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The Puritans
청교도는 16–17세기 잉글랜드에서 성공회를 성경에 따라 더 철저히 정화하고 개혁하려 한 개혁파 개신교인들입니다. 말씀 중심의 예배와 설교, 주일과 가정 예배, 하나님 앞에서 사는 실천적 경건을 힘썼고,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와 존 오웬, 존 버니언 같은 이들의 글을 남겼습니다.
더 철저한 개혁을 바란 사람들
엘리자베스 1세 때인 1559년 잉글랜드 교회는 개신교의 교리와 함께 옛 교회의 감독 제도와 예복과 여러 예식을 남긴 채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것이 아직 반쯤 개혁된 것이라고 여긴 이들은 예배와 교회 정치와 삶을 성경에 따라 더 깨끗이 하자고 했고, 1560년대부터 반대자들은 이들을 ‘청교도’(Puritan)라고 비꼬아 불렀습니다. 대부분은 국교회 안에 남아 개혁을 바랐지만, 장로 정치를 주장한 이들도, 국교회를 떠난 분리주의자들도 있었습니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로 건너간 순례자들과 1630년대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이들도 이 흐름에 속합니다.
그들의 확신은 예배가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생각은 훗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이렇게 담겼습니다(규정 원리).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받으실 만한 방식은 하나님 자신이 정하셨고 그분의 계시된 뜻으로 제한되어 있어서, 그분은 사람들의 상상과 고안이나 사탄의 암시를 따라, 어떤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나 성경에 규정되지 않은 어떤 다른 방식으로 예배받으실 수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1
하나님 앞에서 사는 신학
청교도에게 신학은 머리의 지식만이 아니었습니다. 윌리엄 에임스가 신학을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삶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정의했듯, 그들의 신학은 흔히 ‘실천적 신학’이라 불립니다. 그들은 본문을 풀어 교리를 세우고 삶에 적용하는 쉬운 설교를 했고, 주일을 예배와 쉼의 날로 지켰으며, 집집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가정 예배를 힘썼습니다. 모세의 명령이 그들 가정의 모습이었습니다. "너는 그것들을 네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네가 네 집에 앉을 때에든지, 길을 걸을 때에든지, 누울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그것들을 말할 것이며" (신 6:7). 쫓겨난 청교도 목사의 아들 매튜 헨리는 이 구절을 풀며 "여기에 우리 마음과 집에서 신앙을 유지하고 지켜 나가는 방법들이 있습니다"라고 썼습니다 매튜 헨리.
내전 중인 1643년 의회가 부른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신앙고백과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을 내놓았습니다. 이 시대의 존 오웬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남은 죄를 죽이는 일을 깊이 썼고 오웬,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음의 죽음, 리처드 백스터는 목사가 교인을 집집마다 찾아가 가르치라고 권했으며 백스터, 참 목자상, 존 버니언은 감옥에서 『천로역정』을 구상했습니다 버니언, 천로역정. 1660년 왕정이 돌아온 뒤 1662년의 통일령으로 이천 명가량의 목사가 설교단을 잃었고, 그 뒤로 청교도의 후예는 비국교도로 살았습니다.
엇갈린 평가
성공회 쪽에서는 성경이 금하지 않은 일은 교회가 덕과 질서를 위해 정할 수 있다고 보아, 『공동기도서』의 예배와 감독 제도를 성경에 어긋나지 않는 개혁으로 변호했습니다. 루터교회도 대체로 이렇게 봅니다. 그래서 예배의 규정 원리는 오늘도 개혁교회와 다른 교회들 사이에서, 또 개혁교회 안에서도 그 적용을 두고 의견이 갈립니다.
청교도에게도 그늘이 있었습니다. 1640–50년대 권력을 쥐었을 때는 『공동기도서』를 지키던 많은 목사를 몰아냈고, 주일과 생활의 규칙이 때로 지나치게 엄격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요리문답과 경건 서적은 세대를 이어 읽혔고, 독일어로 옮겨진 책들은 경건주의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한국 장로교회도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로 신앙을 배웠습니다. 이 이야기는 정통주의와 청교도 과에서 이어집니다.
출처
- 존 오웬,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음의 죽음 1647
- 리처드 백스터, 참 목자상 1656
- 존 버니언, 천로역정 1678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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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