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나 아우레아
토마스 아퀴나스(1225년 무렵–1274)가 1260년대에 네 복음서를 절마다 따라가며 교부들의 글을 사슬처럼 엮은 주석입니다. 초대 교회와 중세 교회가 복음서를 어떻게 읽었는지 들려주고, 동방과 서방의 그리스도인이 함께 고백하는 그리스도 신앙을 풍성하게 증언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황금 사슬
토마스 아퀴나스는 1225년 무렵 이탈리아 남부 아퀴노 근처의 로카세카에서 태어났습니다. 나폴리에서 공부하던 젊은 시절, 그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설교와 가르침을 위해 새로 생긴 수도회인 도미니코회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대 알베르투스 밑에서 배운 뒤 파리 대학교의 신학 교수가 되었고, 평생 파리와 이탈리아에서 가르쳤습니다. 대표작은 기독교의 가르침 전체를 정리하다 끝내 완성하지 못한 『신학대전』입니다. 그는 1274년 3월 7일 리옹 공의회로 가던 길에 포사노바 수도원에서 쉰이 채 안 된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그를 성인이자 교회 학자로 공경합니다.
중세의 신학 교수에게 첫째 교과서는 성경이었고, 토마스도 신약과 구약의 여러 책을 강의했습니다. 1261년부터 1265년까지 그는 이탈리아 중부의 오르비에토에서 가르쳤는데, 그때 교황 우르바노 4세가 그곳에 궁정을 두고 있었습니다. 교황은 그에게 교부들의 글로 복음서를 풀이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토마스는 아마 1264년까지 마태복음을 마쳐 교황에게 바쳤습니다. 그해 10월 교황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는 나머지 세 복음서를 이어 엮어 대략 1268년 무렵까지 마친 것으로 보이며, 이 세 권은 같은 도미니코회 수사이자 벗인 안니발도 데글리 안니발디 추기경에게 바쳤습니다. 토마스 자신은 이 책을 그저 이어지는 주해라고 부른 듯하고, ‘황금 사슬’이라는 뜻의 카테나 아우레아(Catena Aurea)라는 이름은 후대 사람들이 붙인 것입니다.
카테나는 라틴어로 사슬이라는 뜻입니다. 성경 한 권을 따라가며 절마다 앞선 해석자들의 글을 고리처럼 이어 붙인 책을 그렇게 부릅니다. 헬라어를 쓰는 동방 교회에서는 6세기 무렵부터 이런 책을 만들었습니다. 토마스는 인용문을 쌓아 두는 데 그치지 않고, 한 교부가 멈춘 곳에서 다른 교부가 이어받도록 배열하여 전체가 거의 한 편의 주석처럼 읽히게 했고, 인용마다 출처를 밝혔습니다. 우르바노 4세에게 바친 헌사에서 그는 때로 글을 줄이거나 순서를 바꾸고 낱말보다 뜻을 옮겼다고 밝히는데, 특히 라틴어 번역이 좋지 않던 크리소스토무스의 설교에서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이 사슬에는 동방과 서방의 목소리가 함께 있습니다. 라틴 교부로는 힐라리우스, 암브로시우스, 히에로니무스, 아우구스티누스, 대 그레고리우스가, 헬라 교부로는 오리게네스, 아타나시우스, 바실리우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크리소스토무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가 있습니다. 여기에 잉글랜드의 수도사 베다와 알퀴누스, 라바누스, 레미기우스 같은 후대의 서방 저자들, 그리고 1100년 무렵에 글을 쓴 비잔티움의 대주교 테오필락투스까지 더해집니다. 3세기의 오리게네스에서 테오필락투스까지 거의 900년에 걸친 사람들이니, 여기서 교부는 넓은 뜻에서 교회의 스승들을 가리킵니다. 토마스는 안니발도에게 바친 두 번째 헌사에서, 뒤의 세 복음서를 위해 헬라 교부들의 주석을 더 라틴어로 옮기게 했다고 말합니다. 앱에서도 그 흔적이 보입니다. 테오필락투스는 마태복음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마가·누가·요한복음에서는 가장 자주 나오는 이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해’라는 이름이 붙은 짧은 글은 대개 중세 라틴어 성경의 여백에 달린 표준 주해에서 왔고, 출처를 찾지 못한 것 가운데 일부는 토마스가 직접 쓴 연결 문장일 수도 있습니다.
옥스퍼드의 영어 번역
여섯 세기가 지난 1833년, 잉글랜드에서는 존 헨리 뉴먼과 존 키블, 에드워드 퓨지 등이 이끈 옥스퍼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영국 국교회를 초대 교회의 신앙과 예배로 되돌리려 했고, 그 일의 하나로 교부들의 글을 영어로 옮기는 총서를 펴냈습니다. 카테나 아우레아도 같은 정신으로 번역되어 1841년부터 1845년까지 옥스퍼드에서 복음서마다 한 권씩 네 권으로 나왔습니다.
앱이 받은 판의 설명은 뉴먼을 번역자로, 연도를 1842년으로 적습니다. 앱의 출처 표시는 그를 엮은이로 적는데, 그쪽이 더 정확합니다. 뉴먼은 서문을 쓰고 번역을 이끈 편집자였고, 실제 번역은 상당 부분 옥스퍼드의 젊은 학자들이 맡았습니다. 뉴먼의 머리글자로 서명된 마가복음 권의 서문은 그 권을 옮긴 엑서터 칼리지의 존 도브리 달게언스(John Dobree Dalgairns)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마지막 권이 나온 1845년 10월에 뉴먼은 가톨릭 교회에 들어갔고, 1879년 추기경이 되었으며, 2019년에 가톨릭 교회의 성인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옥스퍼드의 편집자들은 번역만 한 것이 아닙니다. 토마스의 인용이 원문에서 너무 벗어나 뜻이 상한 곳에서는 교부의 원래 글을 따랐고, 교부의 남은 저작에서 찾을 수 없는 대목은 그렇다고 밝혔습니다. 저자 이름에 대해서도 솔직했습니다. 마가복음 권의 서문은 그 권에서 크리소스토무스의 이름이 붙은 글 가운데 많은 부분이 그의 저작에 없고, 히에로니무스의 이름이 붙은 글은 모두가 다른 사람의 것으로 판단하는 주석에서 왔다고 일러 둡니다. 앱도 이 판을 따라, 한때 어떤 교부의 것으로 여겨졌던 글에는 위(僞)크리소스토무스처럼 ‘위(僞)’를 붙이고, 출처를 찾지 못한 글에는 이름 뒤에 ‘(출처 미상)’을 붙입니다.
앱의 영어 본문은 크로스와이어(CrossWire) 성경 모듈에 실린 공유 저작물 판으로, 옥스퍼드 판을 바탕으로 만들고 원래 인쇄본의 스캔과 대조한 것입니다.
교부들이 성경을 읽는 방식
교부들은 대부분 주교나 수도사였고, 회중에게 성경을 풀어 주는 목자이자 설교자로서 복음서를 읽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모든 말씀이 교회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믿었기에, 한 본문에서 그것이 전하는 사실보다 더 많은 것을 물었습니다. 교회는 이런 읽기를 차츰 성경의 여러 의미에 관한 가르침으로 정리했습니다. 문자적 의미는 낱말이 말하는 것과 본문이 전하는 사건입니다. 그 위에 영적 의미가 섭니다. 이야기된 일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가리키는 풍유적 의미(알레고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도덕적 의미, 그리고 장차 올 세상을 가리키는 아나고게적 의미입니다. 아나고게는 ‘위로 이끈다’는 뜻의 헬라어에서 온 말입니다. 중세의 한 시구는 이를 짧게 줄여, 문자는 일어난 일을, 풍유는 믿을 것을, 도덕적 의미는 행할 것을, 아나고게는 우리가 향해 갈 곳을 가르친다고 했습니다.
교부들은 이런 읽기를 신약성경에서 배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자기에 관한 말씀으로 풀어 주셨습니다.
모세와 모든 대언자들의 글에서 시작하여 모든 성경 기록들에서 자기에 관한 것들을 그들에게 풀어 설명해 주시니라.
눅 24:27
바울은 하갈과 사라의 이야기를 두고 "그것들은 풍유니라. 이들은 두 언약인데 하나는 시내 산에서 나와 속박 당하게 하는 자니 곧 하갈이라." (갈 4:24) 하였고,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겪은 일을 두고는 "이제 이 모든 일은 그들에게 본보기로 일어났으며 또 그것들은 세상의 끝을 만난 우리를 훈계하기 위해 기록되었느니라." (고전 10:11) 하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는 이 생각을 한 그림으로 보여 줍니다. 예언서에서 "역사적 의미는 몸이요 영적 의미는 영혼"이라는 것입니다 카테나, 마 23:29.
한 단락 안에 여러 의미가 나란히 나오는 일도 많습니다. 동방 박사들의 예물을 두고 안셀무스의 주해는 먼저 황금과 향료가 아라비아에 흔한 물건이었다고 짚습니다. 이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예물에서 아기가 누구신지에 대한 고백을 읽습니다. "황금은 강한 왕께 바치는 것이요, 유향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요, 몰약은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하여 죽으실 분께 드리는 것입니다" 카테나, 마 2:11. 대 그레고리우스는 그 예물을 읽는 사람에게로 돌려, 우리가 지혜로 빛날 때 황금을, 기도할 때 유향을 드리는 것이며 "몰약을 드린다는 것은, 절제로 육신의 정욕을 죽일 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카테나, 마 2:11. 시온 딸을 두고는 라바누스가 시온 산 위의 성읍에서 시작하여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 속한 믿는 자들의 교회"에 이릅니다 카테나, 마 21:5.
가장 널리 알려진 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누가복음 10장의 카테나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은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 자신으로 이해됩니다"라고 말합니다 카테나, 눅 10:30. 예루살렘은 그가 떨어져 나온 하늘의 본향이고, 이름이 달을 뜻한다는 여리고는 죽을 운명의 우리 삶이며, 강도들은 마귀와 그의 천사들이고, 제사장과 레위인은 사람을 고치지 못한 율법과 선지자이며, 사마리아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크리소스토무스의 이름이 붙은 글은 "주막은 교회이니"라고 덧붙이고 카테나, 눅 10:34, 데나리온 둘은 두 언약으로, 또는 사랑의 두 계명으로 풀이됩니다. 그러면서도 이 단락은 땅을 딛고 있습니다. 바실리우스는 지리를 확인하고, 단락 끝에서 암브로시우스는 비유의 분명한 교훈을 전합니다. "이웃을 만드는 것은 혈연이 아니라 긍휼입니다" 카테나, 눅 10:37.
숫자도 같은 눈으로 읽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의 물고기 백쉰세 마리를 두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율법의 열에 성령의 일곱을 더해 열일곱을 얻고, 1부터 17까지를 모두 더하면 153이 된다고 셈한 뒤 "이 수는 성령의 은혜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을 나타냅니다"라고 맺습니다 카테나, 요 21:11. 오늘의 독자에게 이런 풀이가 낯선 것은, 우리가 먼저 그 글을 쓴 사람이 자기 시대에 무엇을 뜻했는지 묻기 때문입니다. 교부들도 그것을 물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성경을 주신 성령께서 사람 저자가 볼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뜻하셨고, 성경에는 헛된 말이 하나도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교부들이 모두 같은 방식으로 읽은 것은 아닙니다. 안디옥에서 배운 크리소스토무스는 본문의 분명한 뜻과 거기서 나오는 삶의 교훈에 머무는 편이고, 오리게네스와 힐라리우스, 베다와 라바누스는 숨은 뜻을 즐겨 찾아서 그들의 글에는 ‘신비적으로’로 시작하는 단락이 많습니다. 풍유를 즐긴 이들도 한계를 알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서 든 예들은 알레고리로 풀어서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묻는 대상이 아닙니다"라고 말합니다 카테나, 마 6:28. 토마스 자신도 『신학대전』에서, 모든 영적 의미는 문자적 의미 위에 서 있고 교리를 논증하는 근거는 문자적 의미뿐이며, 믿음에 꼭 필요한 것 가운데 성경이 다른 곳에서 분명히 말하지 않는 것이 영적 의미 속에만 숨어 있는 일은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가톨릭과 정교회는 이 토대 위에서 영적 의미를 지켜 왔고, 종교개혁자들은 교리의 근거로서 본문의 분명한 뜻을 굳게 붙들며 풍유를 경계했지만 그들도 구약을 그리스도를 향해 읽었습니다.
좋은 점과 한계
카테나의 첫째 선물은 함께 읽는 이들입니다. 복음서의 거의 어느 절에서든 헬라어와 라틴어로, 주교와 수도사들이 서로 대답하듯 이어 가는 여러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들 대부분은 동방과 서방의 교회가 갈라지기 전에, 모두가 종교개혁보다 훨씬 전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가톨릭과 정교회와 개신교의 그리스도인이 모두 그들을 하나의 교회의 스승으로 여깁니다. 종교개혁자들도 교부들을 끊임없이 인용했고, 칼뱅은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를 자주 인용했습니다.
카테나는 교부들이 가장 힘써 지킨 곳, 곧 그리스도의 인격과 삼위일체에서 가장 빛납니다. 그들은 아들이 피조물이라고 가르친 아리우스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이름만 다른 한 위격으로 본 사벨리우스에 맞서 니케아의 신앙을 지켜 냈고, 그 싸움이 복음서 풀이에도 배어 있습니다. 크리소스토무스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성육신에서 시작하는 것과 달리 "요한은 잉태와 탄생과 양육과 성장을 건너뛰고 곧바로 영원한 낳으심을" 말한다고 씁니다 카테나, 요 1:1.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말씀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두 낱말에 주목하라고 하며 "하나라고 하신 데서 아리우스파가, 우리라고 하신 데서 사벨리우스파가 반박을 받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카테나, 요 10:30. 도마의 고백을 두고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다시 "도마는 사람을 보고 만졌으나 자기가 보지도 만지지도 않은 하나님을 고백하였습니다"라고 씁니다 카테나, 요 20:28. 니케아 신경과 칼케돈 신앙정의가 고백하는 신앙이 성경 읽기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습입니다(삼위일체, 참 하나님, 참 사람). 그리고 그 교리는 책 속에 머물지 않습니다. 같은 대목에서 대 그레고리우스는 "믿는 것을 행하는 사람만이 참으로 믿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카테나, 요 20:29.
카테나는 의견이 갈리는 곳도 숨기지 않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라는 말씀에서(마 16:18) 카테나는 훗날 교회들을 갈라놓게 될 여러 읽기를 함께 모아 둡니다. 크리소스토무스는 "곧 이 믿음과 고백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는 뜻입니다"라고 풀고 카테나, 마 16:18,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든 사람을 반석이라 부르며, 라바누스와 주해는 천국 열쇠에서 베드로에게 주어진 특별한 으뜸 자리를 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가 이 반석을 베드로로도, 베드로가 고백한 그리스도로도 풀었음을 돌아본 뒤 판단을 열어 둡니다. "이 두 의견 중 어느 쪽이 더 그럴듯한지는 독자가 선택하십시오" 카테나, 마 16:18. 가톨릭 독자는 여기서 베드로의 직무에 관한 가르침의 증인들을 만나고, 정교회와 개신교 독자는 그들 가운데 많은 이가 따르는 풀이, 곧 반석을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나 그리스도 자신으로 읽는 풀이를 만납니다. 그리고 모두가 이 물음이 누구를 가르기 훨씬 전부터 신중하게 숙고되었음을 봅니다(가톨릭과 개신교는 무엇이 다른가?).
그러나 카테나는 중세의 선집이고, 그 한계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로 글 위에 붙은 이름이 늘 맞지는 않습니다. 마태복음의 위(僞)크리소스토무스는 오랫동안 크리소스토무스의 것으로 여겨졌으나, 지금은 5세기 무렵 알 수 없는 저자가 라틴어로 쓴 미완의 주석으로 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옥스퍼드 판 서문이 일러 주듯 크리소스토무스의 이름이 붙은 많은 글과 위(僞)히에로니무스가 다른 사람의 것입니다. ‘(출처 미상)’이 붙은 글은 편집자들이 원래 저작에서 찾지 못한 것입니다. 성찬의 떡을 두고 그레고리우스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유교병을 받든 무교병을 받든 우리는 우리 구주이신 주의 한 몸이 됩니다"라는 말이 그런 예입니다 카테나, 마 26:26. 또 토마스가 글을 줄이고 다듬었으니, 한 토막의 인용은 그 교부의 생각을 일부만 보여 줍니다. 그가 무엇을 가르쳤는지 알려면 그의 글 전체를 읽어야 합니다.
둘째로 영적 풀이는 본문의 분명한 뜻으로 저울질해야 합니다. 사마리아인이 그리스도이시고 물고기 백쉰세 마리가 성령의 은혜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라는 풀이는 참된 것을 가르치지만, 그 진리는 이 이야기의 세부가 아니라 성경의 다른 본문 위에 서 있습니다. 히브리어 이름의 뜻에 기대는 풀이도 있는데, 교부들이 쓴 이름 풀이 목록이 늘 정확했던 것은 아닙니다.
셋째로 교부들은 그 시대가 아는 만큼 알았습니다. 오래된 사본의 연구도, 고고학도, 고대 근동에 대한 오늘의 지식도 그들에게는 없었고, 라틴 교부들은 복음서를 라틴어 번역으로 읽었습니다. 역사와 본문과 언어에 관한 물음에는 새 연구서가 더 나은 답을 줍니다.
넷째로 이 책은 13세기의 라틴 신학자가 고른 선집입니다. 헬라 교부들을 많이 모았지만 토마스 시대의 서방 교회가 읽던 방식으로 배열했고, 후대 라틴 저자들의 목소리는 그 교회의 입장을 대변합니다. 마태복음 16장의 한 주해는 베드로를 "한 명의 으뜸가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부릅니다 카테나, 마 16:19. 성찬에 대해서는 암브로시우스가 축성 전에는 떡이나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된 후에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라고 말하고 카테나, 마 26:26, 같은 단락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례에서 "보이는 것은 하나이고 이해되는 것은 다른 하나"라고 말합니다 카테나, 마 26:26. 떡이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고 믿는 가톨릭과 정교회, 그리스도의 몸이 참으로 임재한다고 고백하는 루터교회는 암브로시우스의 말에서 자기 신앙을 듣고, 개혁교회는 흔히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에 기대어 왔습니다. 같은 교부들이 두 가지 말을 다 남겼고, 각 전통은 그 말을 자기 방식으로 읽습니다(세례와 성찬은 무엇인가?).
다섯째로 그 시대의 거친 말도 들어 있습니다. 빌라도 앞에서 무리가 외친 말을 두고 히에로니무스는 그 저주가 오늘까지 유대인들 위에 있다고 말하고, 크리소스토무스는 긍휼하신 하나님께서 그 판결을 인준하지 않으시고 회개한 이들을 받아 주셨다고 덧붙입니다(카테나, 마 27:25). 오늘 많은 교회는 유대 민족 위에 저주가 있다는 생각을 버렸고, 그런 생각이 낳은 아픈 역사를 기억합니다.
끝으로 카테나는 네 복음서만 다룹니다. 나머지 성경에서는 매튜 헨리와, 대부분의 책에서 웨슬리를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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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다가 구절을 누르면 화면 아래에 막대가 나타나고, 거기서 ‘원어·주석’을 누르면 원어·주석·관주·용어 네 탭이 있는 창이 열립니다. 네 복음서에서는 주석 탭의 ‘매튜 헨리’와 ‘웨슬리’ 사이에 ‘교부들 (카테나)’이 있고, 복음서의 모든 절이 카테나의 어느 단락엔가 들어 있습니다.
카테나는 네 복음서를 800여 단락으로 나누며, 한 단락은 평균 네댓 절입니다. 주석 탭은 고른 절이 속한 단락을 누가복음 10:29-37 같은 제목 아래 보여 줍니다. 단락 맨 앞에는 ‘절’이라는 표시와 함께 그 단락의 본문이 개역한글로 나오고, 이어서 교부들의 글이 굵게 쓴 이름 아래 하나씩 나옵니다. 어떤 이름에는 인용한 저작이 함께 적혀 있고, 저자를 밝히지 않은 헬라어 자료는 ‘어느 헬라 주석가’로 나옵니다. 긴 단락도 있어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단락은 쉰 문단이 넘습니다.
먼저 나오는 것은 우리말 번역입니다. 요약이 아니라 영어 원문의 모든 문장을 옮긴 번역이며, 교부들이 성경을 인용하는 곳에서는 개역한글의 말씀을 씁니다. ‘원문 보기’를 누르면 옥스퍼드 판의 영어가 나오고 ‘번역 보기’를 누르면 우리말로 돌아옵니다. 뜻이 걸리는 문장은 원문과 견주어 보십시오.
주석 속의 성경 구절 표시는 링크여서, 누르면 그 구절이 지금 읽는 번역으로 열립니다. 주석 탭 아래의 ‘이 장의 주석 전체’를 누르면 그 장의 주석 페이지(/study/luk/10/ 같은 주소)로 가는데, 거기에는 매튜 헨리 다음에 카테나가 단락 순서대로 실려 있고 단락마다 영어 원문이 접혀 있습니다. 질문과 교리 과에서 교부의 이름이 붙은 링크를 누르면 그 절의 카테나가 바로 열립니다. 검색의 주석 결과에서도 교부들의 글을 찾을 수 있고, 설정의 오프라인 저장에서 원어·주석·관주·용어 자료를 내려받으면 인터넷 없이도 읽을 수 있습니다. 출처는 설정의 원어·주석 자료에 있고, 단락 맨 아래의 이름을 누르면 영어 본문을 준비한 프로젝트의 페이지가 열립니다.
잘 읽는 법
먼저 복음서를 읽으십시오. 본문을 천천히 읽고 무엇을 말하는지 스스로 물은 다음 교부들을 펴면, 그들이 내가 놓친 것을 보여 줍니다. 주석을 읽는 일반적인 원칙은 주석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읽는가에서 다룹니다.
단락 안에서 내 절을 찾으십시오. 교부들의 글은 절의 순서를 따르고 대개 풀이하는 말씀을 먼저 인용하므로, 어느 교부가 어디서 본문을 이어받는지 알 수 있습니다.
분명한 뜻부터 들으십시오. 대개 크리소스토무스나 테오필락투스 같은 이가 먼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풀어 주고, ‘신비적으로’나 그냥 ‘혹은’으로 시작하는 풀이는 그 뒤에 옵니다. 영적 풀이는 토마스 자신의 원칙으로 저울질하십시오. 이 풀이가 본문에서 끌어낸 가르침을 성경이 다른 곳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미 아는 진리를 묵상하게 하는 풀이로 받으면 되고, 이름의 뜻이나 숫자의 합에만 기대는 풀이라면 가볍게 즐기면 됩니다.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선한 것을 굳게 붙들라.
살전 5:21
누가, 언제 말하는지 보십시오. 4세기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와 8세기 잉글랜드 북부의 수도사, 12세기의 주해가 한 화면에 나란히 있습니다. 이름 앞의 위(僞)는 진짜 저자를 모른다는 표시입니다.
함께 기도하십시오. 이 글들 가운데 많은 것이 처음에는 교회에서 평범한 신자들에게 한 설교였습니다. 이웃에 대한 암브로시우스의 말처럼 한 문장을 골라 그날 마음에 품고 기도로 바꾸어 보십시오.
다른 목소리와 견주십시오. 300년 전 영국의 비국교도 목사 매튜 헨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을 먼저 이웃 사랑의 교훈으로 읽고, 이어서 짧게 그리스도의 긍휼을 보여 주는 그림으로도 읽습니다. "우리는 이 가련하고 곤경에 처한 나그네와 같았습니다" 매튜 헨리, 눅 10:30. 옛 풀이가 그에게서도 더 가볍게 쥐어진 채 살아 있는 것입니다(매튜 헨리 간추린 주석, 웨슬리 주해). 교부들이 짚고 지나간 다른 구절과 헬라어 낱말은 관주 탭과 원어 탭이 채워 줍니다(STEPBible 원어 자료). 이렇게 읽으면 카테나는 온 교회가 함께 귀 기울이는 자리에서 복음을 듣게 해 줍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