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망록
레랭의 빈켄티우스 · 434년
영어 본문: C. A. 허틀리 영역, 『니케아와 니케아 이후 교부들』 제2집 11권(1894) · 위키문헌 · 우리말은 이 영어 본문에서 옮겼습니다.
해설
『비망록』은 434년 무렵 레랭의 수도사 빈켄티우스가 이단과 참 신앙을 가려낼 길을 적은 짧은 책으로, 어디서나, 언제나, 모든 사람이 믿어 온 신앙을 붙들되 그 신앙은 변질이 아니라 진보로 자란다는 가르침 때문에 오늘도 읽힙니다.
레랭 섬의 나그네
『비망록』의 저자는 책 안에서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를 하나님의 종들 가운데 가장 작은 자, 페레그리누스라고만 부르는데 1.1, 이 라틴어 이름은 나그네나 순례자라는 뜻입니다. 그가 누구인지는 5세기 말 마르세유의 장로 겐나디우스가 남긴 짧은 기록으로 알려졌습니다. 겐나디우스에 따르면 저자는 갈리아 사람으로 레랭 섬 수도원의 장로였던 빈켄티우스이며, 성경에 밝고 교회의 가르침을 잘 알았고, 450년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레랭은 오늘날 프랑스 남부 칸 앞바다의 작은 섬으로, 5세기 초 호노라투스가 세운 그곳 수도원에서 갈리아의 많은 감독이 나왔습니다.
빈켄티우스는 한때 세상의 거센 싸움에 휘말려 있다가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수도 생활이라는 안전한 항구에 닻을 내렸다고 말합니다. 이 싸움을 군대 생활로 읽는 이들도 있지만 그는 더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는 도시의 소란을 떠난 외딴 수도원에서, 시편이 "가만히 있으라. 그리고 내가 하나님인 줄을 알지어다. 내가 이교도들 가운데서 높여지고 땅에서 높여지리로다."라고 권하는 대로 (시 46:10) 고요히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사람의 모든 것을 앗아 가고 하나님의 심판은 다가오는데 새 이단들의 교활함이 남다른 주의를 요구하기에 이 글을 쓴다고 밝힙니다 1.2.
쓴 때는 책 안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에베소에서 공의회가 열린 것이 세 해쯤 전이라고 하는데 29.78, 그 공의회가 네스토리우스를 면직한 것은 431년이므로 이 책은 434년 무렵에 쓰였습니다. 네스토리우스의 일은 그에게 바로 엊그제의 일이었고 11.29, 펠라기우스를 둘러싼 은혜 논쟁도 아직 식지 않았습니다. 네 해 전인 430년에 세상을 떠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년에 남긴 은혜와 예정의 가르침은 바로 마르세유와 레랭의 수도사들 사이에서 거센 물음을 낳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공의회에 이르는 이야기는 신학 과정의 칼케돈: 한 인격, 두 본성 과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잊지 않으려고 적은 책
『비망록』은 라틴어 ‘코모니토리움’(commonitorium)을 옮긴 이름으로, 잊지 않도록 적어 두는 메모를 뜻합니다. 빈켄티우스는 거룩한 교부들에게서 참되게 받은 것을 적어 두고 늘 읽어서 약한 기억을 메우려 한다고 말합니다 1.1. 그는 저자가 아니라 들은 것을 충실히 전하는 이로서, 다 말하지 않고 꼭 필요한 것만 꾸밈없는 평범한 말로 쓰겠다고 하며, 날마다 조금씩 고치고 보태겠다는 약속도 덧붙입니다 1.3. 그래서 이 책은 다듬어진 논문보다 공책에 가깝고, 같은 생각이 여러 번 되풀이됩니다.
그는 비망록을 두 권으로 썼습니다. 첫째 권이 1–28장이고, 둘째 권은 끝의 요약만 남아 29–33장이 되었습니다. 첫째 권을 맺으며 그는 교부들의 말을 모아 공의회가 신앙의 규칙을 세운 실례를 새로 시작하는 다음 권에서 보이겠다고 하지만 28.75, 그 본문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겐나디우스는 둘째 권 원고의 대부분을 누군가 훔쳐 가는 바람에 잃어버렸고, 저자가 그 뜻을 몇 마디로 다시 정리해 펴냈다고 전합니다. 남은 요약 끝에서 빈켄티우스도 앞의 두 비망록에서 길게 다룬 것을 기억을 위해 짧게 모았다고 말합니다 33.87.
여기에는 남아 있는 서른세 장이 모두 세 부분으로 실려 있고, 빠진 것은 잃어버린 둘째 권의 본문뿐입니다. 1–16장은 2장에서 규칙을 세우고 교회사의 예와 모세의 경고로 그 규칙을 보여 준 뒤, 삼위일체와 성육신을 정리하는 여담으로 끝납니다. 17–28장은 오리게네스와 테르툴리아누스의 예에서 시작해, 디모데에게 맡긴 것을 지키라는 바울의 당부를 푸는 22장과 교회 안의 진보를 다루는 23장을 지나, 이단이 성경을 어떻게 이용하는지와 성경을 바르게 푸는 규칙으로 나아갑니다. 29–33장은 두 권의 요약으로, 431년 에베소 공의회가 교부들의 증언을 모아 네스토리우스를 판단한 모습을 그립니다 30장.
어디서나, 언제나, 모든 사람이
빈켄티우스는 거룩함과 학식으로 이름난 많은 사람에게 이단의 거짓과 보편 신앙의 참을 가려낼 확실한 규칙을 물었고, 거의 언제나 같은 대답을 들었다고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율법, 곧 성경의 권위로, 다음으로 보편 교회의 전통으로 믿음을 굳게 하라는 것입니다 2.4. 그는 곧바로, 정경은 완전하고 그 자체로 모든 일에 넉넉하고도 남는데 왜 교회의 해석을 덧붙여야 하느냐는 반문을 받아들입니다. 그의 대답은 성경이 깊어서 모두가 같은 뜻으로 받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노바티아누스와 사벨리우스, 도나투스와 아리우스, 펠라기우스와 네스토리우스가 저마다 성경을 달리 풀어, 해석하는 사람 수만큼 해석이 있는 듯하다는 것입니다 2.5.
그래서 그는 보편 교회 안에서 어디서나, 언제나, 모든 사람이 믿어 온 신앙을 붙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라틴어로 널리 알려진 이 문장(quod ubique, quod semper, quod ab omnibus creditum est)은 ‘보편성’, ‘고대성’, ‘일치’라는 세 기준으로 풀립니다. 온 세상의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을 참되다고 고백하는 것, 거룩한 선조들이 분명히 지킨 해석에서 조금도 떠나지 않는 것, 그 옛 시대 안에서도 모든, 적어도 거의 모든 감독과 교사가 함께 내린 정의를 따르는 것입니다 2.6. 여기 실린 우리말 본문이 ‘보편’으로 옮긴 그의 말(catholicus)은 교파의 이름이 아니라 온 세상에 퍼진 하나의 보편 교회를 뜻합니다. 전통이 신학의 원천 가운데 어떤 자리에 있는지는 신학의 원천: 성경, 전통, 이성, 경험 과에서 더 볼 수 있습니다.
이 규칙은 차례를 따라 씁니다. 작은 한 부분이 온 교회의 사귐에서 떨어져 나가면 병든 지체보다 온몸의 건강을 택하고, 새 오류가 교회 전체를 물들이려 하면 이제는 속일 수 없는 옛 신앙을 붙듭니다 3.7. 옛 시대 안에서도 몇 사람이나 한 도시, 한 지방이 잘못했다면 옛 보편 공의회의 결정을 따르고, 그런 결정이 없는 문제라면 때와 곳은 달라도 하나인 보편 교회의 사귐과 신앙 안에 머문 인정받은 교사들이 한마음으로, 드러내 놓고, 거듭 가르친 것을 따릅니다 3.8.
그는 이것을 역사로 보여 줍니다. 아프리카에서 도나투스파를 따르지 않고 온 교회와의 사귐을 지킨 이들 4.9, 라틴어를 쓰는 감독들 거의 모두가 아리우스파의 독에 눈이 멀었을 때 옛 믿음을 지킨 이들이 그 예입니다 4.10. 3세기에 카르타고의 감독 아그리피누스가 처음 내세운, 세례를 다시 베풀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프리카에 퍼졌을 때, 로마의 감독 스테파누스는 전해 받은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새로 만들지 말라고 썼습니다 6.16. 빈켄티우스는 같은 생각을 지녔던 순교자 키프리아누스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성도로 기리면서도, 그의 공의회를 내세워 다시 세례를 주는 도나투스파는 정죄받는다고 말합니다 6.18.
그러나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위험이 바깥보다 안에서 온다는 경고입니다. 빈켄티우스는 신명기 13장을 펴서, 교회 안에서 존경받던 교사가 새 교리를 들여올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시는 까닭을 찾습니다 10.28.
너는 그 대언자나 그 꿈꾸는 자의 말들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가 너희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알기 위해 너희를 시험하시느니라.
신 13:3
그가 드는 예는 모두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성경을 풀어 사람들에게 사랑받던 네스토리우스 11.29, 두 언어로 힘 있게 글을 쓴 시르미움의 포티누스, 서른 권으로 포르피리오스를 반박한 아폴리나리스가 그렇습니다 11.31. 무엇보다 오리게네스가 그렇습니다. 빈켄티우스는 그의 부지런함과 겸손, 순교자의 집안, 성경에서 끌어온 수많은 증거와 셀 수 없는 제자를 길게 칭찬하고 17.43, 그의 책들이 훼손되었다는 말도 기꺼이 인정합니다 17.45. 그러나 사람들이 다른 이들과 함께 옳기보다 오리게네스와 함께 틀리기를 바랄 만큼 그를 따랐기에 그는 더 큰 시험이 되었고 17.44, 라틴 교부들 가운데 으뜸이던 테르툴리아누스도 그랬습니다 18.46.
교훈은 분명합니다. 교회와 함께 교사를 받아들여야지, 교사와 함께 교회의 신앙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7.42. 참된 보편 교회 신자는 어떤 사람의 권위나 재능이나 말솜씨보다 하나님의 진리와 교회를 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20.48. 빈켄티우스가 여기서 드는 바울의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바울은 "인정받는 자들이 너희 가운데서 밝히 드러나려면 너희 가운데 반드시 이단 파당도 있어야 하느니라."고 말합니다 (고전 11:19).
이단도 성경을 들고 온다는 것 역시 그가 거듭 강조하는 점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책부터 복음서까지 성경 구절로 자기 생각을 덮는데, 쓴 약을 먹이려고 잔 가장자리에 꿀을 바르는 유모와 같다는 것입니다 25.65. 주님께서 양의 옷을 입고 오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하신 것도 그래서입니다 (마 7:15). 마귀도 성전 꼭대기에서 시편을 들어 "그분께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리라. 기록된바, 그분께서 자신의 천사들에게 너에 관한 책무를 주시리니 그들이 자기 손으로 너를 받들어 언제라도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하매"라고 주님을 시험했으니 (마 4:6), 보편 신앙을 거슬러 사도와 선지자의 글을 끌어오는 이들을 조심하라고 빈켄티우스는 경고합니다 26.68. 그래서 그는 성경을 보편 교회의 전통과 보편 교리의 규칙을 따라 풀어야 한다는 처음의 규칙으로 돌아갑니다 27.70.
진보이지 변질이 아니다
첫째 권의 중심에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남긴 당부가 있습니다.
오 디모데야, 속되고 헛된 말장난과 또 거짓으로 과학이라 불리는 것의 반론들을 피하며 네게 맡긴 것들을 지키라.
딤전 6:20
빈켄티우스는 오늘의 디모데가 온 교회, 또는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감독들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부탁한 것, 곧 맡겨진 것(depositum)은 내가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내게 맡겨진 것이고, 재주가 아니라 배움의 일이며, 사사로운 것이 아니라 공적으로 전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맡은 이는 저자가 아니라 지키는 이요, 스승이 아니라 제자요, 앞장서는 이가 아니라 따르는 이입니다. 금을 받았으면 금을 돌려주어야지 납이나 놋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22.53.
그렇다고 지키는 일이 그저 땅에 묻어 두는 일은 아닙니다. 빈켄티우스는 성막을 지은 브사렐처럼 하나님의 가르침이라는 보석을 새기고 다듬어, 옛 사람들이 다 깨닫지 못한 채 공경하던 것을 후대가 분명히 깨닫게 하라고 권합니다. 다만 새롭게 말하되 새것을 말하지는 말라고 합니다(nove, non nova) 22.53. 여기서 23장의 물음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진보가 없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있다고, 할 수 있는 모든 진보가 있다고 답합니다. 다만 그것은 신앙의 변질이 아니라 참된 진보여야 합니다. 진보는 한 사물이 그 자체 안에서 커지는 것이고, 변질은 다른 무엇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든 온 교회든 깨달음과 지식과 지혜는 세월을 따라 크게 자라야 하지만, 같은 교리, 같은 뜻, 같은 의미 안에서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23.54. 라틴어로 진보는 ‘프로펙투스’(profectus), 변질은 ‘페르무타티오’(permutatio)입니다.
그는 이것을 몸에 견줍니다. 아기의 팔다리는 작고 젊은이의 팔다리는 크지만 같은 사람이며, 어른이 되어 새로 생긴 듯한 것도 아이 때 이미 들어 있던 것입니다 23.55. 조상들이 교회의 밭에 밀을 뿌렸다면 자손이 거두는 것도 가라지가 아니라 밀이어야 합니다 23.57.
공의회가 한 일도 이렇게 설명됩니다. 이단의 새 주장에 깨어난 교회는 전에는 단순하게 믿던 것을 이제는 깨달아 믿게 하고, 말로 전해 받은 것을 짧은 글에 담았으며, 때로는 옛 신앙의 조항에 새 이름을 붙였다는 것입니다 23.59. 니케아 공의회가 성자를 아버지와 본질이 같으신 분이라고 고백하며 쓴 ‘호모우시오스’(동일 본질) 같은 말이 흔히 그 예로 꼽힙니다. 이 생각은 신학 과정의 역사신학과 실천신학 과에서도 다룹니다.
빈켄티우스 자신도 12–16장의 여담에서 그런 말로 신앙을 정리합니다. 하나님 안에는 한 본질과 세 위격이 있고, 그리스도 안에는 두 본질과 한 위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13.37. 하나님이신 말씀과 사람의 본성이 동정녀의 태 안에서 이미 한 위격으로 하나 되었으므로, 마리아는 참으로 하나님의 어머니, 곧 테오토코스라 불려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15.40. 칼케돈 공의회(451)보다 열일곱 해 앞서 쓰인 이 문장들은 칼케돈의 고백과 무척 가깝습니다. 아타나시우스 신경과 닮은 표현도 많아 그를 그 신경의 저자로 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증명되지는 않았습니다.
교회는 이 짧은 책을 여러 갈래로 읽어 왔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빈켄티우스를 성인으로 기리며,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신앙과 이성에 관한 가르침을 맺으면서 같은 교리, 같은 뜻, 같은 의미 안에서 자라야 한다는 그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 하느님의 아들. 정교회도 그를 성인으로 기리며, 교부들의 한마음을 따르라는 그의 권고를 거룩한 전통을 지키는 길로 귀하게 여깁니다. 영국 국교회의 신학자들도 처음 몇 세기 교회의 일치를 즐겨 내세웠는데, 19세기 옥스퍼드 운동을 이끌던 존 헨리 뉴먼은 1845년 가톨릭 교회로 옮겨 가며 쓴 『그리스도교 교리 발전에 관한 논고』에서 이 규칙이 옳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논쟁을 가리기 어렵다고 보고 교리 발전에 관한 생각을 펼쳤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정경이 그 자체로 넉넉하다는 그의 첫 전제에 동의하면서 새것을 들여온 쪽은 오히려 중세 후기의 교회라고 그의 시험을 거꾸로 돌렸고, 칼뱅은 종교개혁이 새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옛 교회의 신앙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변호했습니다 칼뱅, 사돌레토에게 보낸 답신. 복음주의자들은 교회가 함께 고백해 온 신앙을 성경을 읽는 귀한 길잡이로 여기되, 마지막 판단은 성경에 맡깁니다 (성경의 충분성).
이 책이 누구를 겨누었는지도 오래된 물음입니다. 빈켄티우스는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를 새것을 들여온 이들로 분명히 정죄하지만 24.62, 그 많은 교부와 교사의 이름을 들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름은 한 번도 들지 않습니다. 적지 않은 학자는 이단들이 자기 무리에 들기만 하면 구하지도 찾지도 두드리지도 않아도 특별한 은혜를 받는다고 약속한다는 대목 26.69를 들어, 그가 말하는 새것 가운데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년 예정론도 들어 있었다고 보고, 아키텐의 프로스페르가 반박한 빈켄티우스라는 이의 반론을 그가 썼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렇게 볼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학자들도 있고, 그가 32장에서 인용하는 켈레스티누스의 편지가 본래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방하는 이들을 잠잠히 내버려 둔 갈리아의 감독들을 꾸짖은 편지였다는 점도 이 물음을 쉽게 풀지 못하게 합니다. 이 논쟁은 529년 오랑주 공의회가 믿음의 시작까지 은혜의 선물이라고 고백하면서 갈리아에서 일단락되었고 오랑주 공의회, 그 배경은 반펠라기우스주의에서 더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잘 읽으려면
처음 읽는다면 2장과 23장부터 읽으십시오.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가와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가, 이 책의 두 기둥이 거기 있습니다. 나머지는 그 둘을 역사의 예와 성경으로 풀어 가는 것이어서, 같은 말이 되풀이되는 것은 공책처럼 쓴 이 책의 성격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여기서는 이 책의 자리를 장과 단락으로 적는데, 단락 번호는 책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 매기므로 23.55는 23장의 55단락입니다.
그가 이 규칙에 스스로 그어 둔 테두리도 기억해야 합니다. 교부들의 일치를 모으는 일은 성경의 작은 물음마다 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규칙에 관한 물음에, 그것도 막 일어난 새 이단에 쓰는 것이며, 오래된 이단은 성경의 권위만으로 반박하거나 이미 내려진 공의회의 판단을 따라 멀리하라고 합니다 28.71. 아무리 거룩하고 학식 있는 감독이나 고백자나 순교자라도 모두와 다르게 가르친 것은 그 사람만의 생각으로 따로 두라고도 합니다 28.72. 이 규칙은 모든 물음에 답하는 장치가 아니라 교회가 함께 고백해 온 신앙의 중심을 지키는 울타리입니다. 그래도 이 규칙을 쓰려면 누가 그 모든 사람 안에 드는지를 먼저 정해야 한다는 지적은 여러 전통에서 나왔습니다.
그의 말은 자주 거칩니다. 그는 이단자들을 미친 개에 견주고 13.36, 펠라기우스파를 덧없는 개구리와 벼룩과 파리 떼라 부르며 9.26, 포티누스와 아폴리나리스와 네스토리우스에게 차례로 저주를 선언합니다 16.41.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는 갈라디아서의 엄한 말씀을 이어받은 것이지만 (갈 1:8), 그 시대 논쟁의 말투이기도 합니다. 그가 그리는 상대의 모습이 늘 공정한 것도 아닙니다. 네스토리우스가 정말 그리스도를 두 위격으로 나누었는지는 오늘날에도 학자들 사이에 논의가 있습니다.
이 책이 오늘의 독자에게 남기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받은 믿음을 지킨다는 겸손이고, 다른 하나는 그 믿음 안에서 더 깊이 깨닫고 자라 간다는 소망입니다. 빈켄티우스는 단번에 주신 믿음을 바꾸려는 이는 누구든 저주를 받는다고 갈라디아서를 풀었는데 8.22, 단번에 주신 믿음이라는 말은 유다서에서 왔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공통의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쓰려고 모든 열심을 내던 차에 성도들에게 단 한 번 전달된 믿음을 위해 너희가 힘써 싸우라고 너희에게 써서 권면할 필요를 느꼈노니
유 1:3
그러나 그 믿음은 굳어 버린 유물이 아닙니다. 같은 사람으로 남으면서 자라는 몸처럼, 교회는 받은 믿음을 더 깊이 깨닫고 더 분명히 말하며 자라 갑니다. 바울은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모든 일에서 그분 안에 이르도록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그분은 머리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고 말합니다 (엡 4:15).
출처
- 레랭의 빈켄티우스, 비망록 434 읽기
-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가톨릭 신앙에 관한 교의 헌장(하느님의 아들) 1870
- 장 칼뱅, 사돌레토에게 보낸 답신 1539
- 제2차 오랑주 공의회, 오랑주 공의회 결정 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