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은혜란 무엇인가?

짧은 답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값없이 베푸시는 호의와 선물이며, 그 선물은 우리를 용서하고 또 변화시킵니다. 성경은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은혜는 죄를 가볍게 만드는 면허가 아니라 새 삶을 가르치고 이루는 힘입니다.

성경의 답

은혜는 한마디로 받을 자격이 없는 이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가장 분명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엡 2:8-9

구원은 우리가 이루어 낸 것이 아니라 받은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바울은 우리가 "심지어 우리가 죄들 가운데서 죽었을 때에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느니라.)" 상태였다고 말합니다 (엡 2:5). 죽은 사람은 스스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사랑할 때 보여 주신 자신의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분이시기에 살리신 것입니다 (엡 2:4). 또 바울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제 일하는 자는 품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4). 삯은 마땅히 받을 몫이지만 은혜는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은혜이려면 행위로 얻는 것일 수 없습니다 (롬 11:6).

이 은혜는 구약에서도 이미 하나님의 성품으로 소개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이렇게 알리십니다. "주께서 그 앞으로 지나가시며 선포하시되, 주로다. 긍휼이 많고 은혜롭고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한 주 하나님이로다." (출 34:6). 그리고 그 은혜는 한 사람의 얼굴로 나타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요한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우리가 다 그분의 충만하심에서 받았으매 은혜를 대체하는 은혜니" (요 1:16).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졌고 "이는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셨으되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왔기 때문이라."입니다 (요 1:17). 은혜는 막연한 호의가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 (롬 5:8).

예수께서는 은혜를 이야기로도 보여 주셨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 먼 나라에서 허랑방탕하다 모두 잃고 돌아옵니다. 그는 아들의 자격은 이미 잃었다고 생각하고 품꾼으로라도 받아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일어나서 자기 아버지께로 가니라. 그러나 그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그에게 입을 맞추매

눅 15:20

아들이 준비한 고백을 마치기도 전에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과 가락지와 신을 가져오게 하고 잔치를 엽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그를 잃어버렸다가 찾았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기 시작하더라." (눅 15:24). 아들은 아무것도 갚지 않았고, 그를 받아 준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용서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은혜는 사람을 바꿉니다.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우리를 가르치시되 경건치 아니한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우리가 거부하고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딛 2:11-12

바울은 자신의 삶도 은혜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지금의 내가 되었으니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고전 15:10). 은혜는 우리의 수고를 없애지 않고 그것이 나오는 뿌리가 됩니다.

교회의 증언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1:16의 "은혜 위에 은혜"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우리가 먼저 받은 은혜는 믿음이고, 믿음은 "값없이 주어지기 때문에 은혜라고 불립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그것은 죄인이 받는 첫째 은혜, 곧 죄 사함입니다. 그 위에 영생이라는 또 다른 은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말씀 속에서 율법과 은혜의 차이도 짚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연약함을 보였으나 덜어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를 풀면서 크리소스토무스는 아버지가 아들을 맞이하는 모습에 주목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회개를 알아보고 그의 고백의 말을 받으려고 기다리지 않고 그의 간구를 앞질렀으며 불쌍히 여겼으니" 크리소스토무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먼저 다가가기 전에 먼저 다가온다는 뜻입니다.

매튜 헨리는 에베소서를 풀면서 이렇게 정리합니다. "구원하는 은혜는 하나님의 값없고 받을 자격 없는 선하심과 은총이며" 매튜 헨리. 그리고 로마서 6장에서는 은혜를 악용하는 일을 경계하며 이렇게 씁니다. 사도는 "복음의 값없는 은혜를 얼버무려 설명해 버리지 않고, 칭의와 거룩함의 연관이 분리될 수 없음을 보입니다" 매튜 헨리.

교회는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고 끝까지 그 은혜에 달려 있다는 데 하나로 동의합니다. 다만 은혜와 사람의 응답이 어떻게 맞물리는지에 대해서는 이해가 갈립니다. 루터 교회와 개혁 교회는 은혜가 죄인 안에 믿음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일이며,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가톨릭은 첫 은혜는 결코 공로로 얻을 수 없다고 하면서, 은혜가 영혼 안에 부어져 사람을 실제로 새롭게 하고 사람은 자유로이 그 은혜와 협력한다고 가르칩니다. 웨슬리·아르미니우스 전통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먼저 은혜를 베푸시어 응답할 힘을 주시며, 사람은 그 은혜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고 봅니다. 동방 정교회는 은혜를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언제나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시는 협력을 말합니다. 이 차이들 사이에서도 모두가 같은 곳에 서 있습니다. 구원은 사람이 자랑할 수 있는 업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어로 보기

신약에서 은혜는 카리스(χάρις)입니다. 이 말에는 호의, 선물, 감사의 뜻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헬라 세계에서 카리스는 호의를 베푸는 일과 그 선물, 그리고 받은 이의 감사를 모두 가리켰고, 신약은 이 말로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호의를 말합니다. 같은 계열의 말에서 "감사"를 뜻하는 낱말이 나왔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의 합당한 반응은 자랑이 아니라 감사입니다.

구약에서 은혜와 은총을 뜻하는 말은 헨(חֵן)입니다. 창세기 6:8에서 노아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할 때 쓰인 말입니다. 노아가 선했기 때문이라고만 말하지 않고 은혜를 입었다고 말합니다. 같은 어근의 동사는 하난(חָנַן)이며, 이 말들은 흔히 왕이나 주인처럼 높은 이가 낮은 이에게 베푸는 호의에 쓰입니다. 은혜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흔한 반론과 답

"은혜가 값없다면 사람들은 마음대로 죄를 짓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오래된 반론이고, 바울 자신도 이런 비난을 받았습니다. 독일 루터교 목사 디트리히 본회퍼는 회개도 제자의 삶도 요구하지 않는 은혜를 ‘값싼 은혜’라 부르며 경계했습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은혜가 죄를 눈감아 주는 면허로 오해되고 실제로 그렇게 쓰인 일이 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그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우리가 죄 가운데 거하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더 살리요?" (롬 6:1-2). 대답은 은혜가 값싸지 않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값을 치르고 주어졌고, 받은 사람을 새롭게 합니다. 디도서가 말하듯 은혜는 우리를 양육하여 "우리를 가르치시되 경건치 아니한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우리가 거부하고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살게 합니다 (딛 2:12). 용서받은 것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그 용서를 이용하려 하기보다 사랑으로 응답하려 합니다.

"은혜는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잘 살아 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같게 대하니까요." 탕자의 형이 바로 이 불만을 말합니다. "그가 응답하여 자기 아버지께 이르되, 보소서, 이 여러 해 동안 내가 아버지를 섬기며 어느 때고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었거늘 아버지께서 내가 내 친구들과 함께 즐기도록 내게 염소 새끼 한 마리도 결코 주지 아니하셨나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아버지의 이 아들이 돌아오매 즉시 아버지께서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하니" (눅 15:29-30). 이 감정은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렇게 답합니다. "아버지가 그에게 이르되,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고 내게 있는 모든 것은 네 것이니라." (눅 15:31). 형도 같은 은혜 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은혜는 성실함을 하찮게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아버지 곁에 있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선물이었고, 아무도 아버지 앞에 공로로 서 있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은혜를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마음 자체가 우리가 은혜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보여 줍니다.

"은혜만 말하면 사람이 노력하지 않지 않겠습니까?" 은혜는 노력과 대립하지 않고 공로와 대립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지금의 내가 되었으니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 했습니다 (고전 15:10). 은혜를 받은 사람은 더 많이 수고하되, 그것으로 구원을 얻으려 하지 않고 이미 받은 사랑에서 수고합니다. 은혜는 또 약함 속에서도 우리를 붙듭니다.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나의 강한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지느니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9).

더 생각해 보기

은혜는 성경에서 가장 좋은 소식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는다면 두 가지가 달라집니다. 먼저, 자기 힘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아야 한다는 무거운 짐이 내려놓아집니다. 다음으로, 받은 사랑이 흘러가듯 다른 사람을 대하게 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됩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얻어야 하는 것으로 느끼고 있습니까, 이미 받은 것으로 느끼고 있습니까? 내가 둘째 아들과 첫째 아들 가운데 누구에 더 가깝습니까? 내가 받은 은혜를 누구에게 흘려보낼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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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