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1과

신학이란 무엇인가

신학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일, 곧 믿음으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기를 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모든 신자가 이미 신학을 하고 있으니 문제는 그것을 참되게 하느냐이며, 바른 신학은 겸손을 배우고 예배로 끝납니다.

하나님에 대한 말

‘신학’으로 옮기는 ‘테올로기아’(theologia)는 헬라어 두 낱말, 곧 하나님을 뜻하는 와 말씀, 말을 뜻하는 가 합쳐진 말입니다. 글자 그대로는 ‘하나님에 대한 말’입니다. 이 낱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일은 성경 전체가 우리를 부르는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잡히시던 밤에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초대 교회에게 신학은 학교의 한 과목이기 전에 하나님을 알고 찬양하는 일이었습니다. 4세기 콘스탄티노플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설교들을 남긴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동방 교회에서 오늘까지 ‘신학자’라는 이름으로 기억됩니다. 같은 시대의 수도사 에바그리우스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말도 있습니다. 신학자라면 참되게 기도할 것이요, 참되게 기도하는 이가 곧 신학자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아는 일과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떼어 놓지 않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요한복음 17:3을 풀며 같은 곳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면, 이 지식에서 우리가 나아갈수록 영생에서도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이 대학에서 가르치는 학문의 이름으로 자리 잡은 것은 훨씬 뒤, 중세에 학교와 대학이 생겨나던 12–13세기 무렵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신학의 뿌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생명이라는 이 고백이었습니다.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

훗날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된 안셀무스는 노르망디의 베크 수도원에 있던 1077–1078년에 『프로슬로기온』을 썼습니다. 그는 서문에서 이 책에 처음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밝힙니다. 이 책은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로 시작하고, 1장 끝에서 안셀무스는 믿기 위해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안셀무스, 프로슬로기온 서문과 1장. 믿지 않으면 깨닫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먼저이고 이해가 그 열매라고 가르친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을 이은 말입니다.

이 말은 신학이 무엇인지 잘 보여 줍니다. 신학은 믿지 않던 사람이 증거를 모아 하나님을 믿기로 결정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믿는 사람이 하나님이 알려 주신 것을 더 깊이, 더 바르게 깨닫고자 애쓰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신학은 목회자나 학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아이가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물을 때, 우리가 기도하고 찬송할 때, 슬픔에 잠긴 벗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할 때, 우리는 이미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음은 신학을 하느냐가 아니라 참되게 하느냐입니다.

성경은 생각하는 믿음을 요구합니다. 예수께서는 가장 큰 계명으로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마 22:37). 바울은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그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하고 (롬 12:2), 디모데에게는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고 합니다 (딤후 2:15). 베드로는 모든 신자에게 "오직 너희 마음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 너희에게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며"라고 말합니다 (벧전 3:15). 대답은 준비해야 하고, 그 대답은 온유하게 해야 합니다.

신학의 한계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자신을 알리셨기 때문입니다 (교리 과정의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심 과 참고).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정리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신학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데까지 가고 거기서 멈춥니다. 모세는 "은밀한 일들은 주 우리 하나님께 속하거니와 계시된 그 일들은 영원토록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속하나니 이것은 우리가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신 29:29).

하나님은 친히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과 같지 아니하며 내 길들은 너희 길들과 같지 아니하니라. 주가 말하노라."라고 하십니다 (사 55:8).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그 길과 생각이 우리보다 높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나 그때에는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며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 같이 나도 알리라."라고 고백합니다 (고전 13:12).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참되게 알지만 다 알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이 알려 주신 것은 참되고 믿을 만하지만, 우리의 지식은 언제나 부분적이고 자랄 여지가 있습니다.

또 하나의 위험은 지식이 사람을 높이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우상들에게 바친 것들에 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로 아나니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 주느니라."라고 경고하고 (고전 8:1), 이어서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분께서도 바로 그 사람을 아시느니라."고 말합니다 (고전 8:3). 신학의 목표는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알려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의 말처럼 "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가장 많이 아는 사람들은 자기 연약함을 가장 많이 느낍니다" 매튜 헨리.

예배로 끝나는 신학

로마서 9–11장에서 바울은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물음들과 씨름합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긍휼, 이스라엘과 이방인,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입니다. 세 장에 걸친 깊은 논증 끝에 바울은 마지막 공식이 아니라 찬양을 내놓습니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들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들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느냐?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되었느냐? 누가 그분께 먼저 드려서 다시 보답을 받겠느냐?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으며 그분께로 돌아가나니 영광이 그분께 영원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롬 11:33-36

매튜 헨리는 이 구절에서 바울이 바닥을 찾지 못한 채 겸손히 그 가장자리에 앉아 깊이를 경배한다고 풀고, "하늘의 성도들은 결코 논쟁하지 않고 언제나 찬양합니다"라고 맺습니다 매튜 헨리. 아우구스티누스도 하나님을 충만히 알게 될 날을 바라보며 "하나님에 대한 충만한 지식이 있는 곳에는 끝없는 하나님 찬양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참된 신학은 머리에서 끝나지 않고 무릎을 꿇는 데서 끝납니다.

이 과정은 이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처음 여섯 과는 입문입니다. 다음 과에서는 신학이 무엇을 근거로 말하는지(신학의 원천)를, 이어서 성경을 해석하는 길과 신학의 여러 갈래, 신학을 공부하는 법을 살핍니다. 그 뒤 열여덟 과는 교부들로부터 약 1900년까지 교회가 어떻게 생각하고 고백해 왔는지를 초대 교회, 중세, 종교개혁, 종교개혁 이후의 순서로 따라가며, 큰 사건들은 연표에서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는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에서 더 다룹니다.

연습

  1. 연습 1 / 7

    ‘신학’(theologia)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무슨 뜻입니까?

  2. 연습 2 / 7

    안셀무스가 『프로슬로기온』에 처음 붙였던 이름은 무엇입니까?

  3. 연습 3 / 7

    이 과에 따르면 신학은 누구의 일입니까?

  4. 연습 4 / 7

    신명기 29:29가 신학에 가르쳐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5. 연습 5 / 7

    고린도전서 8:1-3에서 바울이 지식에 관해 경고하고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6. 연습 6 / 7

    로마서 9–11장의 깊은 논증 끝에 바울은 무엇을 내놓습니까?

  7. 연습 7 / 7

    동방 교회가 오늘까지 ‘신학자’라는 이름으로 기억하는 4세기 교부는 누구입니까?

출처

  1.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프로슬로기온 1077–1078 —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으로 쓴 기도이자 논증. 하나님을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논한다. 읽기

성경과 교회의 신경, 교부와 신학자들의 글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복음주의 신앙에 서서, 각 전통과 신학자를 먼저 그들 자신의 말로 공정하게 소개한 뒤 성경에 비추어 살핍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