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우울증은 믿음이 부족해서인가?

짧은 답

아닙니다. 우울증은 몸과 마음이 함께 앓는 병이지, 믿음에 대한 판결이 아닙니다. 엘리야와 시편 기자와 예레미야도 깊은 어둠을 지났고, 하나님은 그들을 꾸짖기보다 먼저 돌보셨습니다. 기도와 교회와 함께 의사와 상담의 도움을 받는 것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경의 답

먼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 하고 있다면, 이 글보다 먼저 바로 도움을 청하십시오. 한국에서는 109(자살예방상담전화, 24시간)나 1588-9191(생명의전화)로 전화할 수 있고, 위급할 때는 119에 연락하십시오. 다른 나라에서는 그 지역의 위기상담전화나 응급 번호로 전화하면 됩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우울증을 앓는 그리스도인이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기도가 부족해서 그렇다’, ‘믿음이 있으면 기뻐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말은 이미 무거운 마음에 죄책까지 얹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깊은 절망을 지난 믿음의 사람들이 많고, 하나님은 그들을 믿음 없는 자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큰 승리를 본 직후 광야로 도망하여 죽기를 구했습니다 (왕상 19:4). 하나님이 그에게 처음 하신 일은 설교가 아니었습니다.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고 떡과 물을 주었고, 그가 다시 잠들자 또 찾아왔습니다.

주의 천사가 다시 두 번째 와서 그를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갈 길이 네게 너무 머니라, 하므로

왕상 19:7

하나님은 엘리야의 힘이 다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먹이고 재우셨고, 그다음에 세미한 소리로 말씀하셨으며, 마지막에는 엘리사를 만나게 하셔서 그와 함께 길을 가게 하셨습니다 (왕상 19:19-21). 몸과 마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함께 돌보신 것입니다.

시편 42편의 기자는 "그들이 계속해서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므로 내 눈물이 밤낮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시 42:3). 그리고 자기 영혼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오 내 혼아, 어찌하여 네가 낙심하느냐? 어찌하여 네가 내 속에서 불안해하느냐?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분의 얼굴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내가 여전히 그분을 찬양하리로다.

시 42:5

이 물음은 42편과 43편에 걸쳐 세 번 되풀이됩니다 (시 42:11, 시 43:5). 어둠은 한 번에 걷히지 않았고, 그는 그 어둠 속에서 거듭 소망을 붙들었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없는 모습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싸우는 믿음입니다. 시편 88편은 끝내 "주께서 나의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들을 어둠 속에 두셨나이다."로 끝나지만 (시 88:18), 그 첫 줄은 "오 주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밤낮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입니다 (시 88:1).

신실한 선지자 예레미야는 "내가 태어난 날이 저주를 받았더라면, 내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이 복이 없었더라면"이라고 탄식했습니다 (렘 20:14). 바울은 "형제들아, 아시아에서 우리에게 닥친 우리의 고난에 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라. 우리가 힘에 겹도록 한량없이 눌려 심지어 생명까지도 단념하고"라고 썼습니다 (고후 1:8). 예수께서도 겟세마네에서 "이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혼이 심히 슬퍼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마 26:38). 죄 없으신 분이 깊은 슬픔을 겪으셨다면, 깊은 슬픔 자체를 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기도와 치료를 맞세우지도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온전한 자들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으나 병든 자들에게는 필요하니라.

마 9:12

바울은 동역자 누가를 "사랑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인사하느니라."이라고 불렀고 (골 4:14), 병이 잦은 디모데에게는 몸을 돌보라고 권했습니다 (딤전 5:23). 하나님은 사람을 영혼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가진 온전한 존재로 지으셨고, 그 전부를 돌보십니다. 우울증은 치료가 필요한 병입니다. 믿음이 깊은 사람도 걸릴 수 있으며, 이 병에 걸렸다는 것이 믿음에 대한 판결은 아닙니다.

교회의 증언

교부들은 그리스도께서 참 사람의 영혼을 가지셨기에 참으로 슬퍼하셨다고 강조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놀라시고 노하시고 슬퍼하셨다고 우리가 읽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암브로시우스는 겟세마네의 슬픔을 두고 "그분은 나의 영혼과 나의 몸을 취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씁니다 암브로시우스. 우리의 짓눌린 영혼을 아시는 분이 계신다는 뜻입니다.

매튜 헨리는 엘리야의 이야기에서 "큰 믿음이라 해서 언제나 똑같이 강한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합니다 매튜 헨리. 시편 88편을 풀면서는 이렇게 씁니다.

선한 사람들도 이처럼 크게 고난받을 수 있고, 자기의 고난에 대하여 이처럼 암울한 생각을 품을 수 있으며, 우울의 힘과 믿음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자기의 종말에 대하여 이처럼 어두운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매튜 헨리

그는 이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도 때로는 자기가 진노의 자녀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덧붙입니다 매튜 헨리. 우울 속에서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것이 실제로 버림받았다는 뜻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회의 역사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17세기 청교도 목사 리처드 백스터는 우울로 괴로워하는 이들을 위한 권면을 글로 남겼는데, 믿음의 위로와 함께 의사의 치료도 받으라고 권했습니다. 19세기의 설교자 찰스 스펄전은 자기가 되풀이해서 깊은 우울을 겪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말했습니다. 큰 믿음과 이 병은 한 사람 안에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원어로 보기

시편 42:5의 "낙망하며"는 히브리어 샤하흐(שָׁחַח)에서 왔습니다. 이 말은 ‘몸이 구부러지다, 낮게 엎드러지다’라는 뜻입니다. 시편 35:14에서는 어머니를 잃고 곡하는 사람처럼 "굽히고" 슬퍼하는 모습에 쓰였습니다 (시 35:14). 우울은 영혼이 무게에 눌려 허리를 펴지 못하는 상태라고 성경은 그립니다.

헬라어 구약인 칠십인역은 이 "낙망하며"를 페릴뤼포스(περίλυπος), 곧 ‘몹시 슬픈’이라는 말로 옮겼습니다. 놀랍게도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라고 하실 때 쓰신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낙망한 시편 기자의 탄식이 하나님의 아들의 입에 있었습니다. 우울한 사람은 하나님이 모르시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흔한 반론과 답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지 않는가? 우울한 것은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항상 주를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빌 4:4). 매튜 헨리도 시편 42편을 풀면서 낙심은 불신앙에서 나오니 기도하며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도 진실이 있습니다. 죄책이나 영적 싸움이 마음을 짓누르는 경우가 실제로 있고 (시 32:3-4), 시편 기자도 자기 낙망과 씨름합니다. 다만 헨리가 말한 것은 모든 신자가 싸워야 할 낙심이었고, 그는 시편 88편에서 우울이 선한 사람도 어둡게 할 수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또 빌립보서는 "참으로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셨고 그에게뿐 아니라 내게도 긍휼을 베푸사 내가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을 말하고 (빌 2:27), 바울은 다른 편지에서 자기를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며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소유한 자로다."라고 묘사했습니다 (고후 6:10). 주 안의 기쁨은 명령하면 켜지는 감정이 아니라 눈물 속에서도 하나님을 붙드는 신뢰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주신 권면을 병의 진단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기뻐하라는 말씀이 부러진 다리를 고치지 않듯, 우울증이라는 병도 그 말만으로 낫지 않습니다.

"약을 먹거나 정신건강의학과에 가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이사야는 병든 히스기야의 종처에 무화과 뭉치를 붙이라고 했습니다 (사 38:21). 치료의 수단을 통해 오는 회복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울증에는 흔히 잠과 식욕과 몸의 화학 작용, 생각의 습관, 관계의 상처가 함께 얽혀 있어서, 약과 상담은 그 각각을 돕습니다. 그것은 믿음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주신 떡과 물처럼, 다시 길을 걸을 힘을 줍니다. 교회는 ‘치료를 받고 있다’는 말을 안심하고 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도 낫지 않으면 내 믿음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바울은 세 번 간구했지만 가시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고후 12:8). 시편 기자는 "오 주여, 어느 때까지 나를 잊으려 하시나이까? 영원히 잊으려 하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어느 때까지 내게 숨기려 하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시 13:1). 매튜 헨리는 그 시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환난이 오래 계속될 때에는 그것이 언제까지나 계속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흔한 시험입니다" 매튜 헨리. 회복에는 시간이 걸리고, 믿음은 증상이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지로 재는 것이 아닙니다.

더 생각해 보기

지금 우울 속에 있다면 몇 가지를 권하고 싶습니다. 믿을 만한 한 사람에게 지금의 상태를 말하십시오. 의사나 상담자를 찾아가십시오. 엘리야처럼 먹고 자는 작은 일부터 돌보십시오. 기도할 말이 없으면 시편 42편을 그대로 읽어도 됩니다. 성령께서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로 할 수 없는 신음으로 친히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느니라."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롬 8:26). 교회 공동체에 짐을 나누십시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는 말씀은 당신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갈 6:2).

곁에 우울한 사람이 있다면 훈계하기보다 곁에 있어 주십시오. 바울도 "형제들아, 이제 우리가 너희에게 권면하노니 제멋대로 행하는 자들에게 경고하고 마음이 약한 자들을 위로하며 연약한 자들을 붙들어 주고 모든 사람에게 인내하라."라고 권합니다 (살전 5:14). ‘기도하면 낫는다’는 말 대신 함께 기도하고, 병원에 함께 가 주는 것이 큰 사랑일 수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내 마음의 상태를 하나님께 정직하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까? 도움을 청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주변에 말없이 지친 사람은 누구입니까?

더 읽으려면 고난에도 의미가 있는가?와 염려와 불안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를 보십시오. 열왕기상 19장과 시편 42-43편도 천천히 읽어 보십시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이 든다면, 지금 바로 109(자살예방상담전화, 24시간)나 1588-9191(생명의전화)로 전화하고, 위급하면 119에 연락하십시오. 다른 나라에서는 그 지역의 위기상담전화나 응급 번호로 전화하십시오. 당신은 혼자가 아니며, 도움은 언제나 있습니다.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