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와 성찬은 무엇인가?
세례와 성찬은 예수께서 직접 명하신 두 가지 거룩한 예식으로,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생명을 시작하는 일을, 성찬은 그분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그분과 교제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에 모두 동의하지만, 누구에게 세례를 줄 것인가와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계신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르게 이해해 왔습니다. 이 글은 그 차이를 가능한 한 공정하게 소개합니다.
성경의 답
교회는 예수께서 직접 명하신 두 가지 예식을 지켜 왔습니다. 하나는 세례이고 다른 하나는 성찬입니다. 많은 교회가 이것을 성례라 부르고, 어떤 교회는 규례라고 부릅니다. 가톨릭과 정교회는 일곱 성사를 말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이 둘을 중심에 둡니다. 먼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부터 보겠습니다.
세례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며
마 28:19
예수께서도 친히 세례를 받으셨고 (마 3:16), 오순절에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권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회개하고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 죄들의 사면을 얻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님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8). 바울은 세례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묻혔나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힘입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진 것 같이 우리도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게 하려 함이라.
롬 6:4
세례는 그리스도와 합하는 일입니다. 물 속에서 옛 삶이 장사되고 새 생명으로 일어난다는 그림입니다. 디도서는 이를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로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자신의 긍휼에 따라 다시 태어남의 씻음과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고"이라고 부릅니다 (딛 3:5). 구원은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긍휼로 되었다는 말과 같은 구절에서 이어집니다. 어느 전통도 물 자체에 구원하는 힘이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성찬은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식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또 그분께서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준 내 몸이라.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시고 저녁 식사 뒤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린 나의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라.
눅 22:19-20
바울은 이것을 교회에 "주께 받은 것"으로 전했고, 그 뜻을 이렇게 밝힙니다. "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기 때문이니라." (고전 11:23-26). 성찬은 지나간 십자가를 돌아보는 일이면서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또 바울은 이 식탁이 교제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많아도 한 빵이요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그 한 빵에 참여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라.
고전 10:16-17
성찬은 그리스도께 참여하는 일이자 서로가 한 몸임을 보여 주는 일입니다.
교회의 증언
니케아 신경은 죄 사함을 위한 하나의 세례를 고백합니다 니케아 신경. 사도신경은 본래 로마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 사람이 고백하던 신앙고백에서 자랐습니다 사도신경. 교회는 처음부터 세례와 성찬을 중심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 예식을 어떻게 이해할지에 대해서는 교회 안에 여러 입장이 있습니다. 한쪽을 편들지 않고 각 입장을 가장 좋은 모습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세례를 누구에게 줄 것인가. 유아에게도 세례를 주는 교회가 있습니다. 가톨릭, 정교회, 루터교, 성공회, 장로교와 감리교 등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손과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께서 부르실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니라, 하고"에게 미친다는 말씀 (행 2:39)과, 온 집안이 함께 세례를 받은 기록 (행 16:33), 그리고 구약의 할례가 언약의 표였고 바울이 할례와 세례를 나란히 놓는다는 점 (골 2:11-12)을 근거로 듭니다. 아기는 믿음으로 응답하기 전에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고, 세례는 그 은혜를 먼저 보여 준다고 봅니다. 가톨릭, 정교회, 루터교는 세례에서 하나님이 중생의 은혜를 주신다고 가르치고, 개혁교회 전통은 세례를 언약의 표와 인으로 이해합니다.
믿는다고 고백한 사람에게만 세례를 주는 교회도 있습니다. 침례교회와 많은 복음주의 교회입니다. 이들은 신약의 세례 기록이 모두 말씀을 듣고 믿은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믿고 나서 물에 내려갔습니다 (행 8:38). 온 집안의 세례에 대해서는 그 집안이 함께 말씀을 듣고 믿었다는 기록을 듭니다 (행 16:32-34). 세례가 죽음과 부활의 그림이라면 스스로 고백하는 사람이 받아야 한다고 이들은 봅니다. 주로 물에 잠기는 방식으로 줍니다.
히에로니무스는 마태복음 28장을 풀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먼저 모든 민족을 가르치고, 가르친 뒤에 물에 담급니다" 히에로니무스. 이 구절을 믿는 이에게만 세례를 주는 근거로 보는 이도 있고, 유아 세례를 배제하지 않는다고 보는 이도 있습니다. 유아 세례를 지지한 매튜 헨리는 세례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세례는 신자의 칭의를 인 치고 증거하는 그 내적 씻음, 곧 성령의 성화의 외적 표입니다" 매튜 헨리.
성찬에서 그리스도는 어떻게 계신가. 성찬을 지키는 교회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식탁에서 자기 백성을 만나신다고 말하지만, 방식에 대해서는 네 가지 이해가 두드러집니다. 가톨릭은 축성으로 떡과 포도주의 겉모습은 그대로이나 그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가르칩니다(화체설). 정교회도 실제의 변화를 고백하되 그 방식은 신비로 남겨 둡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 씁니다. "축성 이전에는 그것이 떡이나 … 선포된 후에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암브로시우스. 루터교는 떡과 포도주가 그대로 있으면서 그 안에, 그와 함께, 그 아래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참으로 계신다고 봅니다. 흔히 공재설이라 부르지만 루터교회는 '성례전적 연합'이라는 말을 씁니다. 개혁교회 전통은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 계시되 성령께서 믿음으로 먹는 사람을 그분과 실제로 연합시키신다고 이해합니다(영적 임재설). 츠빙글리를 따르는 교회와 많은 침례교회는 성찬을 주로 기념과 고백으로 이해하며(기념설), 떡과 잔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가리키는 표이고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모인 백성 가운데 계신다고 봅니다. 매튜 헨리 같은 개신교 해석자는 이렇게 씁니다. 먹는 것이 "떡이라 불리면서도 동시에 주의 몸이라고 하는데, 이는 사도가 떡이 살로 변한다는 뜻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매튜 헨리. 가톨릭 해석자들은 바울이 겉모습을 따라 떡이라 불렀을 뿐이며, 합당치 않게 먹는 자가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 빵과 이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가 있으리로다."는 말씀이 (고전 11:27) 실제 임재를 보여 준다고 답합니다.
그럼에도 모든 전통이 함께 붙드는 것이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떡은 많은 낟알로 만들어지고 포도주는 많은 포도 알에서 나옵니다. 이로써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나타내셨고, 자기의 식탁에서 우리의 평화와 일치의 신비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원어로 보기
세례로 옮기는 밥티조(βαπτίζω)는 본래 "담그다, 잠기게 하다"라는 뜻이며 씻는 일에도 쓰입니다. 그래서 물에 잠기는 방식을 강조하는 교회가 있고, 물을 붓거나 뿌리는 방식도 같은 씻음을 나타낸다고 보는 교회가 있습니다.
성찬의 "기념"으로 옮기는 아남네시스(ἀνάμνησις)는 "기억"입니다. 이 낱말의 뜻도 논쟁의 한 지점입니다. 어떤 이들은 지난 일을 마음에 떠올리는 일이라고 이해합니다. 다른 이들은 유월절 식사가 그랬듯, 기억함으로써 과거의 구원이 지금 우리에게 실제로 미친다는 뜻이 담겼다고 봅니다.
흔한 반론과 답
"물 한 번 뿌리고 빵 한 조각 먹는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 아닌가?" 이 반론은 진지합니다. 성경은 구원이 우리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베드로도 세례가 "그 일과 동일한 모형 곧 침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또한 우리를 구원하나니 (이것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요,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응답하는 것이니라.)"이라고 합니다 (벧전 3:21). 예식이 마법처럼 작용한다고 가르치는 전통은 없습니다. 갈라지는 것은 하나님이 이런 예식을 통로로 쓰시는 방식입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를 이 예식을 통해 실제로 주신다고 보고, 어떤 이들은 이미 받은 은혜를 눈에 보이게 확증하는 표라고 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직접 명하신 예식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니, 이상하고 미신 같다." 초기 교회도 이런 오해를 받았습니다. 바깥에서 보면 기이하게 들릴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언어는 예수의 말씀 "이것은 내 몸이라"에서 왔고, 그 뜻을 어떻게 이해할지는 교회 안에서도 갈립니다. 변화를 말하는 입장도, 성례전적 연합이나 영적 임재를 말하는 입장도, 기념을 말하는 입장도 모두 같은 구절을 붙들고 있습니다. 어느 입장에서든 성찬의 핵심은 미신적 의식이 아니라 십자가를 기억하고 그리스도께 참여하며 서로를 한 몸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바울이 성찬에서 "오직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뒤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실지니" 먹으라고 한 것도 (고전 11:27-29) 이 식탁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매튜 헨리는 두려워하는 신자가 이 말씀 때문에 낙심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입니다 매튜 헨리.
"교회마다 이해가 다르다면 어느 쪽이 맞는지 모르는 것 아닌가? 그냥 건너뛰어도 되지 않는가?" 정직한 생각입니다. 이 차이는 가볍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신실한 신자들이 성경을 깊이 읽고도 서로 다른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명하신 예식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전통이 같이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것을 명하셨고, 이것은 그분과 그분의 백성에게 속하는 일이며, 은혜로 받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아직 어느 쪽이 옳은지 모르겠다면,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한 교회의 이해를 존중하면서 배워 가는 것도 방법입니다. 이 글은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더 생각해 보기
세례는 한 번 받는 시작이고, 성찬은 되풀이해 받는 양식입니다. 하나는 ‘내가 그분께 속했다’는 선언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이 나를 먹이신다’는 고백입니다. 둘 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어서, 믿음이 약한 날에도 이 예식은 하나님이 먼저 약속하셨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세례를 받았습니까? 받았다면 그것이 내게 무슨 뜻입니까? 성찬의 떡과 잔을 받을 때 나는 무엇을 기억하고 누구와 연합하고 있습니까? 나와 다르게 이해하는 신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더 읽으려면 교회는 왜 필요한가?, 은혜란 무엇인가?, 예수는 왜 죽어야 했는가?를 보십시오. 로마서 6장과 고린도전서 11장을 천천히 읽는 것도 좋습니다.
관련 질문
- 교회는 왜 필요한가?성경은 교회를 건물이나 조직이기 전에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은 개인적이지만 혼자 하는 것이 아니어서, 말씀과 기도와 성례와 교제 속에서 자라도록 지어졌습니다. 교회는 상처와 실패를 남겨 왔으나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도 교회가 필요하다는 증언은 이어집니다.
- 은혜란 무엇인가?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값없이 베푸시는 호의와 선물이며, 그 선물은 우리를 용서하고 또 변화시킵니다. 성경은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은혜는 죄를 가볍게 만드는 면허가 아니라 새 삶을 가르치고 이루는 힘입니다.
- 믿음이란 무엇인가?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눈을 감고 어둠 속으로 뛰어드는 일이 아니라, 신실하신 분을 신뢰하고 그분께 자신을 맡기는 일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고, 선한 삶으로 열매를 맺으며, 의심 속에서도 도움을 구하는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향하는 분, 곧 그리스도께 구원이 있다고 고백해 왔습니다.
- 예수는 왜 죽어야 했는가?교회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고 고백해 왔습니다. 그 죽음은 하나님이 죄를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표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죄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 주는 표입니다. 십자가가 어떻게 구원하는지에 대해서는 몸값, 승리, 희생 제사, 대신 받으신 형벌, 사랑의 계시 같은 여러 그림이 있지만, 그것이 우리를 위한 일이며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왔다는 데에는 모두 한 목소리입니다.
관련 주제
출처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