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다시 오시는가?
교회는 처음부터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고백해 왔습니다. 성경은 그분이 승천하신 모습 그대로 몸으로, 눈에 보이게, 영광 가운데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르며, 이 약속은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과 깨어 있음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성경의 답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구름에 가려 올라가신 뒤, 하늘만 쳐다보고 서 있는 제자들에게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말합니다.
또 그들이 이르되, 너희 갈릴리 사람들아, 너희가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바라보느냐? 너희를 떠나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이 동일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분께서 하늘로 들어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니라.
행 1:11
"본 그대로"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올라가신 분은 같은 예수이시고, 오시는 방식도 보이는 방식입니다. 이 약속은 승천 때 처음 나온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전날 밤, 떠나시겠다는 말에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먼저 하신 약속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말해 주었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받아들여 내가 있는 곳에, 거기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2-3
예수께서는 자신의 재림을 여러 번 가르치셨습니다. 감람산에서는 "그때에 사람의 아들의 표적이 하늘에 나타나고 그때에 땅의 모든 지파가 애곡하며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가지고 하늘의 구름들 가운데서 오는 것을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마 24:30). 오시는 일은 숨겨진 사건이 아니라 모두가 보는 사건입니다. 또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 중에 모든 거룩한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의 영광의 왕좌에 앉아서" 하시며 (마 25:31), 모든 민족이 그분 앞에 서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심판에 대해서는 최후의 심판이란 무엇인가?를 보십시오.
사도들도 같은 소망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렇게 씁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6-17
이어서 바울은 "그러므로 이 말씀들로 서로 위로하라."고 덧붙입니다 (살전 4:18). 재림은 먼저 위로의 소식입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단 한 번 드려지셨으며 또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죄와 상관없이 두 번째 나타나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리라."고 합니다 (히 9:28). 두 번째 오시는 분은 죄를 담당하러 처음 오신 바로 그분입니다. 성경의 마지막 장도 이 약속으로 끝납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시는 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 하시는도다. 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 (계 22:20).
다만 때에 대해서는 이 약속에 분명한 한계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은 결코 아무도 알지 못하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알지 못하고 오직 내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 24:36). 그동안 재림의 날짜를 정한 사람들은 모두 틀렸습니다. 이 문제는 세상의 끝은 언제 오는가?에서 따로 다룹니다.
교회의 증언
교회는 이 약속을 신앙의 뼈대에 넣었습니다. 사도신경은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도 그분이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시며 그 나라는 끝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니케아 신경. 동방과 서방, 가톨릭과 정교회와 개신교가 함께 고백하는 몇 안 되는 내용 가운데 하나입니다. 초대 교회의 성찬 예식에도 이 기대가 담겨 있었습니다. 바울은 주의 만찬을 먹고 마실 때마다 "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기 때문이니라."이라고 합니다 (고전 11:26).
개혁교회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재림이 신자에게 어떤 위로가 되는지를 묻고, 이렇게 답합니다. 나를 대신해 하나님 앞에서 이미 심판을 받으신 분이 바로 재판장으로 오시므로, 신자는 그분의 오심을 머리를 들고 기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2문.
매튜 헨리는 사도행전 1:11을 풀며 재림에 대한 생각이 우리 삶에 무엇을 하는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서서 쳐다보며 하찮은 일에 빠져 있을 때에는 우리 주님의 재림에 대한 생각이 우리를 재촉하고 깨워야 하며, 우리가 서서 쳐다보고 떨 때에는 그 생각이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매튜 헨리. 게으른 사람에게는 깨우는 소리이고,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위로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모든 문제에서 의견이 같았던 것은 아닙니다. 재림 전후에 어떤 일이 있는지, 곧 환난과 천년왕국과 휴거의 순서에 대해서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서로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이 글은 그 순서를 다루지 않으며, 휴거와 천년왕국은 무엇인가?에서 각 견해를 공정하게 소개합니다. 모든 견해가 함께 붙드는 것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눈에 보이게,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원어로 보기
신약이 재림을 가리키는 말은 하나가 아닙니다. 가장 흔한 말은 파루시아(παρουσία)입니다. 문자적으로는 "곁에 있음", 곧 도착이나 현존을 뜻합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왕이나 황제가 도시를 공식 방문하는 일을 가리킬 때도 쓰였습니다. 신약이 이 말로 그리스도의 오심을 부를 때 (마 24:27) 오시는 분이 왕이시며 그분의 임재가 공적인 사건이라는 뜻이 함께 들려옵니다.
또 하나는 에피파네이아(ἐπιφάνεια), "나타나심"입니다. 바울은 디도서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로 "저 복된 소망과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느니라."라고 씁니다 (딛 2:13). 지금은 가려 있는 분이 가림 없이 드러나신다는 그림입니다. 비슷한 말인 아포칼륍시스(ἀποκάλυψις)는 "덮개를 벗김"이라는 뜻이며, 같은 사건을 가리킵니다 (벧전 1:7). 세 말은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면에서 비춥니다. 곧 도착하시고, 나타나시고, 드러나십니다.
흔한 반론과 답
"이천 년이 지났는데도 오시지 않았다. 예수의 말씀은 빗나갔다." 이 반론은 가볍지 않습니다. 신약에는 가까움을 말하는 구절이 많습니다. 예수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보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에 따라 주리라."라고 하셨고 (계 22:12),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성취되리라."고도 하셨습니다 (마 24:34). 일부 학자들은 예수와 초대 교회가 한 세대 안에 끝이 오리라고 잘못 기대했다고 봅니다. 이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몇 가지로 답해 왔습니다. 먼저 예수께서 직접 때를 모른다고 하셨고, 신랑이 더디 오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마 25:5). 지연을 내다보신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속히"는 달력의 시각이라기보다 일단 시작되면 지체 없이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또 언제든 오실 수 있으니 준비하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세대"에 대해서는 예루살렘 멸망까지의 세대라는 해석, 징조를 보는 세대라는 해석, "이 민족"이라는 해석이 있어 신실한 해석자들 사이에서도 갈립니다. 베드로는 이미 같은 조롱에 답했습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디지 아니하시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9). 매튜 헨리도 "사람들이 더디다고 여기는 것은 오래 참으심이며, 그것도 우리를 향한 것입니다"라고 풀이합니다 매튜 헨리. 물론 이것이 모든 어려움을 없애지는 않습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왜 이 시간을 허락하시는지 다 알지 못합니다.
"재림 신앙은 두려움으로 사람을 조종하거나 현실을 외면하게 만든다."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재림을 협박의 도구로 썼고, 또 어떤 이들은 이 세상을 포기할 구실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이 가르침을 준 목적은 반대였습니다. 바울은 재림을 "서로 위로하라"고 가르쳤고, 예수는 주인이 올 때까지 맡은 일을 충실히 하는 종을 "그의 주인이 올 때에 그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마 24:46). 재림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새롭게 되리라는 것을 믿기에 지금의 일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협박과 조종은 성경이 이 가르침에 붙인 목적이 아닙니다. 가르침을 그렇게 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오용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미 성령으로 오셨다. 재림은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상징이다." 이런 견해는 근대에 넓게 퍼졌고, 재림을 교회의 성장이나 죽을 때의 만남이나 인류의 진보로 풀이합니다. 성령께서 오신 것은 사실이며 예수께서도 그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요 14:18). 그러나 천사들은 "본 그대로" 오신다고 말했고, 바울은 호령과 나팔과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합니다. 성령의 임재는 재림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주시는 보증입니다. 모든 눈물이 씻기는 일은 (계 21:4)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더 생각해 보기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누군가의 시간표를 맞히라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에 대한 소식입니다. 악이 마지막 말을 하지 않으며, 죽은 자가 일어나고, 눈물이 씻기며, 오시는 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바로 그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오시는 것은 그분의 사랑을 완성하러 오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생각은 나를 두렵게 합니까, 위로합니까, 아니면 별 생각이 없게 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분이 오실 때까지 내게 맡겨진 일은 무엇입니까? 재림이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삶에 어떻게 닿을 수 있을까요?
더 읽으려면 세상의 끝은 언제 오는가?, 휴거와 천년왕국은 무엇인가?, 소망이란 무엇인가?를 보십시오. 요한계시록 21-22장과 데살로니가전서 4-5장을 천천히 읽는 것도 좋은 시작입니다.
관련 질문
- 세상의 끝은 언제 오는가?성경의 답은 분명하게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날과 그 때를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고, 제자들이 때를 물었을 때에도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전쟁과 지진 같은 징조는 시간표가 아니라 깨어 있으라는 알림이며, 날짜를 계산한 사람은 지금까지 모두 틀렸습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두려워하며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고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 휴거와 천년왕국은 무엇인가?휴거는 재림 때 신자들이 공중으로 끌려 올라가 주를 맞이한다는 가르침(살전 4:17)이고, 천년왕국은 요한계시록 20장의 천 년 동안의 그리스도의 통치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지에 대해 전천년설, 무천년설, 후천년설이 있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다르게 읽어 왔습니다. 이 글은 어느 편도 고르지 않고 각 견해를 공정하게 소개하며, 모두가 함께 고백하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 최후의 심판이란 무엇인가?최후의 심판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모든 사람의 삶을 공의로 판단하시고 세상의 모든 일을 바로잡으시는 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날을 두려움만이 아니라 소망으로도 기다립니다. 심판자가 곧 자기를 위해 죽고 살아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 소망이란 무엇인가?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잘되겠지’ 하는 바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 확신 있는 기대입니다. 소망은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인내로 기다리게 하고, 무너진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잡게 합니다. 그 끝에는 눈물이 씻기고 만물이 새로워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습니다.
관련 주제
출처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