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 선교, 동서 교회의 분열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뒤 1054년까지, 수도원은 기도와 성경과 배움을 지키며 복음을 유럽 끝까지 전했습니다. 동방에서는 이콘을 두고 큰 논쟁이 일어났고, 언어와 로마 감독의 권위와 ‘필리오케’ 문제 속에 동방과 서방의 교회는 점점 멀어졌습니다.
사막에서 수도원으로
476년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가 물러나면서 서방의 옛 질서는 무너졌습니다. 그 혼란 속에서 신앙과 배움을 지킨 것은 수도원이었습니다. 수도 생활의 뿌리는 이집트의 사막에 있습니다. 270년 무렵 젊은 안토니우스는 교회에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완전하게 되려거든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매"는 말씀을 듣고 (마 19:21) 재산을 나누어 준 뒤 사막으로 들어가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아타나시우스가 쓴 그의 전기는 널리 읽혀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에도 한몫을 했고 (이 과정의 아우구스티누스 과), 동방에서는 대 바실리우스가 함께 사는 수도 생활의 규칙을 남겼습니다.
서방 수도원의 모습을 정한 사람은 누르시아의 베네딕투스(약 480–547년)입니다. 그의 생애는 주로 대 그레고리우스의 『대화』가 전하는데, 기적 이야기가 많아 어디까지가 역사인지 가리기 어렵습니다. 그가 몬테카시노에 세운 수도원을 위해 530년 무렵 쓴 『수도 규칙』은 수도원을 주님 섬기는 법을 배우는 학교로 그립니다 베네딕투스 수도 규칙. 수도사들은 "주의 의로운 판단들로 인하여 내가 하루에 일곱 번 주를 찬양하나이다."라는 말씀을 따라 (시 119:164) 밤과 낮의 정해진 때마다 모여 기도하고, 한 주에 시편 전체를 노래했습니다. 이것이 성무일과입니다. 게으름은 영혼의 원수라 하여 손으로 일하고 성경을 읽었으며, 찾아오는 손님은 그리스도처럼 맞았고, 한 공동체에 평생 머물기로 서약했습니다. ‘기도하고 일하라’는 유명한 표어는 규칙에 그대로 나오지 않는 후대의 요약입니다.
수도사들이 꿈꾼 것은 첫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누가는 그 성도들이 "그들이 흔들리지 아니하며 사도들의 교리와 교제 안에 머물고 빵을 떼며 기도하더라."고 전합니다 (행 2:42). 존 웨슬리는 이 구절을 풀며 "그들의 날마다의 교회 교제는 다음 네 가지로 이루어졌습니다. 말씀을 들음, 모든 것을 서로 통용함, 주의 만찬을 받음, 기도입니다"라고 씁니다 웨슬리. 수도원은 바로 이것을 날마다의 질서로 삼으려 했습니다. 수도사들은 성경을 손으로 베껴 다음 세대에 넘겼고, 수도원은 학교와 도서관과 병원 구실도 했습니다. 700년 무렵 잉글랜드 북부의 수도원에서 베낀 커다란 라틴어 성경 한 권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땅끝까지: 그레고리우스와 선교사들
대 그레고리우스는 로마 시의 장관을 지낸 귀족이었으나, 재산을 들여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590년 전염병이 돌던 로마에서 로마 감독(교황)이 되어 604년까지 섬긴 그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들의 종’이라 불렀습니다. 『목회 규칙』에서 그는 목자의 삶과, 듣는 사람에 따라 말씀을 달리 전하는 법을 가르쳤고, 이 책은 중세 내내 목회자의 교본이 되었습니다 대 그레고리우스, 목회 규칙. 그의 복음서 설교는 카테나에도 많이 실렸습니다. 일꾼이 적다는 말씀을 두고 그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보십시오, 세상에는 사제들이 가득하나 하나님의 추수에서 일하는 일꾼은 드물게 발견됩니다. 우리가 사제의 직분은 맡았으나 그 직분의 일은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레고리우스.
그는 탄식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596년 그는 자기 수도원의 원장 아우구스티누스(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와 수도사들을 잉글랜드로 보냈고, 이들은 597년 켄트에 닿았습니다. 그리스도인 왕비를 둔 켄트의 왕 애설버트가 이들을 맞았고 오래지 않아 그도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지며, 아우구스티누스는 캔터베리의 첫 대주교가 되었습니다. 그보다 앞서 5세기에는 브리타니아 출신의 패트릭이 아일랜드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소년 때 아일랜드 약탈자들에게 끌려가 노예로 지내다 도망쳤던 그는 선교사가 되어 그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가 토끼풀로 삼위일체를 설명했다거나 뱀을 쫓아냈다는 이야기는 후대의 전설입니다.
아일랜드의 수도사들은 다시 바다를 건넜습니다. 콜룸바는 563년 무렵 스코틀랜드의 아이오나에 수도원을 세웠고, 콜룸바누스는 대륙으로 건너갔습니다. 8세기에는 잉글랜드의 수도사 보니파키우스가 오늘날의 독일 땅에서 일하다 754년 무렵 프리슬란트에서 순교했습니다. 동방에서도 863년 키릴루스와 메토디오스 형제가 모라비아의 슬라브인들에게 가서 문자를 만들고 그들의 말로 성경과 예배를 전했습니다. 그들을 움직인 것은 주님의 마지막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며 무엇이든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의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하시니라. 아멘.
마 28:19-20
매튜 헨리는 이 말씀을 풀며 "그들이 전파할 구원은 모두에게 공통된 구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매튜 헨리. 이 시대의 선교에는 그늘도 있었습니다. 왕을 따라 백성이 한꺼번에 세례를 받는 일이 많았고, 카롤루스 대제가 작센족에게 세례를 강요한 것처럼 칼과 함께 온 선교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수도사들이 세운 수도원과 학교와 번역된 성경은 유럽의 여러 민족이 복음을 처음 들은 자리였습니다.
이콘 논쟁과 제2차 니케아 공의회
8세기 동방 교회는 그리스도와 성인들을 그린 이콘(성화상)을 두고 크게 갈렸습니다. 황제 레오 3세 때부터, 특히 그 아들 콘스탄티노스 5세 때 비잔티움 황제들은 이콘을 우상 숭배로 보아 없애게 했습니다. 이에 맞선 사람이 황제의 손이 닿지 않는 이슬람 칼리프의 땅에 살던 다마스쿠스의 요한(약 675–749년)입니다. 그는 헬라 교부들의 가르침을 정리한 『정통 신앙에 대한 정확한 해설』로 동방 신학의 고전을 남긴 수도사입니다 다마스쿠스의 요한, 정통 신앙에 대한 정확한 해설. 이콘을 변호한 그의 글들의 논지는 성육신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그릴 수는 없지만, 아들은 "그분께서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창조물의 처음 난 자이시니"으로서 (골 1:15) 사람이 되어 눈에 보이셨으니, 그분의 얼굴을 그리는 것은 그분이 참 사람이 되셨다고 고백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물질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물질이 되신 물질의 창조주를 예배한다고 말했습니다.
787년 이레네 황후가 소집한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이콘을 변호했습니다 제2차 니케아 공의회. 공의회는 이콘에 입 맞추고 절하며 드리는 공경과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는 참된 예배를 구별했고, 형상에 드리는 공경은 그 형상이 나타내는 분께로 넘어간다는 대 바실리우스의 말을 빌렸습니다 바실리우스, 성령론. 논쟁은 843년에야 끝났고, 정교회는 지금도 해마다 이를 ‘정교회의 승리’로 기념합니다.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는 이 공의회를 일곱째 보편 공의회로 받아들입니다.
개신교회는 여기서 조심스럽습니다. 하나님은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곧 주 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니라. 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고 명하셨습니다 (출 20:4-5). 공경과 예배의 구별이 이론으로는 분명해도 형상 앞에 절하는 실제 신앙에서는 그 선이 쉽게 흐려진다는 것이 개혁자들의 염려였습니다. 서방도 처음부터 이 공의회를 반긴 것은 아니어서, 794년 프랑크푸르트 회의는 부정확한 라틴어 번역으로 그 결정을 읽고 거부했습니다. 대 그레고리우스는 그림이 글 모르는 이들에게 책 구실을 한다며 그림을 부수지도 예배하지도 말라고 했는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 오랜 생각에 답하여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이 "말 못 하는 우상으로가 아니라 그분의 말씀의 살아 있는 선포로"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신다고 말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98문. 개신교 안에서도 생각은 갈립니다. 루터교회는 예배하지 않는 한 그림과 십자가상을 교회에 둘 수 있다고 보았고, 개혁교회는 예배당에서 형상을 치웠습니다.
동방과 서방이 갈라지다
동방과 서방은 오래 한 교회였지만 서서히 멀어졌습니다. 서방은 라틴어를, 동방은 헬라어를 썼고, 시간이 지나며 서로의 말을 아는 이가 드물어졌습니다. 로마 감독은 베드로의 자리를 이은 감독으로서 온 교회를 다스릴 권위가 있다고 주장했고, 동방은 로마에 명예의 첫자리를 인정하면서도 교회의 큰일은 공의회가 함께 정한다고 보았습니다.
신경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381년의 니케아 신경은 예수께서 "그러나 내가 아버지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위로자 곧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께서 오실 때에 그분께서 나에 대해 증언하실 것이요"이라 하신 말씀을 따라 (요 15:26)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나오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서방에서는 589년 톨레도 공의회 무렵부터 여기에 ‘그리고 아들에게서’, 곧 ‘필리오케’(filioque)를 더해 불렀고, 로마도 1014년 이 문구를 받아들였습니다. 이 앱의 니케아 신경도 서방의 형태를 따라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시고’라고 고백합니다 니케아 신경 넷째 단락. 동방은 온 교회가 함께 고백한 신경을 한쪽이 홀로 고쳤고, 아버지만이 아들과 성령의 근원이시라는 진리를 흐린다며 반대했습니다. 9세기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포티우스가 이를 날카롭게 문제 삼았습니다 (교리 과정의 삼위일체 과 참고).
1054년 교황 레오 9세가 보낸 사절 훔베르트는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제단에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를 파문하는 문서를 올려놓았고, 총대주교의 회의도 사절들을 파문했습니다. 교황은 이미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난 뒤였고, 파문은 두 교회 전체가 아니라 사람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역사가는 1054년을 갑작스러운 단절이 아니라 오랜 소원함을 상징하는 해로 봅니다. 두 파문은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와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가 함께 거두었습니다.
더 깊은 상처는 1204년에 났습니다. 성지로 향하던 제4차 십자군이 방향을 돌려 그리스도인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고 라틴인 총대주교를 세운 것입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도 이 약탈을 꾸짖었지만, 동방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일을 오래 잊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형제의 도시를 짓밟은 이 일은 교회사의 부끄러운 장입니다.
정교회는 스스로를 일곱 보편 공의회의 신앙을 변함없이 지켜 온 교회로 이해합니다. 그들은 크리소스토무스의 이름이 붙은 성찬 예배를 지금도 드리고, 우리가 "그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나니 이것은 너희가 이 약속들을 힘입어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신다는 약속을 (벧후 1:4) 구원의 목표로 깊이 묵상하며, 짧은 기도를 쉬지 않고 드리는 ‘예수 기도’의 전통을 지켜 왔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그들과 함께 니케아 신경과 칼케돈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기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나눕니다. 다만 정교회는 성경을 교회의 거룩한 전통 안에서 읽으며 공의회와 전통에 권위를 두는 반면 복음주의자는 성경만을 최종 권위로 삼고, 이콘과 성인에 대한 공경과 성례의 이해에서도 생각이 다릅니다.
이 시대는 우리에게 수도사들의 기도와 성경 사랑, 땅끝까지 가는 선교의 열정, 그리고 갈라짐의 아픔을 함께 남겼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이것은 그들이 다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세상이 믿게 하옵소서." (요 17:21) 세상이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을 믿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교회가 나뉜 역사는 교회는 왜 이렇게 많이 나뉘었는가?와 가톨릭과 개신교는 무엇이 다른가?에서 더 다룹니다.
연습
- 연습 1 / 8
베네딕투스의 『수도 규칙』이 정한 수도 생활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2 / 8
597년 잉글랜드의 켄트에 닿은 선교단을 보낸 사람은 누구입니까?
- 연습 3 / 8
다마스쿠스의 요한이 이콘을 변호한 중심 논지는 무엇입니까?
- 연습 4 / 8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가 정한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5 / 8
교회 안의 형상에 관한 개신교 전통들의 생각을 바르게 짝지은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6 / 8
‘필리오케’(filioque)란 무엇입니까?
- 연습 7 / 8
1054년에 관해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8 / 8
다음 사건들을 일어난 순서대로 바르게 놓은 것은 무엇입니까?
출처
- 누르시아의 베네딕투스, 베네딕투스 수도 규칙 — 기도와 노동, 날마다 드리는 성무일과, 한 공동체에 머무는 삶을 정한 서방 수도원의 규칙.
- 대 그레고리우스, 목회 규칙 — 목자의 부르심과 삶, 듣는 사람에 따라 말씀을 다르게 전하는 법을 가르친 중세 목회의 교본.
- 다마스쿠스의 요한, 정통 신앙에 대한 정확한 해설 — 8세기. 헬라 교부들의 가르침을 정리한 동방 교회의 고전.
- 제2차 니케아 공의회, 성화상에 관한 정의 787 — 성화상은 공경하되 예배는 하나님께만 드린다고 정의했다. 동방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가 받아들인다.
- 바실리우스, 성령론 — 375년경. 성령이 아버지, 아들과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심을 변호한다.
성경과 교회의 신경, 교부와 신학자들의 글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복음주의 신앙에 서서, 각 전통과 신학자를 먼저 그들 자신의 말로 공정하게 소개한 뒤 성경에 비추어 살핍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