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전적 타락은 타락 이후 사람의 지성과 의지와 감정과 몸 어느 부분도 죄의 부패를 벗어나지 못하여,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서거나 구원에 이르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악하다는 뜻은 아니며, 하나님의 형상과 양심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전적’이라는 말의 뜻
전적 타락은 원죄가 사람에게 끼친 결과를 종교개혁 전통, 특히 개혁교회가 부르는 이름입니다. ‘전적’은 정도가 아니라 범위를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만큼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과 의지와 감정과 몸 가운데 죄에 물들지 않은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하나님께서 사람의 사악함이 땅에서 크고 또 그의 마음에서 생각하여 상상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보셨고 (창 6:5), 예레미야는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극도로 사악하니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고 말합니다 (렘 17:9). 바울은 시편의 말씀을 모아 이렇게 진단합니다.
이것은 기록된바,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 그들이 다 길에서 벗어나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도다.
롬 3:10-12
그 결과는 영적인 무능력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육신적인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참으로 그리할 수도 없으므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롬 8:7). 사람은 "또 그분께서 범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자이고 (엡 2:1), 예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며 내게 오는 그를 마지막 날에 내가 일으키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요 6:44).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말씀을 이렇게 풉니다. "이것이 은혜의 교리입니다. 이끌림을 받지 않으면 아무도 오지 못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그렇다고 죄인에게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타락한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과 양심을 지니고, 가족을 사랑하며 정직하게 일하고 아름다운 것을 짓습니다. 개혁파는 하나님이 일반 은총으로 죄를 억제하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거나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설 수는 없습니다.
교회가 이 말을 쓰게 된 길
이 가르침의 뿌리는 펠라기우스에 맞선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 신학에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1525년 에라스무스에 답하여, 구원에 관해서는 사람의 의지가 죄에 매여 있다고 논증했습니다 루터, 노예 의지론. 도르트 총회(1618–1619)는 셋째·넷째 교리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죄 가운데 잉태되고 본성상 진노의 자녀이며, 구원에 이르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악에 기울어 있으며, 죄 가운데 죽어 있고 죄에 종노릇하며,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은혜가 없이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려 하지도 못하고 돌아올 수도 없으며 …
도르트 신경 셋째·넷째 교리 3조
같은 신경은 타락한 사람에게도 자연의 빛이 희미하게 남아 있으나 구원에 이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덧붙입니다 도르트 신경 셋째·넷째 교리 4조. ‘전적 타락’이라는 이름은 신경 자체의 말이 아니라 후대 영어권에서 굳어진 말로, 오늘날에는 20세기에 널리 쓰인 TULIP(튤립)이라는 요약의 첫 글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칼뱅주의 참고).
전통들이 다르게 말하는 곳
루터교와 개혁교회는 타락한 의지가 구원에 관해서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회심과 거듭남이 온전히 하나님의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개혁교회는 이 은혜가 택하신 이들에게 반드시 효력을 낸다고 설명하고 (효과적 부르심 참고), 루터교는 사람이 이 은혜를 거부할 수 있다고 봅니다.
웨슬리 전통과 아르미니우스 전통도 타락의 깊이를 똑같이 말합니다. 항론서도 사람이 스스로는 참으로 선한 것을 생각하거나 행할 수 없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항론서. 다른 점은 은혜가 이 무능력을 어떻게 이기느냐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선행 은총을 주셔서 복음에 응답할 자유를 회복시키시며, 그 은혜는 거부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웨슬리, 성경적 구원의 길. 이것은 복음주의 안의 오랜 논쟁이며, 두 쪽 모두 성경을 진지하게 읽고 구원이 처음부터 은혜라는 데 함께 섭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 참고).
가톨릭 교회는 원죄로 본성이 상처를 입었으나 완전히 부패하지는 않았고, 자유의지도 약해졌을 뿐 없어지지 않았다고 가르칩니다 트리엔트 공의회, 의화에 관한 교령. 그러면서도 믿음의 시작까지 은혜에서 온다는 오랑주 공의회(529)의 고백을 받아들입니다 오랑주 공의회. 정교회는 전적 타락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이 어두워졌으나 자유는 남아 있어 은혜와 함께 일한다고 설명합니다. 교리 과정의 원죄와 그 결과 과와 도르트 신경의 다섯 교리 과도 읽어 보십시오.
출처
- 마르틴 루터, 노예 의지론 1525
- 항론파, 항론서(다섯 조항) 1610
- 존 웨슬리, 성경적 구원의 길 설교 43 / Sermon 43 (1765) 읽기
- 트리엔트 공의회, 의화에 관한 교령 1547
- 제2차 오랑주 공의회, 오랑주 공의회 결정 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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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