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란 무엇인가?
성경의 답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설 때 가장 먼저 닥치는 물음은 이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괜찮은가? 성경은 이 물음에 ‘의롭다 하심’이라는 말로 답합니다. 이 말은 법정에서 온 언어입니다. 재판장이 피고에게 “무죄, 옳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모두가 피고석에 있다는 데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씁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救贖)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느니라.
롬 3:23-24
값없이, 은혜로, 구속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이 칭의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못 본 척하지 않으십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세우셨다”고 하며, 이는 “내가 말하거니와 이때에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사 자신이 의롭게 되며 또 예수님을 믿는 자를 의롭게 만드는 이가 되려 하심이라.”이라고 합니다 (롬 3:25-26). 죄는 다루어졌고, 그 값은 그리스도께서 치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로우신 채로 죄인을 의롭다 하실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일이 어떻게 우리 것이 되는지 아브라함의 예로 보여 줍니다.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느니라.
롬 4:5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은 놀랍습니다. 믿음은 공로가 아니라 받는 손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비유도 이 그림을 보여 줍니다. 바리새인은 자기가 얼마나 옳은지 하나님께 아뢰었고, 세리는 눈도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사람이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다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 18:14
그 결과는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도다.
롬 5:1
그렇다면 야고보서는 어떻게 읽습니까? 야고보는 이렇게 씁니다.
그런즉 너희가 보거니와 사람이 행위로 의롭게 되고 단지 믿음만으로 되지 아니하느니라.
약 2:24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하는데 (갈 2:16), 두 말씀은 서로 부딪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교회가 가장 널리 받아들인 읽기는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사람을 향해 말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자격을 행위로 쌓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향해, 야고보는 ‘믿는다고 말하면서 아무 열매도 없는 믿음’을 향해 말합니다. 야고보는 “이와 같이 믿음도 행위가 없으면 그것만으로는 죽은 것이니라.”이라고 합니다 (약 2:17). 바울도 같은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효력이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효력이 없으되 오직 사랑으로 일하는 믿음뿐이니라.”입니다 (갈 5:6). 또 ‘의롭다 하다’라는 낱말을 야고보는 ‘그 믿음이 참됨이 드러나다’는 뜻에 가깝게, 바울은 ‘죄인이 받아들여지다’는 뜻으로 쓴다고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이 말씀을 은혜 안에서 행한 선행으로 의화가 자라 간다는 뜻으로도 읽습니다.
교회의 증언
칭의는 교회 역사에서 가장 뜨겁게 논쟁된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 모두가 동의하는 곳입니다. 어느 교회도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가르치지 않으며, 모두 구원이 은혜에서 시작된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어느 교회도 거룩한 삶이 필요 없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차이는 ‘칭의’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느냐에 있습니다.
루터교와 개혁교회는 칭의를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일, 곧 법정적 선언으로 이해합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사람에게 전가되어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루터교의 기본 신앙고백인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사람이 자기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믿음으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제4조. 칼뱅도 『기독교 강요』에서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되 나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시는 분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분이므로, 한쪽만 받고 다른 쪽은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칼뱅, 기독교 강요. 매튜 헨리도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씁니다. 신자들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때 “그들의 믿음이 그들의 의의 작거나 큰 일부로서 그들을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들을 연합시키는 수단으로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
가톨릭 교회의 공식 가르침은 트리엔트 공의회(1547년)의 칭의 교령에 있습니다. 여기서 칭의는 죄 용서일 뿐 아니라 은혜가 사람 속에 부어져 속사람이 거룩해지고 새로워지는 일까지 포함합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어서 사람이 앞서 공로로 얻을 수 없고, 믿음은 그 시작이며, 사람은 은혜에 힘입어 그 은혜와 협력하며 의 안에서 자란다고 설명합니다 트리엔트 공의회, 의화에 관한 교령. 개신교가 보기에 이것은 칭의와 성화를 섞어 하나님의 선언에 우리의 기여가 끼어들게 하는 것이고, 가톨릭이 보기에 개신교는 하나님이 사람을 실제로 변화시키지 않고 선언만 하신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이 차이와 서로에 대한 비난이 교회를 갈라놓았습니다. 한편 동방 정교회는 이 논쟁의 틀 자체를 쓰지 않고, 칭의를 하나님과의 교제로 자라 가는 구원의 길 안에서 이해합니다.
1999년에 루터교 세계연맹과 가톨릭교회는 ‘의화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에서, 사람이 오직 은혜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며 자기 공로 때문이 아니라는 기본 진리에 함께 동의한다고 밝혔습니다 의화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 두 교회는 16세기의 상호 정죄가 오늘 서로의 가르침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선언했고, 이후 세계감리교협의회(2006년)와 세계개혁교회커뮤니언(2017년)도 이 선언에 동의했습니다. 이 문서가 남은 차이를 너무 덮었다고 비판하는 신학자들이 양쪽에 있으며, 그 차이가 교회를 갈라놓을 만큼 큰지에 대한 판단도 같지 않습니다.
원어로 보기
‘의롭다 하다’는 헬라어 디카이오오(δικαιόω)입니다. ‘의’를 뜻하는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와 한 뿌리입니다. 이 낱말이 칭의 논쟁의 중심에 있습니다. 이 동사는 신약의 대부분의 용례에서 재판의 맥락, 곧 선언과 인정의 맥락에서 쓰이며, 가톨릭 학자 가운데서도 이를 인정하는 이가 많습니다. 그래서 개신교는 이 말을 ‘의롭다고 선언하다’로 읽습니다. 가톨릭 전통은 라틴어 이우스티피카레를 ‘의롭게 만들다’로 풀었던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면 그 말씀대로 사람이 실제로 의롭게 된다는 뜻을 함께 듣습니다. 두 전통 모두 의롭다 하심 안에 새 생명이 따르거나 포함된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이 말에 대응하는 낱말은 차다크(צָדֵק)입니다. 구약에서 ‘의’는 도덕적 완벽함만이 아니라 언약 관계 안에서 바르게 서 있음과 신실함을 가리킵니다.
또 피스티스(πίστις)는 ‘믿음’으로 옮기지만, 신뢰와 신실함의 뜻을 함께 가집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갈라디아서 2:16의 표현을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읽을 수 있느냐는 학자들 사이의 논쟁도 있습니다. 같은 절이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라고 하므로 어느 쪽으로 읽든 사람의 믿음은 이 구절 안에 있으며, 칭의의 근거가 우리의 성취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점도 같습니다.
흔한 반론과 답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신다면 사람들은 죄를 짓고도 상관없다고 여기지 않겠는가?” 이 반론은 바울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이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우리가 죄 가운데 거하겠느냐?” (롬 6:1). 그리고 대답합니다.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더 살리요?” (롬 6:2). 의롭다 하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오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새롭게 되기 시작합니다. 은혜가 값없다는 것이 은혜가 값싸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값은 그리스도께서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역사에서 이 가르침이 정말로 방종의 핑계로 쓰인 일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법정의 선언은 현실이 아니지 않은가? 마음이 그대로인데 의롭다고 말하는 것은 법적 허구다.” 이 반론은 가톨릭 쪽의 강한 비판이며 진지하게 답해야 합니다. 개신교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선언은 사람의 선언과 달리 그대로 이루는 말씀이며, 선언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성령을 받아 실제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지셨기 때문에 이것은 허구가 아니라 실제 값을 치른 거래입니다 (고후 5:21). 가톨릭의 설명은,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 속에서 실제로 의를 만들어 내므로 선언과 변화를 나눌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두 설명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첫째로 놓지만 그 정확한 관계는 여전히 다르며, 이 글이 어느 한쪽을 증명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더 생각해 보기
칭의는 신학의 전문 용어이기 전에 위로입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느니라.”라고 말합니다 (롬 8:1). 오늘의 내 성적표가 하나님이 나를 받아 주시는 근거가 아니라는 소식입니다. 양심이 나를 고발할 때에도 그리스도의 의가 내 편에 있습니다. 이것은 책임을 가볍게 하지 않고 오히려 무겁게 합니다. 값없이 받은 사람은 감사 때문에 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 내가 괜찮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느낍니까?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 가운데 내 기도는 어느 쪽에 가깝습니까? 믿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값이 아니라 받는 손으로 보면 무엇이 달라집니까?
더 읽으려면 은혜란 무엇인가?, 믿음이란 무엇인가?, 성화란 무엇인가?, 가톨릭과 개신교는 무엇이 다른가?를 보십시오. 로마서 3-5장을 천천히 읽는 것도 좋은 출발입니다.
관련 질문
- 은혜란 무엇인가?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값없이 베푸시는 호의와 선물이며, 그 선물은 우리를 용서하고 또 변화시킵니다. 성경은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은혜는 죄를 가볍게 만드는 면허가 아니라 새 삶을 가르치고 이루는 힘입니다.
- 믿음이란 무엇인가?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눈을 감고 어둠 속으로 뛰어드는 일이 아니라, 신실하신 분을 신뢰하고 그분께 자신을 맡기는 일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고, 선한 삶으로 열매를 맺으며, 의심 속에서도 도움을 구하는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향하는 분, 곧 그리스도께 구원이 있다고 고백해 왔습니다.
- 성화란 무엇인가?성화는 하나님이 성령으로 신자를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가시는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면서 신자가 순종으로 응답하는 일이고, 말씀과 기도와 성례와 교제 같은 은혜의 수단을 통해 자라며, 이 세상에서는 싸움과 실패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변화가 어디까지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개혁교회, 웨슬리 전통, 동방 정교회의 강조가 다릅니다.
- 가톨릭과 개신교는 무엇이 다른가?가톨릭(천주교)과 개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신성, 십자가와 부활을 함께 고백하는 한 그리스도교입니다. 둘의 차이는 권위의 중심(성경과 전통, 교황), 구원의 설명(칭의), 성례의 수와 이해, 마리아와 성도에 대한 신앙, 교회의 구조에서 나타납니다. 이 글은 각 교회의 가르침을 가능한 한 그 교회의 말로 소개합니다.
관련 주제
출처
- 루터교,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1530 — 루터교의 기본 신앙고백.
- 장 칼뱅, 기독교 강요 1559 — 개혁파 신학의 대표 저작. 읽기
- 트리엔트 공의회, 의화에 관한 교령 1547 — 칭의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공식 가르침.
- 루터교 세계연맹·가톨릭교회, 의화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 1999 — 칭의에 대한 기본 진리에 함께 동의한 문서.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