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슬픔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가?

짧은 답

슬픔은 믿음이 없다는 표시가 아니라 사랑의 다른 얼굴입니다. 예수께서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고, 성경은 소망 없는 사람처럼 슬퍼하지 말라고 할 뿐 슬퍼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슬픔에는 시간이 걸리며,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사람 가까이 계시고, 교회는 우는 사람과 함께 웁니다.

성경의 답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세상이 멈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는 ‘좋은 곳에 갔으니 울지 말라’, ‘이제 그만 힘을 내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서두르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짧은 구절 가운데 하나가 그것을 보여 줍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의 누이 마리아는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그때에 마리아가 예수님 계신 곳에 와서 그분을 보고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그분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으리이다, 하더라."라고 말했습니다 (요 11:32). 서운함이 묻어나는 말이었지만 예수께서는 그를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마리아가 우는 것과 함께 온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셨고, 그다음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시더라.

요 11:35

예수께서는 조금 뒤에 나사로를 살리실 것을 아셨습니다. 조금 전 마르다에게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말씀하신 분입니다 (요 11:25). 그런데도 우셨습니다. 그러니 눈물은 소망의 반대가 아닙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이에 유대인들이 이르되, 보라, 그분께서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고"라고 말했습니다 (요 11:36). 슬픔은 사랑이 남긴 자리입니다. 이사야는 오실 메시야를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거부되었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라. 우리는 그를 피하려는 것 같이 우리의 얼굴을 감추었으며 그는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는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불렀습니다 (사 53:3). 우리의 슬픔을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바울도 그리스도인에게 슬퍼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아, 잠자는 자들에 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것은 너희가 아무 소망 없는 다른 사람들 같이 슬퍼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살전 4:13

바울이 말하는 것은 소망 있는 슬픔입니다. 그 소망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일어나셨음을 믿을진대 그와 같이 예수님 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데려오시리라."는 약속에 있습니다 (살전 4:14). 그리고 그는 "그러므로 이 말씀들로 서로 위로하라."고 덧붙입니다 (살전 4:18). 슬픔은 혼자 견디는 것이 아니라 함께 견디는 것입니다.

성경은 슬퍼하는 사람에게 기도할 말도 줍니다. 시편 13편은 "오 주여, 어느 때까지 나를 잊으려 하시나이까? 영원히 잊으려 하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어느 때까지 내게 숨기려 하시나이까?"로 시작합니다 (시 13:1). 시편 42편의 기자는 "그들이 계속해서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므로 내 눈물이 밤낮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시 42:3). 다윗은 "내가 떠도는 것을 주께서 세시오니 내 눈물들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그것들이 주의 책에 있지 아니하나이까?"라고 기도했습니다 (시 56:8).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 한 방울도 흘려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무너진 마음에서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주께서는 상한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가까이 계시며 통회하는 영을 가진 자들을 구원하시는도다.

시 34:18

슬픔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요셉은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했고 (창 50:10), 이스라엘은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했습니다 (신 34:8). 전도서는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애곡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라고 말합니다 (전 3:4). 그리고 교회는 그 시간을 함께 지나는 공동체입니다. 바울은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피 우는 자들과 함께 슬피 울라."고 말합니다 (롬 12:15).

교회의 증언

교부들은 예수의 눈물을 오래 묵상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신 것은 사람들에게 울도록 가르치시려는 것 외에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 알퀴누스는 "그분은 신성으로 다시 살리실 수 있는 자를 위하여 인성으로 우셨습니다"라고 씁니다 알퀴누스.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분이 우리의 슬픔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뜻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산상설교를 풀면서 "애통은 사랑하던 것을 잃은 슬픔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크리소스토무스는 같은 구절에서 "하나님의 긍휼은 언제나 우리의 괴로움보다 큽니다"라고 덧붙입니다 크리소스토무스.

아우구스티누스 자신도 그 눈물을 배웠습니다. 『고백록』 제9권 12장에서 그는 어머니 모니카를 떠나보낸 일을 이야기합니다. 처음에는 믿음 안에서 세상을 떠난 이를 위해 우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여겨 눈물을 참았지만, 결국 홀로 하나님 앞에서 어머니를 위해, 또 자신을 위해 울었고 거기서 쉼을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매튜 헨리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을 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은 정당합니다. 그들에게는 유익일지라도 우리의 손실을 두고 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애정을 금하지 않으며 은혜가 그것을 없애지 않습니다.

매튜 헨리

요한복음 11장에서는 "그분은 신자들의 모든 고난에 함께 고난을 받으십니다"라고 쓰고 매튜 헨리, 시편 56편에서는 "하나님께는 자기 백성의 눈물을 위한 병과 책이 있습니다"라고 씁니다 매튜 헨리. 로마서 12장을 풀면서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서로의 슬픔과 기쁨에 함께하게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매튜 헨리.

원어로 보기

요한복음 11:35의 "눈물을 흘리시더라"는 헬라어 다크뤼오(δακρύω)입니다. 신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오는 말로, ‘눈물을 흘리다’라는 뜻입니다. 바로 앞에서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우는" 것에는 소리 내어 우는 것을 가리키는 클라이오(κλαίω)가 쓰였습니다 (요 11:33). 곡하는 소리 가운데서 예수의 눈에도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분은 슬픔을 멀리서 설명하지 않으시고 그 한가운데 서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8의 "위로하라"는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입니다. ‘곁에’와 ‘부르다’가 합쳐진 말로, 본래 누군가를 곁으로 불러오는 일을 뜻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의 "애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요"도 같은 말입니다 (마 5:4). 성경의 위로는 멀리서 건네는 충고가 아니라 곁에 와서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흔한 반론과 답

"믿는 사람이 오래 슬퍼하는 것은 믿음이 약한 것이다. 고인은 더 좋은 곳에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의 소망이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소망이 상실을 없애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사람이 그립습니다. 예수께서도 부활을 아시면서 우셨고, 스데반이 순교했을 때 경건한 사람들은 그를 장사하고 "독실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옮겨 장사지내고 그를 위하여 크게 애도하니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행 8:2). 슬픔과 소망은 서로를 지우지 않고 함께 갑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 잊힌다. 이제 그만 털고 일어나야 한다." 슬픔에는 정해진 일정이 없습니다.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물러가고, 기일이나 명절에 다시 찾아오기도 합니다. 야곱은 요셉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자녀들의 위로를 받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창 37:35). 회복은 잊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다른 방식으로 품고 사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다만 오랫동안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하거나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혼자 견딜 일이 아닙니다. 의사나 상담자를 찾으십시오.

"고인이 믿음 없이 세상을 떠났다면, 소망 없이 슬퍼해야 하는가?" 가장 아픈 질문입니다. 성경은 한 사람의 마지막 마음을 우리에게 다 알려 주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주께서 이런 식으로 행하여 의로운 자들을 사악한 자들과 함께 죽이시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의로운 자들을 사악한 자들처럼 여기시는 것도 결코 있을 수 없나이다. 온 땅의 심판자께서 의롭게 행하여야 하지 아니하리이까? 하매"라고 물었습니다 (창 18:25). 우리가 누구의 운명도 확언할 수 없다는 것은 정직한 고백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삶에 있던 좋은 것을 감사하며 슬퍼할 수 있고, 우리보다 그를 더 사랑하시며 공의롭고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 그를 맡길 수 있습니다.

더 생각해 보기

슬픔 가운데 있다면 몇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울어도 되고, 하나님께 있는 그대로 말씀드려도 됩니다. 기도할 말이 없으면 시편 13편이나 42편을 읽으십시오. 먹고 자는 작은 일을 돌보고, 큰 결정은 서두르지 마십시오. 도움을 청하고, 누군가 가져다주는 밥 한 끼를 받아들이십시오.

같은 상실을 겪은 사람들의 모임이나 상담이 큰 힘이 되기도 합니다. 슬픔이 너무 무겁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한국에서는 109(자살예방상담전화, 24시간)나 1588-9191(생명의전화)로, 다른 나라에서는 그 지역의 위기상담전화나 응급 번호로 지금 전화하십시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슬퍼하는 사람 곁에 있다면, 설명하려 하지 말고 함께 있어 주십시오. 욥의 친구들은 칠 일 동안 아무 말 없이 그와 함께 앉아 있었을 때 가장 좋은 친구였습니다 (욥 2:13). 매튜 헨리의 말처럼 "그를 위로하러 와서, 그들은 그와 함께 앉았습니다" 매튜 헨리. 기일을 기억하고, 고인의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내 슬픔을 하나님께 정직하게 가져간 적이 있습니까? 내 곁에서 함께 울어 줄 사람은 누구입니까? 나는 누구의 슬픔 곁에 앉아 줄 수 있을까요?

더 읽으려면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와 소망이란 무엇인가?를 보십시오. 요한복음 11장을 천천히 읽어 보십시오. 성경은 하나님이 마침내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리라.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으며 또 아픔도 다시는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이 지나갔기 때문이라, 하더라."는 날을 약속합니다 (계 21:4).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