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죽으신 뒤 사흘 동안 어디 계셨는가?
성경은 이 질문에 길게 답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 참으로 죽으셨다는 것, 십자가 위의 강도에게 "오늘 낙원에" 있으리라 약속하셨다는 것, 그리고 죽음의 세력이 그분을 붙잡아 두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도신경 표준 본문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고백은 승리의 선포, 죽은 자의 거처에 이르심, 십자가의 고통이라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어 왔고, 교회는 이 점에서 다양한 해석을 허용해 왔습니다.
성경의 답
먼저 분명한 것부터 말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큰 소리로 이렇게 부르짖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시고는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숨을 거두시니라.
눅 23:46
그러므로 죽음과 부활 사이에 그분의 몸은 무덤에 있었고, 그분의 영혼은 아버지께 맡겨졌습니다. 같은 날 예수께서는 곁에서 회개한 강도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43
낙원(παράδεισος)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복을 누리는 자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죽음 직후에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그리고 믿는 사람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런데 신약에는 다른 구절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시편 16편을 풀어, 다윗이 이미 그리스도에 대해 말했다고 설명합니다.
또 이것을 미리 보았으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의 혼이 지옥에 남겨지지 아니하였고 그의 육체도 썩음을 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였느니라.
행 2:31
여기서 '음부'는 죽은 자의 거처를 가리키는 하데스(ᾍδης)이고, 구약의 스올(שְׁאוֹל)에 해당합니다. 그분이 그곳에 '버림이 되지 않았다'는 말은 죽음의 영역에 들어가셨으되 거기 남아 있지 않으셨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바울도 올라가심을 말하며 내려가심을 함께 말합니다.
(이제 그분께서 올라가셨은즉 그것은 곧 그분께서 또한 먼저 땅의 더 낮은 부분들로 내려가신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엡 4:9
그러나 이 '땅 아랫 곳'이 죽은 자의 영역인지, 아니면 성육신으로 땅에 내려오신 것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가장 많이 논의되는 본문은 베드로전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하여 한 번 고난을 받으사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육체 안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되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나셔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려가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사 선포하셨는데
벧전 3:18-19
그리고 조금 뒤에는 "이런 까닭에 죽어 있는 자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되었나니 이것은 그들이 육신으로는 사람들을 따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이 이어집니다 (벧전 4:6).
사흘이라는 날수도 성경에서 중요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요나에 견주셨습니다.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고래 배 속에 있었던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에 있으리라.
마 12:40
호세아는 "이틀 뒤에 그분께서 우리를 되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분의 눈앞에서 살리로다."라고 말했습니다 (호 6:2). 신약은 부활이 "묻히셨다가 성경 기록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시고" 일어났다고 말하는데 (고전 15:4), 많은 그리스도인은 호세아와 요나가 그 배경에 있다고 봅니다.
교회의 증언
사도신경의 표준 라틴어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장사되신 뒤 음부(저승)에 내려가셨다고 고백합니다. 이 구절은 가장 오래된 로마 신경에는 없었고 4세기 무렵부터 서방 교회의 신경에 나타나며, 니케아 신경에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사도신경. 한국 개신교회에서 널리 쓰는 사도신경 번역에는 이 구절이 흔히 빠져 있고, 천주교의 사도신경에는 그리스도께서 저승에 가셨다는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같은 구절이 시대와 교파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어 왔습니다.
첫째 읽기는 승리의 선포입니다. 동방 교회의 부활 성화는 예수께서 부서진 음부의 문 위에 서서 아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는 모습을 그립니다. 베드로전서 3:19와 골로새서 2:15의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가 이 이해의 바탕이 됩니다.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먼저 죽은 의인들을 풀어 주러 가셨다고 가르치고, 루터교의 일치신조(9조)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온전한 그리스도께서 장사되신 뒤 지옥에 내려가 마귀를 이기고 지옥의 권세를 깨뜨리셨다고 고백합니다. 교부들 가운데도 이 생각이 보입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세례 요한이 옥에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하고 물은 것을, "몸소 세상에 오신 분이 몸소 저 아래 세상에도 내려가실 것인지를 알고자 한 것"으로 풀이합니다 그레고리우스. 같은 곳에서 크리소스토무스는 이 풀이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둘째 읽기는 죽은 자의 거처에 이르셨다는 뜻입니다. 이 경우 '음부'는 죽은 사람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낱말이어서,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죽음에서 겪는 모든 것을 겪으셨다는 고백이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50문)도 이 구절을, 그리스도께서 셋째 날까지 죽은 자의 상태에 머물며 죽음의 권세 아래 계셨다는 뜻으로 풉니다.
셋째 읽기는 칼뱅의 것입니다. 칼뱅은 이 구절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겪으신 영적 고통, 곧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받으신 괴로움을 가리킨다고 보았습니다 칼뱅, 기독교 강요 2권 16장.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도 이 구절을 이렇게 풀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지옥 같은 고난을 겪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극심한 고통과 시험 중에도 위로를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4문.
베드로전서 3:19에 대해서도 읽기가 나뉩니다. 매튜 헨리는 "옛 세상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영을 보내셨고 노아로 경고하셨습니다"라고 풀이하여, 그리스도께서 노아를 통해 당시 사람들에게 선포하셨고 그들이 지금 '옥'에 있다고 봅니다 매튜 헨리.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널리 지지받은 견해입니다. 다른 이들은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의 영역에서 선포하셨다고 보고, 또 어떤 이들은 이 '영들'이 창세기 6장과 연결된 타락한 영적 존재들이라고 보아 그들에게 승리를 선언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일치되지 않은 문제이고, 교회는 어느 한 가지를 신조로 못 박지 않았습니다.
사흘의 계산에 대해서 교부들은 성경의 말하는 방식을 짚었습니다. 히에로니무스는 "그분이 지옥에 꼬박 사흘 낮과 밤을 머무셨다는 것이 아니라, 예비일의 일부와 주일의 일부와 안식일 전체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라고 합니다 히에로니무스. 아우구스티누스도 "그 사흘이 온전하고 완전한 사흘이 아니었음은 성경이 증거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실제로 에스더는 "밤낮 삼 일을" 금식하자고 한 뒤 "제삼일에" 왕 앞에 섭니다 (에 4:16, 에 5:1). 일부를 하루로 세는 셈법은 성경에서 흔했습니다. 금요일 오후에 죽으셔서 일요일 새벽에 살아나신 예수께서 '사흘째'에 일어나셨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방식으로 자연스럽습니다.
원어로 보기
하데스(ᾍδης)는 신약에서 '음부' 또는 '지옥'으로 옮겨지지만, 불로 벌을 받는 최종 심판의 자리(게헨나)와는 구별되는 말입니다. 구약의 스올처럼 죽은 자들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와 고통 중에 있는 부자가 이 영역 안에서 서로 바라보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눅 16:22).
베드로전서의 두 구절에서는 서로 다른 동사가 쓰였습니다. 3:19의 '전파하시니라'는 케뤼소(κηρύσσω)로, 전령이 소식이나 포고를 큰 소리로 알린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도 쓰이지만 승리의 선언도 가리킬 수 있어서, 이 낱말만으로는 구원의 초대인지 승리의 선포인지 가릴 수 없습니다. 4:6의 '복음이 전파되었으니'는 유앙겔리조마이(εὐαγγελίζομαι)로,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뜻입니다.
흔한 반론과 답
"이 고백은 성경에 분명하지 않고 후대에 덧붙은 것이니 빼야 하지 않는가?" 이 비판은 타당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초기 신경에는 없었고, 근거 본문도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이 줄을 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담으려는 세 가지는 성경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참으로 죽으셨고, 죽음의 영역에서도 주이시며,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심판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어느 쪽에 무게를 두든 교회는 그것을 이단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에게 복음을 전하셨다면, 죽은 뒤에도 구원받을 기회가 있다는 말인가?" 이 질문은 베드로전서 4:6에서 실제로 나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넓은 자비를 들어 그 가능성에 열려 있고, 어떤 이들은 히브리서가 말하듯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이것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라는 말씀과 충돌한다고 봅니다 (히 9:27). 그러나 두 번째 기회를 교리로 가르친 신경이나 공의회는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4:6의 '죽은 자들'을 복음을 듣고 살다가 지금은 죽은 신자들로 읽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하나님이 공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시다는 것뿐입니다. 이 질문은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에서 이어 다룹니다.
"오늘 낙원에 계셨다면서 어떻게 음부에도 계셨는가? 요한복음 20:17에서는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한 가지 설명은 낙원과 하데스가 따로 떨어진 두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의인과 악인은 같은 죽은 자의 영역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쪽은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그렇다면 낙원은 죽은 자의 영역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복된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20:17의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는 몸을 입은 채 하늘로 오르시는 승천을 가리킨다는 읽기도 있습니다. 재림교회처럼 죽은 자가 부활 때까지 의식 없이 쉰다고 보는 그리스도인들은, 옛 사본에 문장 부호가 없다는 점을 들어 '오늘'을 '네게 이르노니'에 붙여 읽습니다. 어느 쪽이든 낙원의 약속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이라는 점은 같습니다.
더 생각해 보기
이 질문에는 끝내 알 수 없는 부분이 남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이 더 큽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의 가장 아래까지 가셨고, 그곳에서도 죽음의 주이십니다. 부활하신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살아 있는 자라. 전에 죽었으나, 보라, 내가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노라. 아멘. 또한 내가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노라.
계 1:18
그래서 시편 기자의 말은 새로운 위로가 됩니다. "내가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시오며 내가 지옥에 내 침상을 펼지라도, 보소서, 주께서 거기 계시나이다." (시 139:8). 매튜 헨리는 십자가 위의 강도를 두고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는 보좌 위의 그리스도처럼 은혜로우십니다"라고 씁니다 매튜 헨리.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가운데 나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도신경의 이 구절을 승리, 죽음의 경험, 십자가의 고난 가운데 어느 쪽으로 읽을 때 내 마음이 가장 위로를 받습니까?
더 읽으려면 예수는 정말 부활했는가?와 예수는 왜 죽어야 했는가?,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를 보십시오.
관련 질문
- 예수는 정말 부활했는가?교회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된 뒤 사흘째에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다고 고백해 왔습니다. 이것은 수학처럼 증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증거를 저울질하는 문제입니다. 빈 무덤, 여러 사람이 만난 부활하신 주님, 두려워 숨었던 제자들의 변화는 부활이 가장 자연스럽게 설명한다고 그리스도인들은 믿습니다.
- 예수는 왜 죽어야 했는가?교회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고 고백해 왔습니다. 그 죽음은 하나님이 죄를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표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죄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 주는 표입니다. 십자가가 어떻게 구원하는지에 대해서는 몸값, 승리, 희생 제사, 대신 받으신 형벌, 사랑의 계시 같은 여러 그림이 있지만, 그것이 우리를 위한 일이며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왔다는 데에는 모두 한 목소리입니다.
-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이 주와 함께 있고, 마지막 날에 몸이 다시 살아나며, 그 뒤에 심판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 소망의 근거는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죽음과 부활 사이의 상태를 어떻게 설명할지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서로 다르지만,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점은 한결같이 고백해 왔습니다.
-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성경은 하나님이 의로운 재판장이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말하고, 동시에 구원은 그리스도께만 있다고 말합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서로 다른 견해가 있고, 성경이 이 질문에 얼마나 직접 답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이 갈립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불의하지 않으시다는 것과, 우리가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받았다는 것입니다.
관련 주제
출처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