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셀무스와 스콜라 신학의 시작
11–12세기에 신학은 수도원에서 학교로 자리를 넓히며 믿는 것을 이성으로 이해하려 애썼습니다. 안셀무스는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성육신의 이유를 생각했고, 아벨라르의 질문하는 방법과 롬바르두스의 『명제집』은 새로 생긴 대학들의 신학을 낳았습니다.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
천 년 무렵까지 서방 교회의 신학은 주로 수도원에서 자랐습니다. 수도사들은 성경과 교부들의 글을 천천히 읽고 묵상하며 기도했습니다 (이 과정의 수도원, 선교, 동서 교회의 분열 과). 11세기에 도시가 커지고 대성당 학교들이 생기자 새 질문이 일어났습니다. 믿는 것을 이성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까? 믿지 않는 사람에게 그 믿음이 이치에 맞음을 보여 줄 수 있을까? 이 질문을 학교에서 따져 묻던 신학을 훗날 학교(스콜라)의 이름을 따서 ‘스콜라 신학’이라 불렀습니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1033–1109)는 이탈리아 북부 아오스타에서 태어나 1060년 무렵 노르망디의 베크 수도원에 들어갔고, 그곳의 원장을 거쳐 1093년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자유를 두고 잉글랜드 왕들과 부딪혀 두 번이나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그는 강단의 학자이기 전에 기도하는 수도사였고, 그의 글은 대개 기도이거나 제자와 나눈 대화입니다.
1077–1078년 무렵 쓴 『프로슬로기온』에 그가 처음 붙인 제목은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안셀무스, 프로슬로기온. 그는 믿기 위해 이해하려 하지 않고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고 말합니다. 믿음이 먼저이고, 이성은 믿는 것을 더 깊이 알고 사랑하려고 그 뒤를 따릅니다. 이 신학 과정에 적힌 라틴어 표어 ‘Fides quaerens intellectum’이 바로 이 말입니다.
이 책에서 안셀무스는 하나님을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라고 부릅니다. 시편은 "어리석은 자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 하였도다. 그들은 부패하여 가증한 일들을 행하였으니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는데 (시 14:1), 그 어리석은 자도 이 이름을 들으면 무슨 뜻인지 이해하므로, 그런 존재는 적어도 생각 속에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생각 속에만 있다면 실제로도 있는 존재를 생각할 수 있고, 그쪽이 더 큽니다. 그러므로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분은 생각 속에만이 아니라 실제로 계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시대의 수도사 가우닐로는 ‘어리석은 자를 위하여’ 답하며, 그렇다면 더없이 훌륭한 섬을 생각하기만 해도 그 섬이 있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안셀무스는 이 논증이 섬 같은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분께만 맞는다고 답했고, 두 사람의 글을 『프로슬로기온』과 함께 베끼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훗날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을 알지 못하므로 이 논증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한다고 보았고, 18세기의 칸트는 ‘존재한다’는 말이 어떤 것의 개념에 무엇을 더해 주지 않는다며 비판했습니다. 이 논증은 지금도 철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입니다. 다만 안셀무스에게 이 글은 먼저 기도였습니다. 『프로슬로기온』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드리는 말로 쓰였습니다.
하나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
1098년, 망명 중이던 안셀무스는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를 마무리했습니다 안셀무스,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 제자 보소와 나누는 대화로 쓴 이 책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고난받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 걸맞지 않다는 반론에 답하려 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잠시 제쳐 두고도 이성이 따라올 수 있는 이유를 찾으려 했습니다.
그의 답은 이렇습니다. 이성을 가진 모든 피조물은 자기 뜻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하고, 그것이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예입니다. 죄는 그 영예를 드리지 않는 것, 곧 갚아야 할 빚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그냥 넘기실 수 없으니, 빼앗은 것보다 더한 것으로 갚는 만족이 있거나 형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빚지고 있어 따로 드릴 것이 없고, 하나님을 거스른 죄의 무게는 온 세상보다 큽니다. 갚아야 할 이는 사람이지만 갚을 수 있는 이는 하나님뿐이니,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분이 오셔야 했습니다. 죽을 빚이 없는 죄 없는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목숨을 드리셨고, 그 무한한 선물에 따르는 상을 형제들에게 돌리셨다는 것입니다. 안셀무스는 마귀가 사람에 대한 권리를 가졌기에 하나님이 몸값을 치르셨다는 옛 설명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성으로 논증하려 했지만, 그의 생각 밑에 있는 말씀은 분명합니다. 히브리서는 아들이 왜 우리와 같은 혈육을 입으셔야 했는지 말합니다.
그런즉 자녀들은 살과 피에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의 일부를 취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죽음을 통해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또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 내려 하심이라. 진실로 그분께서는 자기 위에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 위에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도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서 그분께서 자기 형제들과 같게 될 필요가 있었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서 긍휼 많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이 되사 백성의 죄들로 인해 화해를 이루려 하심이라.
히 2:14-17
웨슬리는 이 ‘마땅하도다’를 두고 "매우 적합하고 합당하며, 참으로 필요한 일이었습니다"라고 풉니다 웨슬리. 안셀무스가 물은 것도 성육신이 하나님께 걸맞으면서 꼭 필요한 일이었는가였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내가 말하거니와 이때에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사 자신이 의롭게 되며 또 예수님을 믿는 자를 의롭게 만드는 이가 되려 하심이라."을 말합니다 (롬 3:26). 하나님은 죄를 가볍게 넘기지 않으시면서 죄인을 용서하십니다.
안셀무스의 만족설은 서방 신학에 오래 남았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를 받아들여 다듬었고 (이 과정의 토마스 아퀴나스 과),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이 받을 형벌 자체를 대신 받으셨다고 가르쳤습니다. 안셀무스가 ‘만족이 아니면 형벌’이라고 둘을 나누었다면, 개혁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형벌을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다고 본 셈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은 안셀무스의 물음을 따라가듯 묻고 답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중보자와 구속자를 찾아야 합니까? 참되고 죄 없는 사람이시면서도 모든 피조물보다 더 능력 있는 분, 곧 동시에 참 하나님이신 분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5문
매튜 헨리도 빚과 만족의 말로 로마서를 풉니다. "보증인이 이미 갚았고 그분이 그 갚음을 온전한 만족으로 받으셨는데도 빚을 요구하신다면 그것은 그분의 공의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매튜 헨리.
비판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설명이 주군의 체면을 중시하던 중세 사회를 닮았고, 하나님의 사랑보다 영예를 앞세우며, 그리스도의 삶과 부활과 악에 대한 승리를 작게 다룬다고 봅니다. 안셀무스를 변호하는 이들은 그가 말한 영예가 하나님의 허영이 아니라 창조 세계의 바른 질서이며, 그가 책 끝에서 이보다 더 크고 의로운 자비를 생각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는 점을 듭니다. 속죄를 설명하는 여러 그림은 교리 과정의 십자가와 속죄 과에서, 이 물음은 하나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와 예수는 왜 죽어야 했는가?에서 더 다룹니다.
질문하는 학교들
안셀무스 뒤로 파리의 학교들에서 가장 이름난 선생은 피에르 아벨라르(1079–1142)였습니다. 날카로운 논리학자였던 그는 엘로이즈와의 사랑과 그 비극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1120년대 무렵 그가 엮은 『예와 아니오』(Sic et Non)는 150개가 넘는 질문마다 서로 어긋나 보이는 성경과 교부들의 말을 나란히 모았습니다. 교부들을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말뜻과 문맥과 본문의 진위를 따져 그 어긋남을 풀도록 학생들을 훈련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의심이 탐구로, 탐구가 진리로 이끈다고 말했습니다. 질문을 세우고 양쪽 근거를 들은 뒤 답하는 이 방법은 스콜라 신학의 뼈대가 되었습니다.
아벨라르는 『로마서 주석』에서,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우리 마음에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그 사랑이 우리를 죄의 종살이에서 자유롭게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아벨라르, 로마서 주석. 요한도 "우리가 그분을 사랑함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요일 4:19). 이 생각은 훗날 ‘도덕 감화설’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같은 주석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의 형벌을 지셨다고도 말하기에, 많은 학자는 이것을 그의 생각 전부로 보지 않습니다.
시토회 수도원장 클레르보의 베르나르(1090–1153)는 아벨라르를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는 아벨라르가 하나님의 신비를 이성의 저울에 다 달려 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사랑의 본보기로 줄인다고 보았습니다. 베르나르가 앞장선 1140년 또는 1141년의 상스 공의회는 아벨라르의 여러 명제를 정죄했습니다. 아벨라르는 로마에 호소하러 가던 길에 클뤼니 수도원에 머물며 베르나르와 화해했고, 1142년 클뤼니에 속한 한 수도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파리의 노트르담 학교에서 가르치고 훗날 파리 주교가 된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약 1100–1160)는 1150년대에 교부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주제별로 모은 『명제집』 네 권을 펴냈습니다 페트루스 롬바르두스, 명제집. 하나님과 삼위일체, 창조와 죄, 성육신과 덕, 성례와 마지막 일을 차례로 다룬 이 책은 다툼이 되는 질문마다 양쪽 권위를 들고 차분히 판단했습니다. 이 책이 꼽은 일곱 성례는 서방 교회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1200년 무렵 파리와 옥스퍼드에서는 선생과 학생들의 조합인 대학이 자라났습니다. 13세기부터 대학에서 신학 교수가 되려면 먼저 『명제집』을 강의해야 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도 오컴의 윌리엄도 그 주석을 썼습니다. 16세기 초 젊은 마르틴 루터도 에르푸르트에서 이 책을 강의했습니다. 『명제집』은 수백 년 동안 서방 신학의 교과서였습니다.
믿음을 섬기는 이성
이 시대가 남긴 것은 무엇일까요? 안셀무스와 스콜라 신학자들은 믿음이 생각을 멈추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베드로는 "오직 너희 마음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 너희에게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며"라고 말합니다 (벧전 3:15). 이성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어서, 믿는 내용을 분명히 말하고 반론에 답하며 성경의 여러 말씀을 함께 생각하도록 돕습니다. 오늘 우리가 교리를 질문과 답으로 배우는 것도 이 전통의 열매입니다.
위험도 함께 드러났습니다. 이성이 믿음을 섬기지 않고 그 위에 서면, 성경이 침묵하는 데까지 캐묻는 사변이 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러나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들을 피하라. 네가 알거니와 그것들은 다툼을 일으키느니라."고 하고 (딤후 2:23), 고린도 교회에는 "이제 우상들에게 바친 것들에 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로 아나니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 주느니라."라고 말합니다 (고전 8:1). 베르나르의 염려에도 들을 만한 것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훗날 스콜라 신학이 성경보다 철학의 질문에 끌려갔다고 비판했지만, 그들 자신도 이 학교들이 다듬은 논리와 방법으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안셀무스가 그랬듯, 가장 좋은 신학은 무릎 꿇고 하는 생각입니다.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알수록 더 사랑하고 예배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과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로 이어집니다.
연습
- 연습 1 / 7
안셀무스가 『프로슬로기온』에 처음 붙인 제목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이 뜻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2 / 7
안셀무스는 하나님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며 그분의 존재를 논증했습니까?
- 연습 3 / 7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에서 안셀무스가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분이 필요하다고 본 까닭은 무엇입니까?
- 연습 4 / 7
안셀무스의 만족설과 종교개혁자들의 형벌 대속을 바르게 견준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5 / 7
아벨라르의 『예와 아니오』는 어떤 책이었습니까?
- 연습 6 / 7
아벨라르의 생각을 반대하며 상스 공의회의 정죄에 앞장선 사람은 누구입니까?
- 연습 7 / 7
중세 대학에서 수백 년 동안 신학 교과서로 쓰인 책은 무엇입니까?
출처
성경과 교회의 신경, 교부와 신학자들의 글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복음주의 신앙에 서서, 각 전통과 신학자를 먼저 그들 자신의 말로 공정하게 소개한 뒤 성경에 비추어 살핍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