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왜 고쳐 주시지 않는가?
하나님은 병을 고치실 수 있고 지금도 고치시며, 우리는 낫기를 구하라는 권면을 받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병이 이 세상에서 낫는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가시와 디모데의 잦은 병이 보여 주듯 낫지 않는 고난 속에서도 은혜는 족하며, 몸의 완전한 고침은 부활 때에 이루어집니다. 낫지 않는 것은 누구의 믿음이 모자란 탓이 아닙니다.
성경의 답
이 질문은 대개 병실에서 나옵니다. 먼저 분명히 해 둘 것이 있습니다. 병이 낫지 않는 것을 그 사람의 믿음이 부족하거나 숨은 죄가 있다는 증거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병든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복음서는 이것이 그분 사역의 한가운데 있었다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들에서 가르치시고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서 온갖 종류의 질환과 온갖 종류의 질병을 고치시니
마 4:23
마태는 이것을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으로 읽습니다. 그분은 "이것은 대언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이르시되, 그가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도다, 하였느니라." 하신 말씀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마 8:17). 하나님은 우리의 몸의 아픔에 무관심한 분이 아닙니다. 고치심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표적이었습니다.
초대 교회도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야고보서는 이렇게 권합니다.
너희 가운데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부를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해 기도할지니라.
약 5:14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그가 죄들을 범하였을지라도 그것들을 용서받으리라.
약 5:15
이 구절은 병든 사람에게 기도를 요청하라고, 교회는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충분한 믿음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낫는다"는 보증으로 읽으면 곤란한 일이 생깁니다. 낫지 않은 사람은 믿음이 모자란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은 그렇게 읽을 수 없게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병을 고치기도 했지만 (행 28:8), 자신의 "육체의 가시"에 대해서는 이렇게 씁니다.
내가 이 일로 인하여 그것이 내게서 떠나가도록 주께 세 번 간청하였더니
고후 12:8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나의 강한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지느니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9
바울의 기도가 믿음이 없어서 거절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세 번 간구했고, 주께서는 가시를 거두지 않으시는 대신 은혜를 약속하셨습니다. 가시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는 그가 "육체의 약함"으로 인해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갈 4:13), 질병이었을 가능성을 많은 사람이 생각하지만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이름들도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더 이상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있는 병을 위하여 포도즙을 조금 쓰라."고 합니다 (딤전 5:23). 병이 자주 나는 제자에게 기적을 약속하지 않고 약을 권한 것입니다. 또 이렇게 씁니다.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으나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남겨 두었노라.
딤후 4:20
바울은 병든 동역자를 그냥 두고 떠났고, 그것을 숨기지도 않았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셨다고 하는데 (빌 2:27), 바울은 이를 은혜로 받습니다. 낫는 것도 은혜이고, 낫지 않는 가운데 받는 것도 은혜입니다.
성경은 낫지 않는 사람을 책망하지 않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두고 제자들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단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나 죄를 짓지 아니하였으며 다만 이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고자 함이니라.
요 9:3
그리고 성경은 몸의 완전한 고침이 어디서 오는지 말합니다. 지금은 아직 아닙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리라.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으며 또 아픔도 다시는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이 지나갔기 때문이라, 하더라.
계 21:4
바울은 우리가 "그들뿐 아니라 우리 자신 곧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한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삼으심 즉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은"고 합니다 (롬 8:23). 우리는 첫 열매를 받았지만 수확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고침은 오는 세상의 맛보기이고, 부활이 그 완성입니다.
교회의 증언
교회는 처음부터 병자를 위해 기도했고 동시에 의사를 존중했습니다. 가톨릭과 정교회는 야고보서 5장에 근거하여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고 기도하는 일을 성사로 행해 왔고, 개신교의 많은 교회도 장로들이 병자를 위해 기도합니다.
매튜 헨리는 야고보서 5장에서 병중에 구해야 할 가장 큰 것은 죄 사함이라고 말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데 기적이 그다지 없을 수 있어도 은혜는 그만큼 있을 수 있습니다"라고 덧붙입니다 매튜 헨리. 바울의 가시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기도를 받으시지만 구한 것을 언제나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진노 중에 허락하시고, 때로는 사랑으로 거절하십니다" 매튜 헨리. 거절이 사랑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모든 경우의 설명은 아닙니다.
라바누스는 마태복음 8:17의 "담당하시고"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담당하시고 라는 것은 그분이 그것을 스스로 가지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없애시려는 것이며" 라바누스.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먼 곳에서 보시는 분이 아니라 짊어지시는 분입니다.
신앙의 선배들은 몸의 소망을 부활에 두었습니다. 사도신경은 몸의 부활을 고백합니다 사도신경.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삶에서나 죽음에서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데서 위로를 찾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문.
오늘의 치유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 개혁주의 전통의 많은 이들이 취하는 은사중지론은 사도 시대의 기적적 은사가 복음을 세우는 표적이었고 지금은 같은 형태로 주어지지 않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주권적으로 병을 고치신다고 봅니다. 오순절·은사주의 교회를 비롯한 은사지속론은 치유의 은사가 오늘도 계속되므로 교회가 치유 사역을 이어 가며 더 담대히 기대하고 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신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표라면 그 나라가 임한 지금도 그 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입장도, 기름 부음을 성사로 행하는 교회들도 다음 점에서는 만납니다. 하나님은 고치실 수 있으시고, 우리는 구해야 하며, 약과 의술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낫지 않는 사람을 정죄해서는 안 되며, 완전한 고침은 부활 때에 온다는 것입니다.
원어로 보기
신약에서 "고치다"에 가장 흔히 쓰이는 말은 이아오마이(ἰάομαι)와 데라퓨오(θεραπεύω)입니다. 이아오마이는 병이 낫게 된다는 뜻이고, 데라퓨오는 본래 "섬기다, 돌보다"의 뜻입니다. 오늘의 "테라피"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고침은 단순히 병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돌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야고보서 5:15의 "구원하리니"는 소조(σῴζω)입니다. 이 말은 "구원하다"로도, 몸의 병에서 "낫게 하다"로도 쓰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몸의 고침을 말하는지 영혼의 구원을 말하는지, 아니면 둘을 함께 말하는지에 대해 해석이 갈립니다.
바울이 말하는 "육체의 가시"의 가시는 스콜롭스(σκόλοψ)입니다. 말뚝이나 가시처럼 몸에 박힌 날카로운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약함"으로 번역되는 아스데네이아(ἀσθένεια)는 힘이 없음을 뜻하는 동시에 병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바울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고 할 때 그 말에는 병든 몸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흔한 반론과 답
"하나님이 전능하고 선하다면 모두 고쳐 주어야 하지 않는가?" 이 반론은 강합니다. 병든 아이를 둔 부모에게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말은 때로 상처가 됩니다. 정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 문제를 완전히 풀어 주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곧바로 가지 않으셨고,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요 11:6). 마르다와 마리아는 "그때에 마르다가 예수님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으리이다." 하고 항의했습니다 (요 11:21). 그런데 주께서는 그 항의를 꾸짖지 않으시고 함께 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음을 원수로 대하십니다. 병과 죽음은 하나님이 지으신 본래의 세상에 있던 것이 아니라 타락한 세상의 일이며, 그리스도는 이것을 이기러 오셨고 마지막 날에 완전히 이기실 것입니다. 지금 왜 어떤 사람은 낫고 어떤 사람은 낫지 않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병실에서 가장 정직한 대답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낫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예수께서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셨다." 복음서에는 실제로 믿음과 고침이 함께 나오는 장면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법칙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도 고치셨고 (요 5:13), 바울은 세 번 구하고도 가시를 거두지 못했으며, 디모데와 드로비모도 곧바로 낫지는 않았습니다. 믿음은 고침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는 신뢰입니다. 낫지 않아도 신뢰를 놓지 않는 것도 믿음입니다. 매튜 헨리가 요한복음 9:3을 풀며 말하듯 "그리스도께서는 보통이 아닌 재난에 대하여, 그것이 언제나 죄에 대한 특별한 형벌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매튜 헨리. 병든 사람 곁에서 우리가 할 일은 원인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고 약을 쓰는 것이 믿음 없는 일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약을 권했고, 누가를 "사랑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인사하느니라."이라고 부릅니다 (골 4:14). 의술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통로로 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와 치료는 서로 부딪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도 기름을 바르는 일을 말합니다. 기도하면서 의사를 찾고, 의사를 찾으면서 기도하는 것이 성경의 균형입니다.
더 생각해 보기
낫지 않는 병 앞에서 성경이 주는 것은 설명이기보다 동행입니다. 바울이 들은 것은 가시를 없애겠다는 말이 아니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였습니다. 은혜는 병의 자리를 피해 가지 않고 그 자리로 옵니다. 그리고 바울은 "내가 생각하건대 이 현 시대의 고난들은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도다."라고 쓸 수 있었습니다 (롬 8:18). 병의 아픔을 가볍게 여겨서 한 말이 아니라, 끝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확신에서 나온 말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낫지 않는 사람을 향해 말하기 전에 그의 곁에 앉아 본 적이 있습니까? 낫기를 구하는 일과 하나님께 맡기는 일을 어떻게 함께 붙들 수 있을까요? 내가 병 가운데 있다면, 내 아픔을 숨기지 않고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까?
더 읽으려면 병은 죄의 벌인가?,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시는가?, 슬픔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가?를 보십시오.
관련 질문
- 병은 죄의 벌인가?성경은 병든 사람을 죄인으로 판단하는 일을 분명히 막습니다. 예수께서는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는 물음을 물리치셨고,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어떤 병이 죄와 이어진 경우가 있다고 성경이 말하는 곳도 있지만, 그것을 규칙으로 삼거나 다른 사람의 병에 대입하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병든 사람을 고치시고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시는가?성경은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고 말하지만, 응답이 언제나 우리가 구한 그대로라고 약속하지는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구하라고 가르치셨고, 겟세마네의 예수와 바울의 가시는 거절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말씀도 응답일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기도는 혼잣말이 아니라 살아 계신 아버지께 드리는 말이며, 그 응답을 시험관에서처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 예수는 왜 기적을 행하셨는가?복음서는 예수의 이적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다는 표이고, 고통받는 사람을 향한 긍휼의 행동이며, 예수가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표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채우거나 요구에 따라 자신을 증명해 보이려고 이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대자들조차 그분이 놀라운 일을 행한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고 그 출처를 문제 삼았습니다.
- 슬픔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가?슬픔은 믿음이 없다는 표시가 아니라 사랑의 다른 얼굴입니다. 예수께서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고, 성경은 소망 없는 사람처럼 슬퍼하지 말라고 할 뿐 슬퍼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슬픔에는 시간이 걸리며,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사람 가까이 계시고, 교회는 우는 사람과 함께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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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