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도 감정이 있으신가?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기뻐하시고 슬퍼하시고 노하신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이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하나님은 사람처럼 감정에 휘둘리거나 바깥의 일에 압도되는 분이 아니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겪으시는지에 대해서는 교회 안에서 지금도 논의가 계속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관심하지 않으시다는 점에는 모두가 뜻을 같이합니다.
성경의 답
성경의 하나님은 차가운 원리가 아니라 마음을 가진 분으로 나타납니다. 창세기는 홍수 이전의 세상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주께서 땅 위에 사람을 만드신 것으로 인해 슬퍼하시며 또 그것으로 인해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 6:6
하나님은 근심하십니다. 신약에서 바울은 성령에 대해 같은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봉인되었느니라.
엡 4:30
슬픔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바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 때문에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네 한가운데 계시는 주 네 하나님은 능하신 이시니 그분께서 구원하시고 너로 인해 기뻐하며 즐거워하시고 친히 사랑하시는 가운데 안식하시며 너로 인해 노래를 부르고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습 3:17
예수께서도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 큰 기쁨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눅 15:7).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마음속 갈등을 보여 줍니다. 반역하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버리겠느냐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주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넘겨주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만들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매 내가 뜻을 돌이키는 것이 한꺼번에 불같이 타오르는도다.
호 11:8
하나님의 분노도 감정을 가진 분의 모습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분노를 변덕이 아니라 사랑과 짝지어 말합니다. 하나님은 "주께서 그 앞으로 지나가시며 선포하시되, 주로다. 긍휼이 많고 은혜롭고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한 주 하나님이로다."이십니다 (출 34:6). 바로 그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은 "내가 내 맹렬한 분노를 집행하지 아니하며 돌아와서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나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니라. 나는 네 한가운데 있는 거룩한 자니 내가 그 도시로 들어가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호 11:9).
그런데 성경은 다른 쪽도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처럼 마음이 흔들리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는도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은즉 그것을 행하지 아니하시리요? 그분께서 이르셨은즉 그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시리요?
민 23:19
"나는 주라 변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너희 야곱의 아들들이 소멸되지 아니하였느니라." (말 3:6),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에서 오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오거니와 그분께는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느니라." (약 1:17). 한쪽에서는 하나님이 한탄하시고 기뻐하신다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후회하지 않으시고 변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어떻게 함께 붙잡을 것인가가 이 질문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신약은 이 질문을 한 사람의 얼굴로 보여 줍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께서는 마리아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녀가 우는 것과 또 그녀와 함께 온 유대인들도 우는 것을 보시고 영으로 신음하시며 괴로워하시고" 그를 어디 두었느냐고 물으십니다 (요 11:33-34).
예수님께서 우시더라.
요 11:35
그분은 곧 나사로를 살리실 것을 알고 계셨는데도 우셨습니다.
교회의 증언
교회는 성경의 이 두 가지 말씀을 모두 지키려 했습니다. 고전적인 이해는 하나님이 ‘수난 불가능’하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감정이 없는 돌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람의 정념처럼 바깥에서 오는 일에 압도되거나 기분이 오르내리거나 고통에 휘둘리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2장 1절)과 성공회 39개 신조(제1조)는 하나님을 몸도 부분도 정념도 없으신 분으로 고백합니다. 칼뱅은 성경이 하나님의 후회를 말할 때 그것을 우리의 이해 정도에 맞추어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어 말씀하시는 방식으로 보았습니다 칼뱅, 기독교 강요 1.17.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이 정념이 아니라 변함없는 뜻의 활동이며, 슬픔과 분노는 비유로 하나님께 돌리는 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매튜 헨리는 창세기 6:6을 풀며 하나님이 죄를 보시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분은 죄를 "자애로운 아버지가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자식의 어리석음과 고집을 보는 것처럼" 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곧 이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여기 쓰인 말은 "사람의 방식을 따라 쓰인 것이며, 하나님이 변하실 수 있다거나 불행해지실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매튜 헨리. 민수기 23:19에서도 그는 성경이 하나님이 뉘우치신다고 할 때, 그것은 "그분의 마음이 바뀐다는 뜻이 아니라 그분의 방식이 바뀐다는 뜻일 뿐"이라고 합니다 매튜 헨리. 한편 요한복음 11장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께서 민망히 여기신 것은 그렇게 되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며, 그분이 이런저런 감정을 받으실지는 "그분의 권한 안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알퀴누스는 그분이 인성으로 우신 까닭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은 긍휼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알퀴누스. 칼케돈 신앙정의는 한 위격 안에서 두 본성이 혼합되지도 나뉘지도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칼케돈 신앙정의. 그래서 교회는 성자께서 인성으로 우시고 고난받으신 일이 그분의 신성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이해해 왔습니다.
이 점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활발히 논의됩니다. 20세기에 많은 신학자가 이 교리를 비판했습니다. 이 개념은 성경보다 그리스 철학에서 왔고, 고난받을 수 없는 하나님은 참으로 사랑하실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십자가를 하나님 자신이 고난에 들어오신 사건으로 읽었고, 유대교 학자 아브라함 헤셸은 예언자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파토스’, 곧 사람의 일에 깊이 마음 쓰시는 하나님을 강조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약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로 스스로 택하셔서 고난을 겪으신다고 말합니다. 고전적 입장을 지키는 이들은 이 교리가 철학이 아니라 성경에서 나왔다고 답합니다. 하나님이 피조물이 일으키는 감정에 좌우되신다면 우리가 의지할 반석이 될 수 없으며, 그분의 사랑은 정념이 아니어서 덜한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기에 더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양쪽 모두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무관심하지 않으시다고 고백합니다.
원어로 보기
창세기 6:6에서 하나님이 "한탄하사"라고 할 때의 히브리어 나함(נָחַם)은 "후회하다", "뜻을 돌이키다", 또는 "위로하다"까지 뜻하는 낱말입니다. "마음에 근심하시고"는 아차브(עָצַב)에서 온 말로 "아프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낱말은 사람이 겪는 아픔에도 쓰이며, 본문은 하나님의 아픔을 매우 강하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민수기 23:19에서는 같은 동사로 "후회"가 부인되므로, 성경 자신이 이 말들을 사람의 변덕과는 다른 뜻으로 쓰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4:30의 "근심하게 하다"는 헬라어 뤼페오(λυπέω)로, "슬프게 하다"입니다. 성령이 슬퍼하실 수 있다는 것은 성령이 인격이시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1:35의 "눈물을 흘리시더라"는 다크뤼오(δακρύω)입니다. 33절에서 "통분히 여기시고"로 옮긴 엠브리마오마이(ἐμβριμάομαι)는 원래 거칠게 숨을 내쉬는 것과 연결된 말로, 슬픔과 함께 죽음을 향한 격한 감정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흔한 반론과 답
"그런 말씀은 인간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그린 비유일 뿐이다. 감정이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 때문에 상처받고 흔들리는 약한 분이 아닌가?" 이 반론에는 힘이 있습니다. 전능하고 영원한 분이 피조물의 행동에 휘둘린다면 그분은 신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성경의 표현이 사람의 말을 빌린 것이라는 점도 맞습니다. 칼뱅과 매튜 헨리가 그렇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비유라고 해서 허구는 아닙니다. 비유는 실재를 가리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고 우리 일에 응답하시며, 우리의 죄를 악으로 여기시고 우리의 돌아옴을 기뻐하신다는 실재를 가리키는 데 이 말들을 씁니다. 하나님이 감정을 가지셨다 해도 그것은 우리의 감정처럼 바깥에서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사랑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교회는 이해해 왔습니다.
"감정이 없는 하나님이 내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십자가는 하나님이 고난받으셨다는 뜻이 아닌가?" 이것은 진지한 질문이며,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특히 그렇습니다. 위에서 보았듯 교회 안에는 이에 대해 서로 다른 답이 있습니다. 고전적 입장은 성자께서 인성으로 실제로 고난받으셨다고 말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고난에 참여하셨다고 봅니다. 다른 입장은 하나님이 신성 안에서도 고난에 참여하신다고 말합니다. 어느 쪽에서든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에게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하는 대제사장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히 4:15). 고통 중에 하나님이 나를 모르신다고 느껴질 때, 예수의 눈물은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화를 내신다는 것은 모순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가 아는 분풀이나 성질과 다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 안에서 진리를 붙잡아 두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아니한 것과 불의를 대적하여 하늘로부터 계시되었나니"을 향해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롬 1:18). 사랑하는 사람이 파괴되는 것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 오히려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내가 조금 진노하는 가운데 내 얼굴을 잠시 네게 숨겼으나 영존하는 친절로 네게 긍휼을 베풀리라. 주 네 구속자가 말하노라."고 하십니다 (사 54:8). 진노는 "잠시"이고 자비는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사랑이 악을 대하는 모습으로 이해됩니다.
더 생각해 보기
"하나님도 감정이 있으신가?"라는 질문 아래에는 대개 다른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돌보시는가, 내 아픔에 마음을 쓰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자기 백성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사람이 되셔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하나님의 감정을 어떤 말로 설명하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관심하지 않으시다는 것이 성경의 중심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멀리 있는 힘으로 상상해 왔습니까, 아니면 나를 아시고 기뻐하시는 분으로 상상해 왔습니까? 지금 나의 아픔을 하나님께 숨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신 장면은 나에게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말해 줍니까?
더 읽으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은 마음을 바꾸시는가?와 예수는 하나님인가?를 보십시오. 요한복음 11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읽어 보는 것도 좋은 시작입니다.
관련 질문
-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성경은 하나님을 철학의 개념으로 그리지 않고, 스스로 자기를 알리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그분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으시며, 거룩하시고,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창조주요 아버지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셨다고 믿습니다.
- 하나님은 마음을 바꾸시는가?성경은 하나님이 변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다고 기록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그 존재와 성품과 목적에서 변하지 않으신다고 고백해 왔고, 뜻을 돌이키심은 사람의 돌이킴에 응답하시는 그분의 행하심을 가리킨다고 읽어 왔습니다. 이 본문들을 어떻게 이해할지는 지금도 논의되지만, 어느 쪽이든 기도는 헛되지 않습니다.
- 예수는 하나님인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사람이시라고 고백해 왔습니다. 교회는 이것이 후대에 덧붙인 교리가 아니라 신약의 증언을 따라 니케아 공의회가 정리한 것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아들은 아버지와 구별되면서도 같은 본질을 가지신다는 것이 그 뜻입니다.
- 선하신 하나님이 왜 악을 허락하시는가?성경은 이 질문을 피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도 주지 않습니다. 세상은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죄로 망가졌고, 하나님은 악 가운데서도 선을 이루시며, 욥에게는 설명 대신 당신 자신을 보이셨고, 십자가에서는 고난 속으로 직접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악이 끝나는 날을 약속하십니다.
관련 주제
출처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