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콜라 신학
Scholasticism
스콜라 신학은 11세기부터 15세기까지 서방의 학교와 대학에서 자란 신학으로, 믿음으로 받은 진리를 이성으로 이해하고 질문과 반론과 답의 방법으로 차근차근 정리하려 했습니다. 안셀무스, 페트루스 롬바르두스, 토마스 아퀴나스가 대표하며, 그 방법은 종교개혁 뒤의 개신교 신학에도 이어졌습니다.
학교에서 자란 신학
‘스콜라’는 학교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천 년 무렵까지 서방의 신학은 주로 수도원에서 성경과 교부들의 글을 읽고 묵상하며 자랐습니다. 11세기에 도시와 대성당 학교가 커지고 1200년 무렵 파리와 옥스퍼드에 대학이 생기자, 신학은 강의실에서 따져 묻는 학문이 되었습니다. 스콜라 신학은 하나의 교리라기보다 방법입니다. 낱말을 정확히 정의하고 구별을 세우며, 성경과 교부들의 말이 어긋나 보이는 곳마다 질문을 세워 양쪽 근거를 듣고 답합니다. 그래서 스콜라 신학자들끼리도 결론이 자주 달랐습니다.
그 정신은 안셀무스(1033–1109)의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이라는 말에 담겨 있습니다. 이해해야 믿겠다는 것이 아니라, 믿기에 더 깊이 이해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안셀무스, 프로슬로기온. 이 노력은 믿는 이에게 주신 성경의 권면과 통합니다.
오직 너희 마음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 너희에게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며
벧전 3:15
아벨라르의 『예와 아니오』는 어긋나 보이는 권위를 나란히 놓고 따지는 법을 가르쳤고,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약 1100–1160)의 『명제집』은 교부들의 말을 주제별로 엮어 수백 년 동안 대학의 교과서가 되었습니다 페트루스 롬바르두스, 명제집. 이 방법은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의 『신학대전』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그는 항마다 질문을 세우고 반대쪽의 가장 강한 논거를 먼저 든 뒤, 성경이나 교부의 말을 놓고 자기 답을 펼치고 반론에 하나하나 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이성은 은혜의 원수가 아니며,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었습니다. 14세기에는 둔스 스코투스와 오컴의 윌리엄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뜻을 더 강조하며 다른 길을 열었습니다.
엇갈린 평가
가톨릭 교회는 토마스를 ‘공통 박사’로 기리고, 1879년 교황 레오 13세는 그의 철학을 가톨릭 교육의 중심에 두도록 권했습니다. 동방 교회는 대체로 이런 학교 신학의 길을 걷지 않고 교부들의 전통과 예배와 기도 속에서 신학을 해 왔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비판은 날카로웠습니다. 루터는 스콜라 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끌려가 은혜와 칭의를 흐렸다고 보았습니다. 그가 배운 중세 말 신학의 한 흐름은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다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다고 가르쳤는데, 루터는 이것이 은혜를 공로의 보상으로 바꾼다고 여겼습니다. 1518년 하이델베르크 논제에서 그는 보이는 것으로 하나님을 헤아리는 ‘영광의 신학자’와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아는 ‘십자가의 신학자’를 맞세웠습니다 루터, 하이델베르크 논제. 에라스무스 같은 인문주의자들도 지나치게 세밀한 질문들을 꼬집으며 성경과 교부의 원전으로 돌아가자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루터와 칼뱅 다음 세대의 개신교 신학자들, 곧 요한 게르하르트와 프랜시스 튜레틴 같은 이들은 스콜라 신학의 방법을 다시 꺼내어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변호했습니다. 결국 문제는 방법 자체보다 이성이 어디에 서느냐였습니다. 이성이 성경 위에 서면 바울이 경고한 "어떤 사람이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하지 못하도록 조심하라. 그것들은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을 따르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니라."가 되지만 (골 2:8), "우리는 상상하는 것과 또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며" 할 때 (고후 10:5) 믿음을 섬기는 도구가 됩니다. 교리를 주제별로 정리하는 오늘의 조직신학도 이 전통에 빚지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이야기는 안셀무스와 스콜라 신학의 시작 과와 토마스 아퀴나스 과에서 이어집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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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