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이단은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짧은 답

이단을 분별하는 기준은 사람의 인상이나 규모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복음, 성경, 그리고 열매입니다. 예수가 누구이신지, 구원이 무엇으로 말미암는지, 성경 위에 다른 권위를 세우는지, 지도자가 자기를 높이는지, 사람을 묶고 고립시키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견해 차이는 이단이 아니며, 분별은 정죄가 아니라 사람을 지키려는 사랑에서 나와야 합니다.

성경의 답

이단을 분별하는 일은 두 위험 사이를 걷는 일입니다. 하나는 무엇이든 믿어 버리는 순진함이고, 다른 하나는 나와 다른 모든 사람을 의심하는 날카로움입니다. 성경은 둘 다 경계합니다. 먼저 순진함에 대해 요한은 이렇게 씁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그것들을 시험하라. 이는 많은 거짓 대언자들이 나와서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이라.

요일 4:1

시험의 기준은 바로 이어집니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라.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하였으며"이라고 합니다 (요일 4:2). 첫째 표지는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께서 누구이신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으로 오셨는지,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이 구원의 중심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이 점은 예수는 하나님인가?에서 더 살펴볼 수 있습니다.

둘째 표지는 복음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에게 배운 것과 다른 것을 따르려 하자, 바울은 이례적으로 강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전에 말한 것 같이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너희가 받아들인 것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9

문제가 된 것은 은혜로 받는 구원에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외에 구원에 필요한 조건을 더하는 가르침도, 은혜를 방종의 허가증으로 바꾸는 가르침도 "다른 복음"에 속합니다. 바울은 그러면서도 같은 구절에서 "그것은 또 다른 참 복음이 아니며 다만 너희를 어지럽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 하는 자들이 더러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갈 1:7). 복음은 새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받은 것입니다.

셋째 표지는 열매입니다. 예수께서는 거짓 선지자를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거짓 대언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은 약탈하는 이리니라.

마 7:15

겉모습만으로는 가려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십니다 (마 7:20). 열매는 가르침이 낳는 삶입니다.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의 열매를 이렇게 짚습니다. "그들이 탐욕으로 말미암아 거짓된 말들을 가지고 너희를 상품 취급하리니 그들에 대한 심판은 오래되어 이제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이 받을 정죄는 잠자지 아니하느니라." (벧후 2:3). 사람의 돈과 시간과 삶을 거두어 가는 가르침은 의심해 볼 만합니다. 예수께서는 지도자의 길도 알려 주셨습니다. "너희끼리는 그리하지 말지니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마 20:26). 섬기지 않고 군림하는 지도자, 비판을 허락하지 않는 지도자는 표지가 좋지 않습니다.

이 기준들에서 흔히 보이는 경고 신호가 나옵니다. 지도자가 자기를 그리스도라 하거나 특별한 구원자로 내세우는 것, 성경 위에 새 계시나 자기 해석을 두는 것, 그리고 비밀과 통제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때에 누가 너희에게 이르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하거나, 저기 있다, 해도 그 말을 믿지 말라."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마 24:23). 또 날짜를 정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은 결코 아무도 알지 못하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알지 못하고 오직 내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 24:36

재림의 날짜를 안다고 하는 사람은 아들도 모른다고 하신 말씀과 부딪칩니다. 그리고 진리는 점검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들으면서도 "이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던 자들보다 더 고귀하여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므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행 17:11). 질문을 막고, 성경을 스스로 확인하지 못하게 하고, 가족과 다른 교회에서 떼어 놓는 곳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의 증언

교회는 이 분별을 오랫동안 해 왔습니다. 교회는 가장 근본적인 것을 신경으로 고백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이 그 중심입니다 니케아 신경. 반대로 세례의 방식, 예정과 자유의지, 성령의 은사, 종말의 순서 같은 문제에서는 신실한 교회들이 서로 다르게 생각하면서도 같은 신경을 고백합니다. 이런 차이는 이단이 아닙니다 (교회는 왜 이렇게 많이 나뉘었는가?). 바울도 로마서 14장에서 의견이 다른 형제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매튜 헨리는 요한일서 4:1을 풀며 "계시된 종교의 요약은 그리스도의 위격과 직분에 관한 교리에 있습니다"라고 씁니다 매튜 헨리. 같은 책에서 갈라디아서 1장을 풀면서는 태도를 알려 줍니다. "다른 사람들을 책망할 때 우리는 충실해야 하되 온유한 심령으로 그들을 바로잡으려고 힘써야 합니다" 매튜 헨리.

아우구스티누스는 산상설교를 풀며, 예수께서 좁은 문을 말씀하신 뒤 곧바로 거짓 선지자를 경고하신 까닭을 이렇게 봅니다. 그것은 "수가 적음을 이유로 흔히 자기를 내세우는 이단자들"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곧 소수라는 사실이 진리의 증거는 아닙니다. 히에로니무스는 이런 사람들이 "절제와 정결과 금식을 지킴으로써 마치 거룩함의 옷으로 자기들을 두르지만" 속은 다르다고 경고합니다 히에로니무스. 그는 마태복음 24장에서도, 누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감추어진 것을 약속하는 이들의 "골방"에 계신다고 주장하거든 "그를 믿지 말고" 온 세상 교회에 비치는 보편 신앙을 믿으라고 합니다 히에로니무스.

원어로 보기

"거짓 선지자"의 프슈도프로페테스(ψευδοπροφήτης)는 '거짓'과 '선지자'를 합친 말로, 하나님을 대신해 말하는 척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 말은 말의 내용뿐 아니라 그가 누구의 권위를 내세우는가를 묻게 합니다.

"이단"으로 옮겨지는 하이레시스(αἵρεσις)는 본래 "선택"이나 "당파"를 뜻하는 평범한 낱말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사두개파 같은 유대교의 한 파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후서 2:1에서는 "멸망케 할 이단"이 되어 주를 부인하는 가르침을 뜻하고, 디도서 3:10의 하이레티코스(αἱρετικός)는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곧 이 낱말에는 교리의 문제와 분열의 문제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요한일서 4:1의 "시험하라"는 도키마조(δοκιμάζω)입니다. 금속을 불에 넣어 순도를 가리듯 검사하는 말로, 데살로니가전서 5:21의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선한 것을 굳게 붙들라."와 같은 낱말입니다 (살전 5:21). 성경은 의심하라고만 하지 않고, 시험하여 좋은 것을 취하라고 합니다.

흔한 반론과 답

"이단이란 논쟁에서 이긴 쪽이 진 쪽에게 붙인 이름이 아닌가?" 이 말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교회사에서 '이단'이라는 낱말이 권력을 쥔 쪽의 무기가 되고, 때로는 잔혹한 박해로 이어진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한국 교회에서 '이단'이라는 말이 신학이 조금 다른 교회를 겨냥해 쉽게 쓰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낱말이 오용되었다는 사실이 기준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요한과 바울의 경고는 훗날 공의회보다 앞서며,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과 은혜의 복음 같은 기준은 신약 자체에 있습니다. 그래서 낱말을 붙이기 전에, 이 기준에서 정확히 무엇이 어긋나는지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은 친절하고 헌신적이다. 열매가 좋은데 왜 의심하는가?" 이 반론도 약하지 않습니다. 크리소스토무스도 "이단자들 가운데서는 선한 삶을 발견할 수 있는 경우가 많으나"라고 인정합니다 크리소스토무스. 겉으로 보이는 따뜻함과 열심은 가르침의 참됨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같은 곳에서 금식과 구제와 기도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면 '양의 옷'일 수 있다고 하면서도, 양이 자기 옷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곧 열심 자체를 의심할 것이 아니라, 열심이 어디를 향하는지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과 삶의 열매를 함께 보아야 하고, 한쪽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결국 자기와 다른 사람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 아닌가?" 분별이 의심이 되는 위험은 실제로 있습니다. 그래서 핵심과 주변을 구별해야 합니다. 핵심은 그리스도와 복음이고, 주변에서는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점검하라고 하지만 동시에 "온유한 심령"으로 하라고 합니다.

더 생각해 보기

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대개 두 부류입니다. 어떤 모임이 걱정되어 묻는 사람, 그리고 가까운 사람이 그런 모임에 들어가 있어 묻는 사람입니다. 앞의 분에게는 자신이 속한 곳을 점검할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가 누구라고 가르치는가, 성경을 내가 직접 읽고 물을 수 있는가, 떠나고 싶을 때 자유로운가, 나의 가족과 관계는 건강해지는가. 뒤의 분에게는 조언이 있습니다. 비난과 조롱은 상대를 더 안으로 몰아넣습니다. 관계를 끊지 말고, 논쟁에서 이기려 하기보다 질문하며 들어 주십시오. 함께 복음서를 읽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돌아올 자리를 열어 두는 것이 가장 큰 도움입니다. 필요하면 믿을 만한 목회자나 상담자에게 도움을 청하십시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내가 믿는 것 가운데 어떤 것이 핵심이고 어떤 것이 의견인지 구별할 수 있습니까? 나는 다른 견해를 가진 형제를 쉽게 정죄하는 편입니까? 내가 속한 곳에서 질문은 환영받습니까?

더 읽으려면 복음이란 무엇인가?와 성경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를 보십시오.

출처

  1.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니케아 신경 325/381 — 동서방 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신조. 읽기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