 위험한 반란자로 보는 구실이 되었지만, 스위스 형제단과 대부분의 재세례파는 칼을 쓰지 않는다는 확신 때문에 뮌스터를 거부했습니다. 뮌스터는 재세례파의 전형이 아니라 가장 슬픈 예외였습니다.

그 상처 속에서 네덜란드와 북독일의 흩어진 재세례파를 모은 이가 메노 시몬스(1496–1561)였습니다. 프리슬란트의 가톨릭 사제였던 그는 성경을 읽으며 화체설과 유아세례를 의심하게 되었고, 뮌스터 무리의 폭력을 보고 괴로워하다가 1536년 사제직을 떠났습니다. 그 뒤 25년 동안 쫓기는 몸으로 회중을 돌보며 회개와 믿음, 신자의 세례, 거룩하고 평화로운 삶을 가르쳤습니다 메노 시몬스, 그리스도교 교리의 기초. 그의 책들에는 늘 "아무도 이미 놓은 기초 외에 능히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나니 이 기초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는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고전 3:11). 그를 따르는 이들은 메노파라고 불렸습니다.

다른 갈래도 있었습니다. 1536년 순교한 야코프 후터의 이름을 딴 후터파는 사도행전의 교회처럼 모라비아에서 재산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이루었고 (행 4:32), 1693년에는 권징을 더 엄격히 하자는 야코프 암만을 따라 아미시가 갈라져 나왔습니다.

역사가들은 흔히 급진 종교개혁 안에 결이 다른 흐름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바깥의 말씀과 성례보다 마음속 성령의 조명을 앞세운 카스파르 슈벵크펠트 같은 영성주의자들이 있었고, 삼위일체를 부인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1553년 제네바에서 처형된 미카엘 세르베투스(이 과정의 츠빙글리, 칼뱅, 개혁파 신학 과)와 16세기 말 폴란드에서 자리 잡은 소치니파가 그들입니다. 재세례파의 주류는 삼위일체 신앙을 지켰으므로 이들과 섞어서는 안 됩니다.

갈라진 자리와 남긴 증언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는 재세례파와 세 자리에서 갈라졌습니다. 첫째는 유아세례입니다. 개혁교회는 할례가 아브라함의 아이들에게 언약의 표로 주어졌듯 세례도 신자의 자녀에게 주어진다고 보았고, 바울이 세례를 "또한 그분 안에서 그리스도의 할례로 말미암아 육신의 죄들에 속한 몸을 벗어 버림으로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로 할례를 받았느니라."와 나란히 놓는 것을 (골 2:11-12) 근거로 들었습니다. 벨직 신앙고백 34조는 바로 이 이유로 재세례파의 가르침을 거부합니다 벨직 신앙고백 34조 (개혁주의 신앙 과정의 언약의 표: 세례와 유아세례 과 참고). 루터교회는 세례가 사람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에 근거하므로 아기에게도 베풀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둘째는 칼과 위정자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위정자가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네게 선을 베푸느니라. 그러나 네가 악한 것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헛되이 칼을 차지 아니하나니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요, 보복하는 자로서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를 집행하느니라." 하나님의 사자라는 말씀을 들어 (롬 13:4), 그리스도인도 공직을 맡아 정의를 위해 칼을 쓸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16조와 벨직 신앙고백 36조는 이 점에서 재세례파를 거부합니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16조.

셋째는 맹세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 자신이 맹세하셨고 바울도 하나님을 증인으로 불렀다는 점을 들어, 정당한 맹세는 금지되지 않았다고 보았습니다. 매튜 헨리는 이 구절을 이렇게 풉니다. "법정에서나 다른 합당한 경우에 하는 엄숙한 맹세가, 마땅한 경외심을 가지고 하는 것이라면 잘못되었다고 여길 이유는 없습니다" 매튜 헨리. 그러면서 그도 주께서 명하신 것은 맹세가 필요 없을 만큼 언제나 진실을 존중하는 삶이라고 덧붙입니다. 진실한 말을 귀히 여기는 데서는 양쪽이 하나였습니다.

이 차이들은 오늘의 복음주의자들 사이에도 남아 있습니다. 17세기 잉글랜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생겨난 침례교회는 신자의 세례를 재세례파와 함께 지녔습니다 제2차 런던 침례교 신앙고백. 초기 침례교인 가운데는 네덜란드의 메노파와 교류한 이들도 있었지만, 침례교회가 재세례파에서 나왔는지는 역사가들 사이에 의견이 갈리고, 대부분의 침례교회는 공직과 맹세를 받아들입니다. 신자의 자녀에게 세례를 주는 교회와 믿음을 고백한 이에게 세례를 주는 교회, 그리스도인의 무력 사용을 허락하는 이들과 평화주의를 지키는 이들이 저마다 성경을 근거로 듭니다.

재세례파가 남긴 증언은 무겁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출생이나 국가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한 사람들의 모임이어야 한다고 외쳤고, 믿음은 칼로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피로 증언했습니다. 훗날 재세례파가 된 신학자 발타자르 후프마이어는 1524년, 이단이라도 불로 태울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설득해야 한다고 썼고, 그 자신도 1528년 빈에서 화형을 당했습니다. "이에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응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사람들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는 사도들의 대답을 (행 5:29) 그들만큼 값비싸게 산 이들도 드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2010년 루터교세계연맹은 지난날의 박해를 두고 메노파에게 공식적으로 용서를 구했습니다. 이 물음은 세례와 성찬은 무엇인가?와 교회는 왜 이렇게 많이 나뉘었는가?에서 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연습

  1. 연습 1 / 8

    1525년 1월 취리히에서 재세례파가 시작될 때 일어난 일은 무엇입니까?

  2. 연습 2 / 8

    ‘재세례파’라는 이름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3. 연습 3 / 8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1527)이 가르친 것은 무엇입니까?

  4. 연습 4 / 8

    재세례파가 권징의 근거로 든 말씀은 무엇입니까?

  5. 연습 5 / 8

    뮌스터 사건(1534–1535)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6. 연습 6 / 8

    메노 시몬스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7. 연습 7 / 8

    법정에서 마땅한 경외심으로 하는 엄숙한 맹세는 잘못이 아니라고 본 쪽은 어디입니까?

  8. 연습 8 / 8

    미카엘 세르베투스와 소치니파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출처

  1. 스위스 형제단,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 1527 — 재세례파의 첫 신앙고백. 회개하고 믿는 이에게 주는 세례(1조), 세상과의 구별, 칼을 쓰지 않음(6조), 맹세하지 않음(7조) 등 일곱 조항.
  2. 메노 시몬스, 그리스도교 교리의 기초 — 회개와 믿음, 신자의 세례, 거룩한 삶을 가르친 메노파의 기초 문서.
  3. 루터교,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1530 — 루터교의 기본 신앙고백.
  4. 잉글랜드 특수침례교회, 제2차 런던 침례교 신앙고백 1689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하되, 믿음을 고백한 이에게 주는 세례를 가르친다.

성경과 교회의 신경, 교부와 신학자들의 글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복음주의 신앙에 서서, 각 전통과 신학자를 먼저 그들 자신의 말로 공정하게 소개한 뒤 성경에 비추어 살핍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