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중간 상태
죽음은 죄와 함께 세상에 들어온 원수이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쏘는 것을 없애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은 곧 주와 함께 있게 되고,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소망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몸이 다시 사는 부활입니다.
이미 패배한 원수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지만, 성경은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마무리로 미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살도록 지으셨고, 죽음은 죄와 함께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타락).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얻는 영원한 생명이니라."라고 말하고 (롬 6:23), 죽음을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에 없애실 원수라고 부릅니다. "멸망 받을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전 15:26).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죽음 앞에서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요 11:35).
그러나 이 원수는 이미 패배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같은 혈육을 입으신 것은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없이 하시고 "또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 내려 하심이라."이었습니다 (히 2:15). 부활을 길게 설명한 장의 끝에서 바울은 죽음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힘은 율법이니라.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전 15:55-57
죽음을 무섭게 만드는 독침은 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지고 죽으셨으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죽음은 여전히 찾아오지만 더 이상 정죄로 들어가는 문이 아닙니다. 이 승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어떻게 근거하는지는 부활 과에서 보았습니다.
죽음과 부활 사이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죽으면 곧바로 어떻게 될까요? 성경은 죽음과 마지막 부활 사이의 때, 흔히 ‘중간 상태’라고 부르는 때에 대해 많이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하매" 하고 청한 강도에게 (눅 23:42) 예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43
바울은 감옥에서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를 생각하며 이렇게 썼습니다.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요 죽는 것이 이득이니라. 그러나 내가 육체 안에 산다면 이것이 내 수고의 열매이니라. 그럼에도 내가 무엇을 택할지 알지 못하노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바라며 내가 둘 사이에 끼어 있느니라. 그것이 훨씬 더 좋으나
빌 1:21-23
다른 편지에서도 그는 "내가 말하노니 우리가 확신에 차서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을 원한다고 말합니다 (고후 5:8). 요한계시록에서는 순교자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흰 두루마기를 받으며 "그분께서 그들에게 각각 흰 예복을 주시며 또 그들의 동료 종들과 형제들도 그들처럼 죽임을 당해 그 수가 찰 때까지 그들이 아직 조금 더 안식해야 한다고 그들에게 말씀하시더라."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계 6:11).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도 죽은 뒤에 위로와 고통이 있음을 전제합니다 (눅 16:22-26). 다만 이 이야기의 목적은 저세상의 지도를 그려 주는 데 있지 않고 살아 있을 때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들으라고 부르는 데 있으므로 (눅 16:31), 세부까지 지나치게 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 상태는 마지막이 아니어서 ‘중간’ 상태라고 부릅니다. 제단 아래의 영혼들도 위로를 받으면서 아직 기다립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영혼이 몸을 벗고 하늘에 머무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몸이 다시 사는 데서 완성됩니다. 바울은 먼저 죽은 이들 때문에 슬퍼하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아, 잠자는 자들에 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것은 너희가 아무 소망 없는 다른 사람들 같이 슬퍼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일어나셨음을 믿을진대 그와 같이 예수님 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데려오시리라.
살전 4:13-14
교회는 이 두 단계의 소망을 함께 고백해 왔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7문은 이 생이 끝나면 내 영혼이 곧바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올려지고, 내 몸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 영혼과 다시 결합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아진다는 것을 위로로 고백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7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2장도 몸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죽지도 잠들지도 않고 곧바로 하나님께 돌아가며, 의인의 영혼은 거룩함에서 온전하게 되어 하나님의 얼굴을 뵈면서 몸의 완전한 구속을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2장. 암브로시우스는 강도에게 주신 약속을 두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은 생명이며,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그분의 나라가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암브로시우스. 매튜 헨리도 "이 세상에서 우리는 죄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에는 죄와 시험, 슬픔과 죽음을 영원히 면할 것입니다"라고 씁니다 매튜 헨리.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다르게 말하는 것
첫째는 죽은 뒤의 의식에 관한 질문입니다.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 그리고 대부분의 개신교회는 위의 본문들을 따라 죽은 이들이 의식을 가진 채 부활을 기다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은 주와 함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와 달리 16세기의 일부 재세례파, 재림교회와 몇몇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부활 때까지 의식 없이 잠드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들은 사람이 영혼과 몸으로 나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온전한 생명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신약이 죽음을 , 곧 ‘잠들다’라는 말로 자주 부르는 것을 근거로 듭니다 (요 11:11). 죽은 자는 "살아 있는 자들은 자기가 죽을 것을 알거니와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다시는 보상도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들을 기억하는 일이 잊혔기 때문이로다."라는 전도서의 말씀도 듭니다 (전 9:5). 재림교회는 누가복음 23:43의 ‘오늘’을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날로 읽기도 합니다. 다수 견해는 ‘잠’이 남은 사람들의 눈에 비친 몸의 죽음을 부드럽게 부르는 말이며, 바울이 의식 없는 상태를 두고 "더욱 좋으나"라고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답합니다 (빌 1:23). 이에 대해 잠의 견해를 따르는 이들은, 죽는 사람에게는 눈을 감은 다음 순간이 곧 그리스도와 함께 맞는 부활의 아침이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두 견해는 죽음이 끝이 아니며 마지막 소망이 몸의 부활이라는 데 뜻을 같이합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묘지를 ‘잠자는 곳’(코이메테리온)이라 부른 것도 깨어날 날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연옥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죽었으나 아직 온전히 정결하게 되지 못한 이들이, 구원은 이미 확실하지만 하늘의 기쁨에 들어가기 위해 죽은 뒤 마지막 정화를 거친다고 가르치고 이를 ‘연옥’이라 부릅니다. 연옥은 지옥도 아니고 두 번째 기회도 아니며, 구원받을 이들이 온전히 거룩해지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트리엔트 공의회(1563)는 연옥이 있으며 그곳의 영혼들이 신자들의 기도와 미사로 도움을 받는다고 가르치면서, 호기심을 부추기는 어렵고 미묘한 질문은 설교에서 피하라고 당부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 연옥에 관한 교령. 가톨릭 교회는 "어떤 사람의 일이 불타면 그는 보상의 손실을 당하리라. 그러나 그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에 의해 받는 것 같이 받으리라."는 말씀 (고전 3:15)과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한 마카베오기하 12장 등을 근거로 듭니다. 정교회도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 기도가 그들에게 유익하다고 믿지만, 서방처럼 연옥을 교리로 정의하지는 않습니다.
개신교회는 연옥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히브리서가 그리스도께서 "그분께서는 거룩히 구별된 자들을 단 한 번 헌물을 드림으로 영원토록 완전하게 하셨느니라."고 말하므로 (히 10:14), 죽은 뒤에 고난으로 씻어야 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말하듯, 신자의 영혼은 죽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함에서 온전하게 된다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르지만, 어느 전통이든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뵙지 못하며 그 거룩함이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이루어진다는 데는 뜻을 같이합니다 (히 12:14).
슬픔 속의 소망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에게 교리는 차갑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무덤 앞에서 주어졌습니다. 오라비를 잃은 마르다에게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시니
요 11:25-26
그리고 그분은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시며 함께 우셨습니다. 매튜 헨리의 말처럼 "친구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은 정당합니다" 매튜 헨리. 그리스도인은 슬퍼하되 소망 없이 슬퍼하지 않습니다. 떠난 이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의 일을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를 의롭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사망도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창조물이라도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지 못하리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롬 8:39).
슬픔을 지나는 길은 슬픔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가?에서, 먼저 간 이들을 다시 알아볼 수 있는지는 천국에서 서로 알아볼 수 있는가?에서, 죽음 뒤의 일 전체는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에서 더 다룹니다. 다음 과에서는 이 모든 기다림이 향하는 날, 그리스도의 재림을 봅니다.
연습
- 연습 1 / 8
고린도전서 15:26은 죽음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 연습 2 / 8
‘중간 상태’는 무엇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 연습 3 / 8
빌립보서 1:23에서 바울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어떻게 말합니까?
- 연습 4 / 8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7문은 몸의 부활이 주는 위로를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 연습 5 / 8
죽음을 부활 때까지 의식 없이 잠드는 것으로 이해하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 연습 6 / 8
다음 중 전통과 그 가르침의 연결이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 연습 7 / 8
개신교회가 연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흔히 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 연습 8 / 8
데살로니가전서 4:13에 따르면 바울이 먼저 죽은 이들에 대해 가르친 목적은 무엇입니까?
출처
-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563 — 독일 개혁교회의 요리문답(129문). 제1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유일한 위로는 무엇인가. 죄와 구원과 감사의 세 부분으로 신경, 성례, 십계명, 주기도문을 가르친다. 읽기
- 웨스트민스터 총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46 — 장로교회의 신앙고백. 성경, 하나님과 작정, 언약, 구원, 교회와 성례, 종말을 33장에 걸쳐 고백한다. 읽기
- 가톨릭교회, 가톨릭 교회 교리서 1992 —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전체를 정리한 교리서.
- 트리엔트 공의회, 연옥에 관한 교령 1563 — 연옥과 죽은 이를 위한 기도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성경과 교회의 신경, 교부와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공교회의 신경(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칼케돈 신앙정의)을 기준으로 삼았고,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