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이 주와 함께 있고, 마지막 날에 몸이 다시 살아나며, 그 뒤에 심판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 소망의 근거는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죽음과 부활 사이의 상태를 어떻게 설명할지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서로 다르지만,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점은 한결같이 고백해 왔습니다.
성경의 답
죽음에 대한 성경의 말씀은 두 가지 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죽는 순간 이후 곧바로 어떻게 되는가입니다. 다른 하나는 마지막 날에 어떻게 되는가입니다. 먼저 첫째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가 예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고 청했을 때,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43
바울도 같은 생각을 말합니다. 그는 감옥에서 살고 죽는 것 사이에서 갈등한다고 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바라며 내가 둘 사이에 끼어 있느니라. 그것이 훨씬 더 좋으나
빌 1:23
고린도후서에서도 그는 "내가 말하노니 우리가 확신에 차서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을 원한다고 합니다 (고후 5:8).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사람의 소망은 주와 함께 있는 것이라는 데에 신약은 한목소리를 냅니다.
그러나 성경의 소망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영혼만 구출되는 것이 최종 목표가 아닙니다. 마지막 소망은 몸의 부활입니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시니
요 11:25-26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몸을 씨앗에 비유합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라. 그것은 썩는 것 가운데 뿌려지고 썩지 않는 것 가운데 일으켜지며 수치 가운데 뿌려지고 영광 가운데 일으켜지며 연약함 가운데 뿌려지고 권능 가운데 일으켜지며 본성에 속한 몸으로 뿌려지고 영에 속한 몸으로 일으켜지나니 본성에 속한 몸이 있고 영에 속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 15:42-44
이 부활의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먼저 살아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이십니다 (고전 15:20).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죽은 이들을 두고 슬퍼할 때 바울은 위로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일어나셨음을 믿을진대 그와 같이 예수님 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데려오시리라.
살전 4:14
그러면서 그는 이 슬픔이 "그러나 형제들아, 잠자는 자들에 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것은 너희가 아무 소망 없는 다른 사람들 같이 슬퍼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되지 않게 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살전 4:13). 그리스도인도 슬퍼합니다. 다만 그 슬픔 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심판이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이것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라고 합니다 (히 9:27). 예수께서도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분의 음성을 듣고 나올 때가 오는데,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선을 행한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악을 행한 자들은 정죄의 부활로 나오리라." 나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요 5:28-29). 이 심판 이후의 모습은 천국과 지옥은 실재하는가?에서 다룹니다.
교회의 증언
교회는 이것을 신조로 고백했습니다. 사도신경은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로 끝납니다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도 죽은 자의 부활과 오는 세상의 생명을 기다린다는 고백으로 마무리합니다 니케아 신경. 플라톤 계열의 그리스 철학은 영혼이 몸에서 풀려나는 것을 해방으로 여겼지만, 교회는 몸의 부활을 고집했습니다. 몸을 포함한 사람 전체가 구원받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도 이렇게 시작합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유일한 위로는, 몸도 영혼도 나의 것이 아니라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문.
매튜 헨리는 빌립보서 1:23에서 죽음의 의미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참된 신자에게는 그것이 유익입니다. 그것이 그의 모든 연약함과 비참의 끝이기 때문입니다" 매튜 헨리. 그는 바울의 갈등이 "두 가지 악한 것 사이가 아니라 두 가지 선한 것, 곧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과 그분과 함께 있는 것 사이"라고 짚습니다 매튜 헨리. 또 고린도후서 5장을 풀며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은 육신의 옷과 인생의 모든 위로를 벗겨 버릴 것이며, 또한 이 땅에서의 우리의 모든 고난을 끝낼 것입니다" 매튜 헨리. 낙원의 강도에 대해서는 회개를 임종까지 미루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합니다. "참된 회개는 결코 늦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나, 늦은 회개가 참된 경우는 드물다는 것도 그만큼 확실합니다" 매튜 헨리.
그러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상태를 어떻게 설명할지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로 말하지 않습니다. 주요한 견해는 이렇습니다.
첫째, 가톨릭과 정교회, 그리고 대부분의 개신교회는 사람이 죽은 뒤 부활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의식을 가진 채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개신교회는 대체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이 곧바로 주와 함께 있다고 말하며, 빌립보서 1:23과 고린도후서 5:8을 가장 직접적인 근거로 듭니다.
둘째, 이 큰 틀 안에서 가톨릭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죽었으나 아직 온전히 정결하지 못한 사람이 연옥에서 정화를 거친다고 가르칩니다. 가톨릭은 정화를 받는 이들이 이미 구원이 확정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정교회는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지만 서방의 연옥 교리는 받아들이지 않으며, 개신교회는 대체로 성경이 이것을 분명히 말하지 않는다고 보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셋째,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를 비롯한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죽음과 부활 사이를 ‘잠’으로 이해해 그동안 의식이 없다고 봅니다. 성경이 죽은 이들을 자주 "자는 자"라고 부르는 점이 근거입니다 (살전 4:13). 이 견해에서는 죽는 순간과 부활이 경험으로는 이어집니다.
이 견해들은 서로 다르지만 확신하는 것은 같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분의 손 안에 있고, 마지막에는 몸의 부활과 새 창조가 있다는 것입니다. 중간 상태의 시간표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가 바라는 만큼 알려 주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열린 채로 둘 수 있습니다.
원어로 보기
신약은 죽은 신자를 코이마오(κοιμάω), 곧 ‘잠든’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살전 4:13). 이 말이 영혼이 의식 없이 잠든다는 뜻인지, 몸의 죽음을 부드럽게 부르는 표현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어느 쪽이든 이 이미지에는 깨어남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잠은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1:23에서 바울은 "떠나서"로 옮겨진 아날뤼오(ἀναλύω)를 씁니다. 본래 "풀다"라는 뜻의 이 말은 배가 매인 줄을 풀고 떠나거나 군대가 천막을 걷고 길을 떠나는 데에도 쓰였다고 주석가들은 설명합니다. 죽음을 소멸이 아니라 출발로 그립니다. 도착지는 "그리스도와 함께"입니다.
또 하나는 파라데이소스(παράδεισος), "낙원"입니다. 본래 페르시아어에서 온 말로 정원이나 동산을 뜻하며, 구약 헬라어 번역에서는 에덴동산을 가리켰습니다. 예수께서 강도에게 하신 약속은 이 그림을 불러옵니다. 막연한 어딘가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하나님의 동산입니다. 계시록의 마지막 장면이 다시 동산과 생명나무의 그림으로 돌아가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흔한 반론과 답
"죽으면 끝이다. 의식은 뇌의 활동이므로 뇌가 멈추면 나도 사라진다." 이것은 가장 강력한 반론입니다. 뇌의 상태가 의식에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잘 확립된 사실입니다. 뇌를 다치면 성격과 기억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이 사실은 기독교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성경도 사람을 몸에 깃든 영혼이 아니라 몸을 가진 하나의 인격으로 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혼이 불멸한다는 이론만이 아니라 몸의 부활을 소망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의식이 뇌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뇌가 곧 의식의 전부라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과학이 아니라 철학적 해석의 문제이며, 진지한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계속됩니다. 기독교가 죽음 뒤의 삶을 말하는 근거는 철학적 추론이 아니라 한 사건, 곧 예수의 부활입니다. 만일 죽음이 한 번이라도 되돌려졌다면 ‘죽으면 끝’이라는 말은 증명된 것이 아니라 가정이 됩니다. 이 근거에 대해서는 예수는 정말 부활했는가?를 보십시오.
"죽음 뒤의 삶에 대한 소망은 죽음의 두려움에서 나온 위안일 뿐이다." 이 반론도 가볍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위로를 바란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소망이 위로가 된다고 해서 그것이 거짓이라는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이 소망을 쉽게 약속하지 않습니다. 요한도 우리가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다 나타나지 않았다고 인정합니다 (요일 3:2). 또 심판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이 가르침은 위로만이 아니라 책임도 함께 지웁니다. 소원만으로 지어낸 이야기라면 심판은 빼는 편이 더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 해도, 사후 상태에 대한 성경의 설명이 서로 다르지 않은가?" 그렇게 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성경은 중간 상태를 자세히 설명하는 책이 아니고, 그리스도인들의 견해가 갈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흩어진 그림들이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 몸의 부활, 심판, 그리고 새 창조입니다. 세부에 대한 불확실성이 핵심의 불확실성은 아닙니다.
더 생각해 보기
죽음은 모든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인데도 우리는 그 이야기를 피하곤 합니다. 성경은 이 주제를 피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를 두려움에 가두지 않으려 합니다. 바울이 부활에 대해 마지막에 하는 말은 설명이 아니라 감사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전 15:57).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죽음을 생각할 때 어떤 감정이 먼저 올라옵니까? 만일 죽음이 끝이 아니라면 오늘의 선택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 속에서, 소망 있는 슬픔과 소망 없는 슬픔의 차이를 어떻게 느끼고 있습니까?
더 읽으려면 천국과 지옥은 실재하는가?, 예수는 정말 부활했는가?, 소망이란 무엇인가?를 보십시오. 고린도전서 15장과 데살로니가전서 4장을 천천히 읽는 것도 좋습니다.
관련 질문
- 천국과 지옥은 실재하는가?성경은 하나님과 함께 누릴 새 하늘과 새 땅의 기쁨,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자리의 무서운 실재를 모두 말합니다. 천국은 구름 위의 휴양지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이며, 지옥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자 생명이신 하나님을 잃는 것입니다. 지옥의 본성에 대해서는 영원한 형벌, 소멸설 등 서로 다른 견해가 있어, 이 글은 그것을 공정하게 소개합니다.
- 예수는 정말 부활했는가?교회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된 뒤 사흘째에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다고 고백해 왔습니다. 이것은 수학처럼 증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증거를 저울질하는 문제입니다. 빈 무덤, 여러 사람이 만난 부활하신 주님, 두려워 숨었던 제자들의 변화는 부활이 가장 자연스럽게 설명한다고 그리스도인들은 믿습니다.
- 소망이란 무엇인가?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잘되겠지’ 하는 바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 확신 있는 기대입니다. 소망은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인내로 기다리게 하고, 무너진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잡게 합니다. 그 끝에는 눈물이 씻기고 만물이 새로워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습니다.
- 인간이란 무엇인가?성경은 사람을 흙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같은 존엄을 가지지만, 그 형상은 죄로 훼손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집니다. 사람이 동물이나 물질일 뿐이라는 반론에 대해 교회는 사람의 몸과 흙의 뿌리를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답합니다.
관련 주제
출처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