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사전

형벌 대속

Penal substitution

형벌 대속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 자리에 서셔서 우리 죄에 마땅한 형벌, 곧 하나님의 정죄와 저주와 죽음을 대신 받으셨다는 가르침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의로우시면서 죄인을 의롭다 하시며, 그 형벌을 지신 분은 사랑으로 기꺼이 자신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 대신 받으신 형벌

‘대속’(代贖)은 대신하여 값을 치른다는 뜻입니다. 이사야는 다른 이들의 죄 때문에 고난받는 종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법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5-6

신약은 이 노래를 예수께 돌립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 이것은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라고 하고 (벧전 2:24), 그분이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하여 한 번 고난을 받으사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육체 안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되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나셔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려가려 하심이라."라고 말합니다 (벧전 3:18).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리는 모든 자는 저주 받았느니라, 하였느니라."라고 말하고 (갈 3:13), 하나님이 그분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고후 5:21). 이렇게 하나님은 죄를 덮어 두지 않으시면서 "내가 말하거니와 이때에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사 자신이 의롭게 되며 또 예수님을 믿는 자를 의롭게 만드는 이가 되려 하심이라." 하십니다 (롬 3:26).

교회의 가르침

‘대신하여’라는 생각은 교부들에게서도 보입니다. 아타나시우스는 말씀이 죽을 수 있는 몸을 취하셔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그 몸을 죽음에 내주셨다고 가르쳤습니다 아타나시우스,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종교개혁자들은 이것을 형벌의 언어로 분명히 했습니다. 칼뱅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자리에 서서 우리에게 돌아올 저주와 정죄를 짊어지셨다고 가르쳤고 칼뱅, 기독교 강요 2.16, 벨직 신앙고백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위하여 몸과 영혼으로 고난을 받으셨으며, 우리의 죄가 마땅히 받아야 할 무서운 형벌을 느끼셨다

벨직 신앙고백 21조

존 웨슬리도 이사야 53:5를 풀며 "우리의 평화, 곧 하나님과의 화목을 사들이게 될 그 형벌들이 하나님의 공의로 그분 자신의 동의 아래 그분에게 지워졌습니다"라고 씁니다 웨슬리. 이 가르침은 안셀무스의 만족설을 이어받되, 그리스도께서 형벌을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다고 말합니다.

비판과 응답

16–17세기의 소키누스파는 값을 치르고 받은 용서는 값없는 용서가 아니라며 이 가르침을 거부했고, 오늘날에는 이것이 아버지께서 무고한 아들을 벌하시는 폭력의 이야기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이 가르침을 지키는 이들은 성경이 이 일을 아버지와 아들의 대립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한 사랑으로 그린다고 답합니다. 아들은 "아무도 그것을 내게서 빼앗지 아니하며 내가 스스로 그것을 버리노라. 내게는 그것을 버릴 권능도 있고 그것을 다시 취할 권능도 있노라. 나는 이 명령을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느니라, 하시니라." 하셨고 (요 10:18),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고후 5:19). 매튜 헨리는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으신 것이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셨다는 뜻이 아니라 한동안 하나님의 형벌 아래 놓이셨다는 뜻입니다"라고 씁니다 매튜 헨리.

정교회는 대체로 형벌의 언어보다 죽음을 이기시고 사람을 고치시는 승리의 언어로 십자가를 말하고,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대신 드린 희생과 만족으로 가르칩니다. 복음주의 안에서는 많은 이가 형벌 대속을 속죄의 중심으로 보며, 다른 이들은 이를 여러 그림 가운데 하나로 두거나 승리의 그림을 앞세웁니다. 17세기의 후고 그로티우스와 그를 따른 일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형벌 그 자체라기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를 온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물음은 예수는 왜 죽어야 했는가?와 교리 과정의 십자가와 속죄 과에서 더 다룹니다(속죄 참고).

출처

  1. 아타나시우스,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4세기 / 4th century 읽기
  2. 장 칼뱅, 기독교 강요 1559 읽기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