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케돈: 한 인격, 두 본성
니케아 이후 교회는 참 하나님이신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한 분이신지를 물었습니다. 아폴리나리스, 네스토리우스, 에우티케스를 둘러싼 긴 논쟁 끝에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한 분 그리스도께서 두 본성 안에서 혼합되지 않고 변하지 않고 나뉘지 않고 분리되지 않으신다고 고백했습니다.
니케아 다음의 질문
325년 니케아와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교회는 아들이 아버지와 같은 참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과정의 니케아 과). 그러자 새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영원하신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면, 갈릴리를 걸으신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은 어떻게 한 분이신가? 요한은 이 신비를 한 문장에 담았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이 문장의 어디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길이 갈렸습니다. 흔히 알렉산드리아 학파라 부르는 교사들은 ‘말씀이’에, 곧 이 모든 일의 주인이 한 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데 힘을 주었습니다. 안디옥 학파의 교사들은 ‘육신이 되어’에, 곧 그분이 자라고 배우고 시험받으신 온전한 사람이시라는 데 힘을 주었습니다. 둘 다 성경에 있는 강조였지만, 한쪽만 밀고 나가면 다른 쪽이 흐려졌습니다.
첫 시험은 니케아 신앙의 굳은 동지에게서 왔습니다. 라오디게아의 감독 아폴리나리스는 아타나시우스의 벗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둘로 나뉘지 않으시고 죄가 없으시다는 것을 지키려고, 말씀이 사람의 몸은 취하셨지만 사람의 정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말씀 자신이 들어서셨다고 가르쳤습니다. 흔들리고 죄로 기우는 사람의 정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 없다는 염려였습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아폴리나리스파를 정죄했고,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이듬해 무렵의 편지에서 그 까닭을 밝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취하지 않으신 것은 치유되지 않으며, 죄가 가장 깊이 뿌리내린 사람의 정신을 취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정신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클레도니우스에게 보낸 첫째 편지. 히브리서도 그분이 "그러므로 모든 일에서 그분께서 자기 형제들과 같게 될 필요가 있었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서 긍휼 많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이 되사 백성의 죄들로 인해 화해를 이루려 하심이라."라고 말합니다 (히 2:17). 11세기의 테오필락투스는 요한복음 1:14를 풀며 같은 원리를 되풀이합니다. "그분이 취하지 않으신 것은 거룩하게 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테오필락투스.
에베소: 테오토코스를 둘러싼 다툼
428년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된 네스토리우스는 안디옥에서 이름난 설교자였습니다. 마리아를 ‘테오토코스’(Theotokos), 곧 ‘하나님을 낳은 이’라고 부르는 것을 두고 다툼이 일자, 그는 이 칭호를 꺼리고 ‘그리스도를 낳은 이’라고 부르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태어나시거나 고난받으실 수 없으니, 마리아가 낳은 것은 말씀이 성전에 머무시듯 머무신 사람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기 몸을 성전이라 부르신 말씀은 (요 2:21) 안디옥 교사들이 즐겨 쓰던 그림이었습니다. 그가 지키려 한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람 되심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는 이것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과 마리아의 아들, 두 아들로 가르는 길이라고 보았습니다. 430년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 그는, 말씀이 이성적인 영혼을 지닌 육신을 참으로 자기 것으로 삼아 사람이 되셨으니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라고 썼습니다. 먼저 한 사람이 태어나고 나중에 말씀이 그 위에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말씀 자신이 육신으로 태어나시고 자기 육신으로 고난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하나님을 낳은 이라고 불려야 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낸 둘째 편지. 바울도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말합니다 (고전 2:8).
431년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소집한 에베소 공의회는 키릴루스의 편지를 받아들이고 네스토리우스를 면직했습니다. 그러나 회의는 안디옥의 요한과 동방 감독들이 도착하기 전에 열렸고, 늦게 온 이들은 따로 모여 키릴루스를 정죄했습니다. 433년에야 키릴루스와 안디옥의 요한이 한 고백문에 뜻을 모아 화해했고, 네스토리우스는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그가 정말 그리스도를 두 위격으로 나누었는지, 서툰 말로 오해를 샀는지는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 논의가 있습니다.
‘테오토코스’는 먼저 마리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입니다. 마리아가 낳은 아기가 바로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는 이 칭호로 마리아를 기리고 루터교회도 이 말을 씁니다. 개혁교회는 칭호는 잘 쓰지 않지만 그 뜻은 함께 고백합니다.
칼케돈: 네 마디의 울타리
이번에는 반대편 끝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나이 많은 수도원장 에우티케스는 네스토리우스에 맞서다가, 그리스도께서 연합 전에는 두 본성이었으나 연합 뒤에는 한 본성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 몸과 같은 본질이라고 고백하기를 망설였고, 448년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플라비아누스가 연 회의에서 정죄되었습니다.
로마의 감독 레오는 449년 플라비아누스에게 긴 편지를 보냈는데, 이것이 ‘레오의 교서’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를 잃지 않으신 채 종의 형체를 취하셨으며, 두 본성은 한 위격 안에서 저마다의 고유함을 지닌 채 서로 함께 일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레오 1세, 레오의 교서. 그가 붙든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들의 모습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빌 2:6-8
그러나 같은 해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디오스코루스가 이끈 둘째 에베소 회의는 레오의 편지를 읽지 않은 채 에우티케스를 복권하고 플라비아누스를 면직했습니다. 플라비아누스는 곧 세상을 떠났고, 레오는 이 회의를 ‘강도 회의’라고 불렀습니다.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가 죽고 마르키아누스가 황제가 되자, 451년 10월 콘스탄티노플 맞은편 칼케돈에 수백 명의 감독이 모였습니다.
공의회는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의 신경, 키릴루스의 편지들, 레오의 교서를 함께 읽었습니다. 처음 내놓은 초안은 그리스도가 ‘두 본성으로부터’ 한 분이시라고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에우티케스도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로마의 사절들이 반대하여 다시 다듬은 끝에 ‘두 본성 안에서’라는 말이 들어갔습니다. 낱말 하나를 두고 씨름한 것은 연합 뒤에도 두 본성이 그대로 있음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한 분이시며 동일하신 그리스도, 아들, 주, 독생자께서는 두 본성 안에서 혼합되지 않고, 변하지 않고, 나뉘지 않고, 분리되지 않고 인정되십니다. 본성들의 구별은 연합으로 말미암아 결코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각 본성의 고유성이 보존되어 한 위격과 한 자립체 안에서 함께 이루어지니, 그분은 두 위격으로 갈라지거나 나뉘지 않으시고 한 분이시며 동일하신 아들, 독생자, 말씀이신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칼케돈 신앙정의
여기서 ‘본성’은 그분이 무엇이신가를, ‘위격’은 우리가 흔히 인격이라 부르는 것으로 그분이 누구신가를 가리킵니다. 네 마디는 모두 ‘아니다’로 된 말입니다. ‘혼합되지 않고, 변하지 않고’는 에우티케스 쪽을, ‘나뉘지 않고, 분리되지 않고’는 네스토리우스 쪽을 막습니다. 공의회는 하나님과 사람이 어떻게 한 분 안에 계시는지를 다 설명하지 않고, 신비 둘레에 길을 잃지 않게 할 울타리를 쳤습니다. 그 기둥은 성경이었습니다. 그분 안에는 "그분 안에는 하나님의 신격의 모든 충만이 몸으로 거하고" (골 2:9), 그분은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니라." (히 4:15). 신앙정의가 그분을 두고 "죄 외에는 모든 일에서 우리와 같으십니다"라고 할 때 칼케돈 신앙정의, 이 말씀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안디옥이 낳은 설교자 크리소스토무스는 칼케돈보다 반세기 앞서 같은 균형을 말했습니다. 그는 요한복음 1:14의 ‘거하시매’를 이렇게 풉니다. "거하는 이는 거처와 같지 않고 다르기 때문입니다. 본성에 있어서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결합과 연합에 있어서는 말씀이신 하나님과 육신이 하나이며, 본질의 혼합이나 소멸이 없습니다" 크리소스토무스.
칼케돈을 받지 않은 교회들, 그리고 우리
모든 교회가 칼케돈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이집트의 콥트 교회, 시리아 교회, 아르메니아 교회, 에티오피아 교회 등 오늘 오리엔트 정교회라 불리는 교회들은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과 에베소는 받지만 칼케돈은 받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키릴루스의 표현을 따라 그리스도를 ‘말씀이신 하나님의 성육하신 한 본성’으로 고백합니다. 이 한 본성은 신성과 인성이 섞인 제3의 것이 아니라 섞임도 변화도 없이 하나가 되신 말씀 한 분을 가리키며, 그래서 이들도 에우티케스를 정죄하고 흔히 붙는 ‘단성론’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들은 ‘두 본성 안에서’라는 말이 네스토리우스의 길을 다시 열까 염려했고, 키릴루스의 후계자 디오스코루스를 면직한 공의회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에베소마저 받지 않은 동방 교회도 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 안의 이 교회는 안디옥 전통의 그리스도론을 지켰습니다. 다른 이들은 이들을 ‘네스토리우스파’라 불렀지만, 이 교회는 그 이름이 자기 신앙을 바르게 나타내지 않는다고 봅니다. 이 교회는 실크로드를 따라 복음을 전해 781년 당나라 장안에 그 내력을 새긴 비석을 세웠습니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
많은 역사가는 ‘본성’ 같은 말을 서로 다른 뜻으로 쓴 데다 제국의 정치와 지역 교회의 사정이 얽혀 갈라짐이 깊어졌다고 봅니다. 20세기에 시작된 대화에서 여러 교회는 표현은 달라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많은 부분을 함께 고백한다는 데 뜻을 모았지만, 완전한 교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공의회를 성경 위에 두지 않았지만 칼케돈은 성경에 맞는 고백으로 기꺼이 받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그 말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8장 2항. 칼케돈이 지키려 한 것은 결국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아니신 구주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고, 참으로 우리와 같지 않은 구주는 우리를 대신하실 수 없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를 끝까지 붙드시고, 사람이시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안에서부터 아십니다. 이 고백의 내용은 교리 과정의 성육신 과와 참 하나님, 참 사람 과, 그리고 하나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와 예수는 하나님인가?에서 더 다룹니다.
연습
- 연습 1 / 7
아폴리나리스는 그리스도에 대해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 연습 2 / 7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가 아폴리나리스에게 답한 원리는 무엇입니까?
- 연습 3 / 7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를 ‘테오토코스’(하나님을 낳은 이)라고 부르기를 꺼린 까닭은 무엇입니까?
- 연습 4 / 7
에우티케스가 말한 것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5 / 7
칼케돈의 네 마디 가운데 ‘나뉘지 않고, 분리되지 않고’가 막으려 한 생각은 무엇입니까?
- 연습 6 / 7
오리엔트 정교회(콥트, 시리아, 아르메니아, 에티오피아 교회 등)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7 / 7
다음 사건들을 일어난 순서대로 바르게 놓은 것은 무엇입니까?
출처
-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클레도니우스에게 보낸 첫째 편지 서신 101 / Epistle 101 — 382년경. 그리스도가 온전한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취하셨다고 가르친다. ‘취하지 않은 것은 치유되지 않는다.’
-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낸 둘째 편지 430 — 말씀이 육신과 하나 되어 한 그리스도이시며,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라고 변호한다. 에베소 공의회(431)에서 받아들여졌다.
- 레오 1세, 플라비아누스에게 보낸 서신(레오의 교서) 449 — 두 본성이 한 인격 안에서 저마다의 고유함을 지니며 함께 일한다고 가르쳐 칼케돈 공의회에 받아들여졌다.
- 동방 교회, 대진경교유행중국비 781 — 당나라에 기독교(경교)가 전해진 일을 기록한 비석.
성경과 교회의 신경, 교부와 신학자들의 글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복음주의 신앙에 서서, 각 전통과 신학자를 먼저 그들 자신의 말로 공정하게 소개한 뒤 성경에 비추어 살핍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