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거와 천년왕국은 무엇인가?
성경의 답
이 질문의 중심에는 두 본문이 있습니다. 하나는 요한계시록 20장의 천 년입니다. 요한은 천사가 사단을 붙잡아 묶는 환상을 이렇게 씁니다.
마귀요 사탄인 그 용 곧 저 옛 뱀을 붙잡으니라. 그가 그를 붙잡아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바닥없는 구덩이에 던져 넣어 가두고 그 위에 봉인을 하여 천 년이 찰 때까지는 그가 더 이상 민족들을 속이지 못하게 하니라. 그 뒤에는 그가 반드시 잠시 동안 풀려나리라.
계 20:2-3
이어서 요한은 보좌에 앉은 사람들, 곧 예수를 증거하다 죽은 이들이 "또 내가 보니 왕좌들과 그것들 위에 앉은 자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심판이 맡겨졌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님의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목 베인 자들의 혼들이 있는데 그들은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자기들의 이마 위에나 손 안에 짐승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더라. 그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통치하되"라고 하고 (계 20:4), 이것을 "첫째 부활"이라 부릅니다 (계 20:5). 천 년이 끝나면 사단이 잠시 풀려나 마지막 반역을 일으키고 심판을 받습니다 (계 20:7-10). 그 뒤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옵니다 (계 21:1-4).
다른 하나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입니다. 바울은 죽은 신자들을 슬퍼하는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6-17
"끌어올려"라는 말을 라틴어 성경은 rapiemur로 옮겼고, 거기서 영어의 rapture가, 한자어 휴거(携擧)가 왔습니다. "끌어올려짐"은 성경에 있는 말입니다. 다만 그 사건이 천 년 전인지 후인지, 환난 전인지 후인지는 성경이 한 구절로 정리해 주지 않습니다. 여기서 견해가 갈립니다.
교회의 증언
그리스도인들은 크게 네 가지로 읽어 왔습니다. 그 전에 먼저 모두가 함께 붙드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눈에 보이게 다시 오신다는 것,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것, 최후의 심판이 있다는 것, 악이 끝내 패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는 것입니다. 니케아 신경은 그분의 나라가 끝이 없다고 고백할 뿐, 천 년을 어떻게 읽을지는 정해 주지 않습니다 니케아 신경. 매튜 헨리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을 풀며 이렇게 말합니다. "부활과 그리스도의 재림의 교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그리스도인 친구들의 죽음에 대한 지나친 슬픔에 맞서는 치료제이며, 우리는 이 교리들에 대해 온전한 확신이 있습니다" 매튜 헨리.
역사적 전천년설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오신 뒤에 땅에서 천 년 동안 통치하신다고 봅니다. "전천년"은 재림이 천 년 앞에 온다는 뜻입니다. "살아서"가 5절에서도 같은 말로 쓰였으므로 첫째 부활은 육체의 부활이라고 봅니다. 파피아스, 유스티누스, 이레나이우스 같은 2세기 교부들이 이 견해를 말했습니다. 이 견해에서 휴거는 환난 뒤에 일어납니다. 마태복음 24장은 환난 뒤에 그분이 천사들을 보내어 "그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자기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선택 받은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함께 모으리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마 24:31). 신자들은 공중에서 주를 맞이하고 곧 그분과 함께 내려온다고 봅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19세기에 존 넬슨 다비가 체계화했고 스코필드 관주 성경(1909)으로 널리 퍼졌습니다. 이 견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별해서 다루신다고 보고, 휴거가 환난 이전에 일어난다고 가르칩니다. 교회가 먼저 끌려 올라간 뒤 땅에 칠 년의 환난이 있고 (단 9:24-27의 칠십 이레에서 마지막 한 이레로 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도들과 함께 영광 중에 오셔서 천 년을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근거로는 "그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그분의 아들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는지 보여 주나니 이분은 곧 다가올 진노로부터 우리를 건져 내신 예수님이시니라." (살전 1:10),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노에 이르도록 정하지 아니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도록 정하셨느니라." (살전 5:9), 그리고 언제든 오실 수 있다는 기대를 듭니다. 다른 전천년설 학자들은 마태복음 24장과, "아무도 어떤 방법으로든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먼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일어나고 저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드러나지 아니하면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라." 나서야 그날이 온다는 말씀(살후 2:3)이 모임을 환난 뒤에 둔다고 답하고, 세대주의자들은 이 본문들이 교회가 아니라 이스라엘이나 주의 날에 관한 것이라고 읽습니다. 환난 중간에 휴거가 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무천년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 20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게 정리했습니다. 그는 한때 천 년을 문자적으로 보는 견해를 따랐으나 뒤에 상징으로 읽었습니다. 이 견해에서 천 년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전 기간입니다. 사단이 "결박"되었다는 것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지는 것을 막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고 (마 12:29을 보십시오), 첫째 부활은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사는 것이거나, 죽은 성도들이 하늘에서 그분과 함께 다스리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 같은 사건을 여러 번 되풀이해서 보여 준다고 읽는 것입니다. "무"천년이라고 해서 천 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땅 위에 따로 있을 천 년 통치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가톨릭과 정교회, 대부분의 루터교회와 많은 개혁교회가 이 견해를 따라 왔습니다.
후천년설은 복음이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에 널리 퍼져 오랜 의와 평화의 시대가 열린 뒤에 그리스도께서 오신다고 봅니다. 천 년은 문자적 천 년이 아니라 긴 기간일 수 있습니다. 청교도들과 조너선 에드워즈, 19세기의 많은 신학자가 이 소망을 품었습니다. 두 번의 세계대전 뒤에 이 낙관은 크게 줄었으나 지금도 따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매튜 헨리의 해설도 요한계시록 20:4를 풀면서 이 방향의 기대를 보입니다. "적그리스도적이고 우상숭배적이며 박해하는 세력들이 멸망한 후에 천 년이 이어질 것을 우리는 기대할 수 있으며, 그동안 교리와 예배와 거룩함에서 순수한 기독교가 온 땅에 알려질 것입니다" 매튜 헨리.
원어로 보기
세 말이 이 논쟁을 이해하게 도와줍니다. 첫째는 하르파조(ἁρπάζω)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7의 "끌어올려"가 이 말이며, "붙잡아 데려가다, 낚아채다"는 뜻입니다. 라틴어 rapio가 여기서 나왔고 rapture라는 말의 뿌리입니다. 이 말만으로는 언제 일어나는지가 정해지지 않으며, 일어난다는 사실만 말해 줍니다.
둘째는 같은 절의 아판테시스(ἀπάντησις)입니다. "맞이함", 곧 마주하여 만남입니다. 같은 말이 마태복음 25:6의 신랑을 맞는 장면과 사도행전 28:15에서 바울을 맞으러 나온 형제들에게 쓰였습니다. 일부 학자는 고대의 시민들이 오는 귀빈을 성문 밖에서 맞아 그대로 호위해 들어오는 모습을 떠올리며, 신자들이 공중에서 주를 맞고 곧 땅으로 함께 내려온다고 읽습니다. 다른 이들은 이 낱말 용례만으로는 결론을 낼 수 없다고 봅니다.
셋째는 요한계시록 20장에서 여섯 번 반복되는 "천 년"입니다. 헬라어 킬리오이(χίλιοι)는 "천"을 뜻하며, 이 책이 일곱이나 144,000 같은 수를 상징으로 쓴다는 점을 얼마나 무겁게 보느냐에 따라 천 년을 문자적 기간으로도, 길고 온전한 기간의 상징으로도 읽게 됩니다.
흔한 반론과 답
"성경이 분명하다면 왜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갈립니까? 그렇다면 성경을 믿을 수 있습니까?" 정직한 물음입니다. 갈림은 본문이 쓸모없어서가 아니라 묵시 문학이라는 성격에서 옵니다. 요한계시록은 환상과 상징으로 쓰였고, 천 년은 한 곳에만 나오며, 신약의 다른 본문과 어떻게 이어 읽을지가 다릅니다. 그러나 신실한 신학자들이 같은 본문을 성실히 읽고 다른 결론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이것이 구원을 가르는 문제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모두가 같은 중심을 붙듭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죽은 자가 일어나고, 심판이 있고, 새 창조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겸손을 가르칩니다. 다르게 읽는 형제를 의심해서는 안 되고, 어느 한 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이단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휴거 신앙은 현실에서 도망치게 하고 두려움을 조장한다." 그렇게 쓰인 사례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특정한 해와 날에 휴거가 있다고 선포해 사람들을 두렵게 했고, 그날이 지나자 큰 상처와 불신이 남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날과 그 때를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고 (마 24:36), 바울이 이 가르침을 준 목적은 슬퍼하는 이들을 "그러므로 이 말씀들로 서로 위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살전 4:18). 어느 견해를 따르든 날짜를 계산하거나 두려움으로 사람을 몰아가는 일은 성경이 허락한 쓰임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4:40-41의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가 휴거를 가리킨다고 보는 이들이 있고, 바로 앞 절에서 홍수가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 데려감을 당하는 쪽을 심판받는 쪽으로 읽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점을 아는 것이 지나친 확신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왕이시라면 천 년 통치가 왜 따로 필요합니까?" 무천년설은 이 점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예수는 부활 후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능이 내게 주어졌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마 28:18). 그분은 이미 왕으로 앉아 계십니다. 그러니 앞으로의 천 년은 필요하지 않거나 이미 진행 중이라는 것입니다. 전천년설은 이렇게 답합니다. 그분의 통치는 지금 숨겨져 있고 악은 여전히 활동하며, 요한계시록은 그것이 눈에 보이게 드러나는 때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후천년설은 그 통치가 복음의 진전을 통해 점차 드러난다고 답합니다. 세 대답 모두 그리스도의 승리를 말하되 그 방식과 시기를 다르게 봅니다.
더 생각해 보기
이 논쟁이 정말 묻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기다릴지입니다. 어느 견해를 따르든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같습니다. 깨어 있고, 서로 위로하고, 맡은 일을 충실히 하며, 날짜를 계산하지 않는 것입니다. 휴거와 천년왕국을 아는 것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며,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어느 견해에 끌립니까? 그 이유는 본문 때문입니까, 아니면 자라 온 교회의 영향 때문입니까? 나와 다르게 읽는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대합니까? 재림에 대한 소망이 나를 두렵게 합니까, 위로합니까?
더 읽으려면 예수는 다시 오시는가?와 세상의 끝은 언제 오는가?, 최후의 심판이란 무엇인가?를 보십시오. 요한계시록 20-22장을 차분히 읽는 것도 좋은 시작입니다.
관련 질문
- 예수는 다시 오시는가?교회는 처음부터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고백해 왔습니다. 성경은 그분이 승천하신 모습 그대로 몸으로, 눈에 보이게, 영광 가운데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르며, 이 약속은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과 깨어 있음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 세상의 끝은 언제 오는가?성경의 답은 분명하게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날과 그 때를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고, 제자들이 때를 물었을 때에도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전쟁과 지진 같은 징조는 시간표가 아니라 깨어 있으라는 알림이며, 날짜를 계산한 사람은 지금까지 모두 틀렸습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두려워하며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고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 최후의 심판이란 무엇인가?최후의 심판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모든 사람의 삶을 공의로 판단하시고 세상의 모든 일을 바로잡으시는 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날을 두려움만이 아니라 소망으로도 기다립니다. 심판자가 곧 자기를 위해 죽고 살아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 이단은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이단을 분별하는 기준은 사람의 인상이나 규모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복음, 성경, 그리고 열매입니다. 예수가 누구이신지, 구원이 무엇으로 말미암는지, 성경 위에 다른 권위를 세우는지, 지도자가 자기를 높이는지, 사람을 묶고 고립시키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견해 차이는 이단이 아니며, 분별은 정죄가 아니라 사람을 지키려는 사랑에서 나와야 합니다.
관련 주제
출처
-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니케아 신경 325/381 — 동서방 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신조. 읽기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