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다케(열두 사도의 가르침)
초대 교회 · 1세기 말–2세기 초
영어 본문: I. H. 홀·J. T. 네이피어 영역(1884), 『니케아 이전 교부들』 7권(1886) · 위키문헌 · 우리말은 이 영어 본문에서 옮겼습니다.
해설
『디다케』는 1세기 말이나 2세기 초의 한 교회가 세례를 앞둔 이들에게 가르친 생명의 길과 세례, 기도, 성찬, 교회 생활의 지침을 담은 짧은 책으로, 처음 교회가 어떻게 배우고 예배하며 살았는지 보여 주기에 오늘도 읽힙니다.
사도들의 이름으로 전해진 가르침
디다케(διδαχή)는 그리스어로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누가가 처음 교회를 두고 "그들이 흔들리지 아니하며 사도들의 교리와 교제 안에 머물고 빵을 떼며 기도하더라." 힘썼다고 전할 때(행 2:42) 쓴 바로 그 말입니다. 이 책을 전하는 사본에는 ‘열두 사도의 가르침’이라는 짧은 제목과, 주께서 열두 사도를 통해 이방 민족들에게 주신 가르침이라는 긴 제목이 함께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열두 사도가 직접 쓴 책은 아닙니다. 지은이는 이름을 남기지 않았고, 한 교회가 사도들에게서 받았다고 믿은 가르침을 모아 엮은 것으로 보입니다.
언제 어디서 쓰였는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흔히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의 글로 보며, 많은 학자는 로마 교회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대개 96년 무렵으로 봅니다)와 비슷한 때, 곧 100년 전후를 꼽습니다. 1세기 중엽으로 올려 잡는 학자도, 2세기 중엽으로 늦추는 학자도 있고, 여러 시기에 걸쳐 조금씩 자라 지금의 모양이 되었다고 보는 이도 많습니다. 쓰인 곳은 시리아 어딘가로 짐작하는 학자가 많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이 무렵의 글들은 흔히 ‘사도 교부’의 글로 묶이며, 그 시대의 이야기는 신학 과정의 사도 이후의 교회: 변증가와 이레나이우스 과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옛 교회는 이 책을 알았고 귀하게 여겼습니다. 325년 무렵 교회사가 에우세비우스는 신약의 책들을 정리하면서 이 책을 신약에 들지 않는 책들 가운데 두었고 에우세비우스, 교회사 3.25, 367년 아타나시우스는 정경에는 들지 않지만 새로 교회에 들어와 경건의 말씀을 배우려는 이들이 읽도록 교부들이 정해 둔 책 가운데 사도들의 가르침이라 불리는 책을 꼽았습니다 아타나시우스, 제39 부활절 서신. 많은 학자는 이것을 이 책, 또는 그 한 형태로 봅니다. 그 뒤 이 책은 후대의 교회 규범서들 속에 녹아들었고, 서방의 학자들은 오랫동안 그 이름만 알았습니다.
그러다 1873년, 정교회의 학자 필로테오스 브리엔니오스가 콘스탄티노플(오늘날 이스탄불)의 한 도서관에서 1056년에 베껴 쓴 사본 하나를 찾아냈고, 그 안에 이 책이 온전히 들어 있었습니다. 그가 1883년에 본문을 펴내자 여러 나라의 교회와 학계가 크게 주목했고, 곧 여러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니 루터와 칼뱅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이 책을 읽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온전한 그리스어 본문은 이 사본 하나뿐이며, 몇 조각의 옛 사본과 번역이 그것을 거듭니다.
세례를 앞둔 이들을 위한 지침서
『디다케』는 편지도 설교도 신학 논문도 아닙니다. 한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을 만큼 짧은 열여섯 장 안에, 한 교회가 새 신자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기도하고 성찬을 나누며 사역자를 맞고 세우는 법을 차례로 적은 지침서입니다. 그래서 흔히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교회 규범서로 꼽힙니다. 그 짜임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뉩니다.
1장부터 6장까지는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가르칩니다. 7장은 이 모든 것을 먼저 말한 다음에 세례를 주라고 하는데 7.1, 이것은 앞의 여섯 장이 세례를 받으려는 이에게 먼저 들려주던 가르침이었음을 알려 줍니다. 7–10장은 세례, 금식과 기도, 그리고 9장과 10장의 성찬 기도를 담습니다. 11장부터 15장까지는 교회 생활의 규칙입니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말씀을 전하는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를 어떻게 맞고 분별할지, 길 가다 들른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대접할지, 주의 날에 어떻게 모일지, 감독과 집사를 어떻게 세울지를 말합니다. 마지막 16장은 깨어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라는 권면입니다.
여기에는 이 책 전체가 한 부분으로 실려 있어 빠진 장이 없습니다. 다만 온전한 본문을 전하는 유일한 사본이 세상이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시는 주님을 보리라는 문장 16.8에서 끝나기 때문에, 많은 학자는 마지막 몇 줄이 사라졌다고 봅니다. 또 두 길의 가르침은 흔히 1세기 말에서 2세기 전반 사이의 글로 보는 『바나바 서신』에도 비슷한 모양으로 나옵니다. 많은 학자는 그 바탕에 유대교의 도덕 교훈이 있었으리라 보고, 산상수훈의 말씀을 모은 1장 3절부터의 대목은 나중에 덧붙여졌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책을 받아 읽은 교회에게 그것은 하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생명의 길
책은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 두 길이 있으며 그 차이가 크다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1.1. 모세와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앞에 놓았던 바로 그 선택입니다.
너는 또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렘 21:8
예수께서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 문은 좁고 그 길이 좁아 그것을 찾는 자가 적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7:14). 『디다케』에서 생명의 길은 두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내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황금률이 붙습니다 1.2. 예수께서 마 7:12에서 남을 대접하라고 하신 말씀을 하지 말라는 꼴로 적은 것인데, 이런 말은 『토비트』 같은 유대 문헌에도 보입니다.
이어지는 풀이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모읍니다. 저주하는 이를 축복하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핍박하는 이를 위해 금식하라고 하며 1.3, 오른뺨을 치는 이에게 다른 뺨을 돌려 대고 구하는 이에게 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무작정 주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필요 없이 받는 이는 그 까닭을 셈해야 하리라 하고 1.5, 누구에게 줄지 알기까지 자선을 손에 쥐고 땀이 나도록 기다리라는 전해 오는 말을 덧붙입니다 1.6. 아낌없는 손과 분별하는 눈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장은 둘째 계명이라는 이름으로 십계명을 풀어 갑니다. 살인과 간음과 도둑질 사이에 마술과 주술이, 그리고 낙태와 갓난아이를 죽이는 일이 함께 금지됩니다 2.2. 갓난아기를 내다 버리는 일이 드물지 않던 로마 세계에서, 이 구절은 낙태와 영아 살해를 분명히 금한 가장 이른 그리스도인의 글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말의 죄도 무겁게 다룹니다. 두 마음과 두 혀를 품지 말고, 말은 거짓되거나 헛되지 않고 행함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2.5. 그리고 누구도 미워하지 말되, 어떤 이는 꾸짖고 어떤 이를 위해서는 기도하며 어떤 이는 내 목숨보다 더 사랑하라고 합니다 2.7.
3장에서 선생은 제자를 자녀라 부르며, 잠언의 아버지처럼 타이릅니다. 분노는 살인으로, 정욕은 음행으로, 점치는 일은 우상 숭배로, 거짓말은 도둑질로, 불평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데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3.2. 큰 죄를 막으려면 그 길목의 작은 죄부터 멀리하라는 가르침으로, 형제에게 노하는 것을 살인과 나란히 놓으신 주님의 말씀(마 5:21-22)과 같은 결입니다. 대신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리니 온유하라고 하고 3.7, 하나님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알고 닥치는 일을 선한 것으로 받으라고 권합니다 3.10.
4장은 공동체의 삶으로 넓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를 밤낮 기억하고 4.1, 날마다 성도들의 얼굴을 찾고, 다투는 이들을 화해시키라고 합니다. 가난한 이를 외면하지 말고 모든 것을 형제와 나누라고 하며, 죽지 않을 것을 함께 나누는 이들이라면 죽을 것들은 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묻습니다 4.8. 사도행전의 처음 교회도 "믿은 자들의 무리가 한 마음 한 혼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그들 중에 아무도 자기가 소유한 것들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하더라." 살았습니다 (행 4:32).
주인에게는 같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종을 모질게 부리지 말라 하고 4.10 종에게는 주인을 하나님의 모형처럼 여겨 복종하라고 하는데 4.11, 노예제가 당연하던 세상에서 신약의 권면(엡 6:5-9)과 닮은 이 대목은 오늘의 독자에게 아프게 들립니다. 이 물음은 성경은 노예제를 인정하는가?에서 다룹니다. 4장은 교회에서 허물을 고백하고 악한 양심으로 기도하러 나아가지 말라는 말로 생명의 길을 맺습니다 4.14. 5장은 죽음의 길에 놓인 악을 길게 늘어놓은 뒤 이 모든 것에서 건짐을 받으라고 부르고 5.2, 6장은 누구도 이 가르침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하게 하라고 당부합니다 6.1.
물과 떡과 기도
이 가르침을 다 들은 사람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7장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할 수 있으면 흐르는 물에서 세례를 주라고 합니다 7.1. 흐르는 물이 없으면 다른 물로, 찬물로 할 수 없으면 따뜻한 물로 하고, 그것도 넉넉지 않으면 머리에 세 번 물을 부으라고 합니다 7.3. 세례 전에는 세례를 주는 이와 받는 이, 그리고 할 수 있는 다른 이들도 함께 금식했습니다 7.4. 신약 밖에서 세례를 베푸는 법을 적은 가장 이른 기록으로 꼽히는 이 장은, 주님의 마지막 명령을 그대로 따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며
마 28:19
8장은 금식과 기도를 다룹니다. 외식하는 자들처럼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하지 말고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하라고 하는데 8.1, 금식할 때 "또한 너희는 금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기들의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들의 보상을 받았느니라." 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마 6:16)을 이어받은 표현입니다. 많은 학자는 여기의 외식하는 자들을 바리새파 전통을 따라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던 이웃 유대인들로 봅니다(눅 18:12 참고). 같은 하나님을 섬기던 이웃과 자신을 구별하려던 교회의 모습이지만, 오늘의 독자는 이 날카로운 말을 한 민족 전체에게 넓혀 읽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기도는 주님이 복음서에서 명하신 대로 주기도문으로 드리고 8.2, 하루에 세 번 드리라고 합니다 8.3. 이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의 것과 거의 같고 끝에 짧은 송영이 붙어 있는데, 주기도문 끝의 송영을 전하는 가장 이른 증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9장과 10장은 성찬의 기도입니다. 『디다케』는 이 식탁을 감사라는 뜻의 에우카리스티아(εὐχαριστία)라 부르는데, 성찬을 가리키는 라틴어와 영어의 이름(eucharistia, Eucharist)도 이 말에서 왔습니다. 먼저 잔을 두고 하나님께서 종 예수를 통해 알려 주신 다윗의 거룩한 포도나무로 인해 감사하고 9.2, 이어 뗀 떡을 두고 생명과 지식으로 인해 감사합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종이라 부르는 것은 사도행전에서 처음 교회가 드린 기도와 같고(행 4:27), 잔이 떡보다 앞서는 순서는 고전 10:16에도 보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빕니다. 이 떡이 산 위에 흩어져 있다가 모여 하나가 되었듯이, 주의 교회도 땅끝에서부터 주의 나라로 모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9.4. 바울도 "우리가 많아도 한 빵이요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그 한 빵에 참여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라."라고 말합니다 (고전 10:17).
이 식탁에서는 세례받은 이들만 먹고 마실 수 있었고, 『디다케』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그 근거로 듭니다 9.5. 배불리 먹은 뒤에 드리는 10장의 감사는 우리 마음에 거하게 하신 하나님의 이름과 지식과 믿음과 죽지 않음, 그리고 종 예수를 통해 주신 신령한 음식과 음료와 영생을 노래합니다 10.3. 기도는 은혜가 오고 이 세상이 지나가기를 구하며,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아람어 마라나타(μαρὰν ἀθά)와 아멘으로 끝납니다 10.6.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이 말을 썼고, 개역한글은 이를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로 옮겼습니다 (고전 16:22). 이 기도에는 주님이 잡히시던 밤에 하신 말씀이 나오지 않고 배불리 먹은 뒤라는 말도 있어서, 이것이 성찬 자체의 기도인지 성찬과 함께 나누던 공동 식사의 기도인지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립니다.
14장은 주의 날마다 모여 떡을 떼고 감사하되, 먼저 허물을 고백하여 제물이 깨끗하게 하라고 합니다 14.1. 이웃과 다툰 사람은 화해하기 전에는 함께 모이지 말아야 하니,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라는 주님의 말씀(마 5:23-24)을 따른 것입니다. 『디다케』는 이 제물을 말라기의 예언과 잇습니다 14.3. 말라기는 이방 민족 가운데 각처에서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인들 가운데서 내 이름이 크게 되며 모든 곳에서 내 이름을 위해 향을 드리고 정결한 헌물을 드리리니 내 이름이 이교도들 가운데서 크게 되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을 드리리라고 했습니다 (말 1:11). 이어 15장은 주님께 합당한 감독과 집사를 스스로 세우라고 하며, 그들은 온유하고 돈을 사랑하지 않으며 참되고 검증된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15.1. 바울도 빌립보 교회의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빌립보에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과 또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편지했습니다 (빌 1:1).
이토록 이른 시기에 세례와 성찬과 직분을 말하는 책이기에, 여러 전통이 저마다 이 책에서 자기 뿌리를 봅니다. 가톨릭 교회는 말라기의 깨끗한 제물을 미사의 희생과 잇는 오랜 해석의 이른 증언을 여기서 보고, 정교회는 지금도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하며 이 책이 보여 주는 전통을 이어 갑니다. 이 두 교회와 성공회는 감독과 집사를 세우라는 말에서, 이그나티우스 때에 이미 한 사람의 감독을 중심으로 자리 잡은 직분 질서의 출발을 봅니다. 많은 개신교인은 이 제물을 깨끗한 양심으로 드리는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찬양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리자. 그것은 곧 그분의 이름에 감사를 드리는 우리 입술의 열매니라."로 읽습니다 (히 13:15). 장로교회는 감독이 여럿이라는 데서 신약처럼 감독과 장로가 같은 직분이었다고 보고, 회중 교회는 교회가 스스로 그들을 세운다는 데 주목합니다.
세례를 두고도 읽는 눈이 다릅니다. 물에 잠기는 방식을 지키는 교회들은 붓는 일이 물이 모자랄 때의 예외였다는 데, 붓거나 뿌리는 교회들은 그때에도 붓는 일이 허락되었다는 데 주목합니다. 신자의 세례를 주는 교회는 가르침과 금식이 세례에 앞선다는 데 주목하고, 유아세례를 주는 교회는 이 책이 어른 개종자를 두고 말할 뿐 아이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는 데 주목합니다. 이 문제들은 교리 과정의 세례와 성찬 과에서 나란히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잘 읽으려면
『디다케』는 성경이 아닙니다. 옛 교회 스스로 이 책을 정경 밖에 두고 새 신자가 읽을 만한 좋은 책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성경처럼 읽지 말고, 성경, 특히 마태복음을 곁에 펴 두고 사도들 바로 다음 세대의 교회가 그 말씀을 어떻게 살아 내려 했는지 들여다보는 창으로 읽으면 좋습니다. 앞의 여섯 장은 세례 전에 소리 내어 들려주던 가르침이었으니, 소리 내어 읽어도 좋습니다. 하루 세 번 주기도문을 드리고, 금식하며, 주의 날마다 함께 떡을 떼고, 가난한 이와 나그네를 돌보는 한 교회가 거기 있습니다.
11–13장을 읽을 때는 여기의 사도가 열두 사도가 아니라 이곳저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던 순회 사역자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교회는 그들을 주님처럼 맞되, 사흘을 머물거나 11.5 돈을 달라고 하면 거짓 선지자로 여겼습니다 11.6. 성령으로 말하는 선지자를 시험하거나 판단하지 말라는 11.7은 놀랍게 들리지만, 바로 이어서 성령으로 말한다고 다 선지자가 아니며 주님의 삶의 방식을 지닌 이만 선지자이니 그 삶으로 참과 거짓을 가리라고 합니다 11.8. 주님도 "그러므로 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마 7:20). 일할 수 있는데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먹고살려는 이를 그리스도를 팔아 장사하는 자라 부르는 12.5도 나그네를 기꺼이 맞으면서도 속지 않으려던 교회의 지혜를 보여 줍니다. 11.11처럼 지금도 뜻이 분명하지 않아 해석이 갈리는 구절도 있으니, 처음 읽을 때는 가볍게 지나가도 괜찮습니다.
또 이 책이 말하지 않는 것도 알고 읽어야 합니다. 『디다케』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에 관한 가르침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많은 학자는 이 책이 복음을 처음 전하는 글이 아니라 이미 복음을 받은 교회가 살아가는 법을 적은 지침서이기 때문이라고 보며, 실제로 이 책은 기도와 자선과 모든 행위를 주님의 복음에 있는 대로 하라고 가리킵니다 15.4.
그래도 가진 것이 있으면 손으로 내주어 죄를 속하라는 4.6 같은 말은 신중히 읽어야 합니다. 잠언도 "긍휼과 진리로 말미암아 불법이 정결하게 되며 주를 두려워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악을 떠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잠 16:6). 가톨릭 교회는 기도와 금식과 자선을 회개를 드러내는 길로, 사랑의 실천을 죄 사함에 이르는 길의 하나로 가르치며 이런 말씀을 그 오랜 뿌리로 읽습니다. 많은 개신교인은 이것을 죄 사함을 사는 값이 아니라 용서받은 이의 사랑으로 읽고, 죄를 속하신 분은 그리스도 한 분이시라는 복음 아래 둡니다.
마지막 16장은 깨어 있으라는 부름입니다. 등불이 꺼지지 않게 하고 허리띠를 풀지 말고 준비하라고 하며 16.1, 마지막 때에 거짓 선지자가 많아지고 양이 이리로 변하며, 세상을 속이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인 양 나타나 사람들이 시험의 불을 지나리라고 말합니다. 그 뒤 하늘에 펼쳐지는 표적과 나팔 소리와 죽은 자들의 부활이 차례로 나타나고, 세상이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시는 주님을 보리라는 데서 본문이 멈춥니다. 첫째 표적은 하늘이 열리는 일로도, 팔을 벌린 십자가로도 읽히며, 부활이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오는 성도들의 것이라는 대목 16.7도, 끝이 사라진 탓에 그 뒤에 무엇이 이어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재림을 둘러싼 여러 견해는 재림과 천년왕국 과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찬의 기도가 마라나타로 끝나듯, 이 책도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의 소망으로 끝납니다. 성경 끝자락의 기도도 같습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시는 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 하시는도다. 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
계 22:20
출처
- 에우세비우스, 교회사 3.25
- 아타나시우스, 제39 부활절 서신 367
- 초대 교회, 디다케(열두 사도의 가르침)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