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하나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

짧은 답

교회는 영원하신 아들께서 사람이 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로 성경은 하나님을 알리시려는 것,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 우리의 자비로운 대제사장이 되시려는 것을 말합니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이 멀리서 구경하지 않으시고 우리 곁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경의 답

기독교가 말하는 성육신은 하나님이 사람처럼 보이셨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참 사람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은 이 일을 한 문장으로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유를 말합니다. 첫째 이유는 하나님을 알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지만, 아들께서 그분을 나타내셨습니다.

아무도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으되 아버지 품속에 계신 독생자께서 그분을 밝히 드러내셨느니라.

요 1:18

예수께서 빌립에게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었으되 네가 아직도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네가 말하기를,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 하느냐?"이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요 14:9).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한 사람에게 성경이 가리키는 답은 한 사람의 삶입니다.

둘째 이유는 사람으로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런즉 자녀들은 살과 피에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의 일부를 취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죽음을 통해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또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 내려 하심이라.

히 2:14-15

아들은 하나님으로서는 죽으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려고 죽을 수 있는 몸을 취하셨습니다. 바울도 같은 취지로 씁니다.

그러나 충만한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 하셨나니 이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시고 또 우리가 아들로 입양되게 하려 하심이라.

갈 4:4-5

셋째 이유는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대제사장은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서 그분께서 자기 형제들과 같게 될 필요가 있었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서 긍휼 많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이 되사 백성의 죄들로 인해 화해를 이루려 하심이라.

히 2:17

그리고 이 대제사장은 우리 사정을 아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니라.

히 4:15

빌립보서는 이 모든 일이 낮아짐의 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움켜쥐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으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빌 2:6-8).

교회의 증언

사도신경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고 고백하고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은 그분이 우리 사람을 위하여, 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셨다고 고백합니다 니케아 신경.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고, 두 본성이 섞이거나 변하지 않고 나뉘거나 분리되지도 않은 채 한 위격 안에 계신다고 정리했습니다 칼케돈 정의.

4세기의 아타나시우스는 『성육신에 관하여』에서 이 질문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이 죄와 죽음의 썩음으로 무너져 가는 것을, 사람을 지으신 말씀이 직접 와서 다시 세우시려 했다고 설명합니다 아타나시우스, 성육신에 관하여. 더럽혀진 초상화를 다시 그리려면 그림의 주인공이 다시 와서 앉아야 한다는 비유가 유명합니다. 이 전통은 동방 교회에서 특히 사람의 본성 자체를 고치고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끄는 일로 강조됩니다.

11세기 안셀무스는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는가』에서 다른 쪽을 밝힙니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큰 빚인데, 사람이 갚아야 하지만 사람은 갚을 수 없고 하나님은 갚으실 수 있지만 갚을 의무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면서 사람인 분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안셀무스,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는가. 교회는 이 설명들 가운데 하나만을 정답으로 고정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는 죽음을 이기심을, 어떤 이는 대속과 만족을, 어떤 이는 사랑의 본을 더 크게 봅니다. 모든 전통이 함께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1장을 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람에게서 나셨음을 아십시오." 아우구스티누스 그는 또 육신의 낮아짐이 병든 눈을 고치는 안약과 같다고 말합니다. "육신의 낮아짐으로 고침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없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하나님을 직접 바라볼 수 없는 우리가 사람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매튜 헨리는 히브리서 2장에서 사랑을 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나타났으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본성으로 어떤 고난을 받아야 하고 그 본성으로 어떻게 죽으셔야 하는지 아시면서도 기꺼이 그것을 취하셨던 것입니다." 매튜 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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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4의 "거하시매"는 스케노오(σκηνόω)입니다. 본래 "장막을 치다"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가운데 장막을 두고 함께 계셨습니다. 요한은 그 장막이 이제 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다가 가끔 찾아오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고 사시는 분입니다.

빌립보서 2:7의 "비어"는 케노오(κενόω), "비우다"입니다. 이 비우심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오래 논의되었지만, 교회는 이것이 신성을 버리거나 줄이셨다는 뜻이 아니라고 한결같이 고백해 왔습니다. 본문이 바로 이어 설명하는 것은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곧 자기 영광과 권리를 움켜쥐지 않으시고, 신성을 덜어 내신 것이 아니라 인성을 더하심으로 낮아지셨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한순간도 하나님이기를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또 요한복음 1:14의 "육신"은 사륵스(σάρξ)입니다. 이 말은 흔히 사람의 연약함과 유한함을 강조합니다. 사람의 한 부분(몸)만 취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사람의 전부를 취하셨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몸뿐 아니라 사람의 영혼도 취하셨다고 가르쳤습니다. 고쳐지려면 취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흔한 반론과 답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가장 깊은 반론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으시며 무한하신데, 사람은 시간 안에서 유한하게 사는 존재입니다. 무한한 분이 유한하게 되는 것은 모순처럼 보입니다. 이슬람과 유대교의 많은 사상가가 이 점에서 기독교를 비판해 왔고, 그 비판은 진지하게 들을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이 사람으로 "변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은 자기의 본질을 육신으로 변화시키신 것이 아닙니다. … 그분은 계신 그대로 머무시면서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크리소스토무스 그는 변할 수 없는 본성이 변한다는 말은 모순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성육신은 신성이 줄어들거나 바뀌는 일이 아니라, 신성이 그대로인 채 인성을 더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이 쉽게 상상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것을 신비라고 부릅니다 (딤전 3:16). 그러나 신비는 모순과 다릅니다. 하나님이 정말 전능하시고 사랑이시라면, 스스로 정하신 방식으로 피조물 안에 들어오시는 것을 미리 불가능하다고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냥 용서하시면 되지, 왜 이렇게 복잡한 길이 필요한가?" 이것도 합리적인 질문입니다. 우리도 사람을 값없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답은 용서가 값이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죄는 실제로 관계를 깨뜨리고 사람을 파괴하며, 하나님은 선하시므로 그것을 없던 일로 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 값을 스스로 치르셨다고 말합니다. 안셀무스와 아타나시우스, 그리고 그 뒤의 신학자들은 이 값을 서로 다르게 설명하지만, 모두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볍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깊이를 보여 준다고 봅니다. 하나님께 다른 길이 있었는지는 의견이 갈립니다. 안셀무스는 이 길이 필연적이었다고 논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가장 합당한 길이었다고 보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이 이 길을 택하셨고 그것이 사랑이라는 데에는 뜻을 같이합니다.

"하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고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어울리지 않는다." 고대의 철학자들과 여러 종교는 신이 가난과 고통과 죽음에 섞이는 것을 품위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처음에 그것이 걸림돌이 됨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 복음의 중심이 있습니다. 힘으로 군림하는 신은 우리의 두려움을 풀어 주지 못하지만, 고난받는 사람의 자리에 함께 서신 분은 고난받는 이에게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의 위엄은 낮아지지 못하는 데 있지 않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낮아지실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각자가 답해야 할 일입니다.

더 생각해 보기

크리스마스는 이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누가는 천사가 목자들에게 "이 날 다윗의 도시에 너희를 위해 구원자 곧 그리스도 주께서 태어나셨느니라."고 전한 일을 기록합니다 (눅 2:11). 오신 분이 곧 선물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올라가는 길을 찾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내려오셨습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멀리 계시고 나의 처지를 모르신다고 느끼는가? 예수께서 내 연약함을 아시는 대제사장이시라면, 오늘 내가 그분께 가져갈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은 사람의 몸과 일상과 고난을 보는 내 눈을 어떻게 바꾸는가?

더 읽으려면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는 왜 죽어야 했는가?, 예수는 정말 동정녀에게서 나셨는가?를 보십시오. 요한복음 1장과 빌립보서 2장, 히브리서 2장을 이어서 읽어 볼 만합니다.

출처

  1. 고대 교회, 사도신경 — 로마 교회의 세례 신앙고백에서 자란 서방 교회의 기본 신조. 읽기
  2.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니케아 신경 325/381 — 동서방 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신조. 읽기
  3. 칼케돈 공의회, 칼케돈 신앙정의 451 —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 읽기
  4. 아타나시우스,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4세기 / 4th century — 말씀이 사람이 되신 이유를 다룬 고전. 읽기
  5. 안셀무스,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 1098 — 속죄와 성육신에 대한 고전적 논의. 읽기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