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병은 죄의 벌인가?

짧은 답

성경은 병든 사람을 죄인으로 판단하는 일을 분명히 막습니다. 예수께서는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는 물음을 물리치셨고,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어떤 병이 죄와 이어진 경우가 있다고 성경이 말하는 곳도 있지만, 그것을 규칙으로 삼거나 다른 사람의 병에 대입하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병든 사람을 고치시고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의 답

병상에 누운 사람이 가장 자주 듣는 말, 혹은 스스로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 물음은 오래되었고, 성경 속의 사람들도 같은 물음을 했습니다. 지금 병중에 있거나 병든 가족을 돌보는 분이라면, 이 글이 먼저 분명히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성경은 병든 사람을 죄인으로 낙인찍는 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가장 분명한 본문은 요한복음 9장입니다. 제자들은 길에서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고 당시 사람들이 늘 하던 질문을 합니다.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여쭈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누가 죄를 지었기에 그가 눈먼 자로 태어났나이까? 이 사람이니이까, 그의 부모이니이까? 하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나 죄를 짓지 아니하였으며 다만 이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고자 함이니라.

요 9:2-3

예수께서는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막으십니다. 본인의 죄도 부모의 죄도 이 눈먼 상태의 이유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두고 고난의 이유를 따지는 대신 그를 고치시고, 나중에 다시 찾아가 만나십니다 (요 9:35-38).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나타난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그 목적을 위해 이 일을 허락하셨다는 뜻으로 읽기도 하고, 이제 예수께서 하실 일을 가리키는 말로 읽기도 합니다. 어떻게 풀든 병자에게 죄를 물을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누가복음 13장에서도 예수께서는 빌라도에게 죽은 갈릴리 사람들과 실로암 망대에 깔려 죽은 사람들이 남보다 죄가 더 많았느냐고 물으시고 아니라고 답하십니다 (눅 13:2-5). 이 이야기는 자연재해는 왜 일어나는가?에서 더 다룹니다.

욥기는 이 질문을 가장 깊이 파고듭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이렇게 묻습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욥 4:7). 이 말은 신명기의 언약 가르침과 같은 소리로 들립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어기면 염병과 열병이 따르리라는 경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 28:21-22). 그러나 친구들은 민족에게 주어진 경고를 한 개인의 병상에 그대로 대입했습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이렇습니다.

주께서 욥에게 이런 말씀들을 하신 뒤에 주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 진노가 너와 네 두 친구를 향해 타오르나니 너희가 내 종 욥과 같이 나에 대하여 옳은 것을 말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욥 42:7

고난당하는 사람의 죄를 캐던 친구들이 책망을 받았다는 사실은 병든 사람을 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경고가 됩니다. 이사야서의 종은 우리의 질고를 지신 분인데,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이렇게 보았다고 고백합니다.

참으로 그는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였거늘 우리는 그가 매를 맞고 하나님께 맞아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였노라.

사 53:4

마태는 예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신 일을 이 말씀의 성취로 봅니다 (마 8:16-17). 우리가 고난받는 이를 하나님께 맞는 자로 보았을 때 가장 크게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병과 죄의 연결을 전혀 말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주의 만찬을 합당하지 않게 치르는 것을 꾸짖으며 이렇게 씁니다.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를 위하여 정죄를 먹고 마시느니라. 이런 까닭에 너희 가운데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많도다.

고전 11:29-30

야고보도 병든 사람을 위한 기도를 권하면서 죄를 언급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그가 죄들을 범하였을지라도 그것들을 용서받으리라.

약 5:15

두 본문의 말투를 보십시오. 바울은 특정 교회의 특정한 잘못을 두고, 그 공동체에게 자신을 살피라고 말합니다. 야고보는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라고 말하며, 병든 사람마다 죄가 있다고 하지 않고 병든 사람이 회개와 용서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병과 죄가 이어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병든 본인과 함께 기도하는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헤아릴 일이지 밖에서 진단할 일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병과 죄를 모두 다루십니다. 친구 네 명이 중풍병자를 지붕 위로 달아 내렸을 때 예수께서 먼저 하신 말씀은 병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마비 병 환자에게 이르시되, 아들아, 네 죄들을 용서받을지어다, 하시니라.

막 2:5

이 말씀이 중풍이 그의 죄 때문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서기관들이 용서하는 권세를 의심하자 그 사람을 일으켜 세우셨고 (막 2:10-11), 이는 그분이 몸과 영혼 모두를 고치시는 분임을 보인 것입니다. 용서가 먼저 나온 것은 이 사람에게 가장 깊은 필요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친구들의 믿음과 사랑이 있고 비난이 없습니다.

교회의 증언

교회는 병을 개인적인 징벌의 눈금으로 읽지 않으려고 애써 왔습니다. 요한복음 9장을 풀면서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벌을 받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크리소스토무스. 아우구스티누스는 더 정교하게 말합니다. "이 사람도 그 부모도 죄를 지었으나, 그 죄가 그가 소경으로 태어난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모든 사람이 죄인이지만 그 사실이 눈먼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매튜 헨리도 같은 본문에서 이렇게 씁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보통이 아닌 재난에 대하여, 그것이 언제나 죄에 대한 특별한 형벌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매튜 헨리. 그리고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을 두고는 그들의 행위가 "사람들이 곤경에 처한 동료 피조물들에 대해 가져야 할 동정심을 가르칩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매튜 헨리. 헨리는 이 마가복음 본문에서 "죄는 우리의 모든 아픔과 병의 원인입니다"라고도 쓰고 매튜 헨리, 병중에는 무엇보다 죄 사함을 구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말을 보통이 아닌 고난을 특별한 형벌로 여기지 말라는 경고, 그리고 고통받는 이를 향한 동정과 함께 붙들었습니다.

원어로 보기

이사야 53:4의 "질고"는 히브리어 홀리(חֳלִי)이고, "병"과 "질병"을 뜻하는 평범한 단어입니다. 이 말은 신명기에서 재앙의 목록에 나오기도 하고 (신 28:61), 여기서는 종이 대신 지고 가는 것으로 나옵니다. 같은 낱말이 징벌의 자리에도, 대신 짊어짐의 자리에도 쓰이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병은 흔히 아스테네이아(ἀσθένεια)입니다. 글자 그대로는 "힘이 없음"이고, 병도 연약함과 같은 낱말로 불립니다. 병은 죄를 재는 잣대가 아니라 사람이 가진 연약함의 이름입니다. 또 야고보서 5:15의 "구원하리니"는 소조(σῴζω)이며, "구하다, 낫게 하다, 회복시키다"를 모두 뜻할 수 있는 폭넓은 말입니다. 병든 사람을 위한 기도가 몸과 영혼의 온전함을 함께 구하는 기도임을 보여 줍니다.

흔한 반론과 답

"성경은 죄가 세상에 들어와 사망이 왔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병도 결국 죄의 결과가 아닌가." 이 반론은 일리가 있습니다. 바울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고 씁니다 (롬 5:12). 질병과 죽음이 타락한 세상의 일부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대체로 함께 말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세상 전체의 상태와 한 사람의 병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습니다. 세계가 죄로 망가졌다는 말은, 이 병이 이 사람의 이 죄 때문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막으신 것은 바로 이 둘을 한 줄로 잇는 일이었습니다. 병이 이 세상의 깨어짐에 속한다는 사실은, 병든 사람을 정죄하는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위해 함께 탄식하고 돕는 이유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낫는다고 하지 않는가. 낫지 않는 것은 믿음이나 죄 때문이 아닌가." 이 생각은 병든 사람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줍니다. 성경은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지만, 낫지 않는 사람이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동역자 에바브로디도는 죽게 되도록 병들었고 (빌 2:25-27), 바울은 드로비모를 병든 채 밀레도에 두었으며 (딤후 4:20), 디모데에게는 잦은 병 때문에 포도주를 조금 쓰라고 권합니다 (딤전 5:23). 바울 자신도 육체의 가시를 거두어 달라고 세 번 간구했으나 이런 대답을 들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고후 12:8-9). 왜 어떤 사람은 낫고 어떤 사람은 낫지 않는지는 하나님은 왜 고쳐 주시지 않는가?에서 따로 다룹니다. 마음의 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울증이 믿음의 부족이 아니라는 점은 우울증은 믿음이 부족해서인가?에서 다룹니다.

"나는 내 병이 내 잘못 때문이라고 느낀다. 정말로 내 선택이 병을 불렀을 수도 있다." 이 말은 정직하며, 때로는 사실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선택은 몸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자기 죄를 하나님 앞에서 아파하는 시편의 사람이 있습니다. 시편 38편의 기자는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시 38:3). 그러나 그는 그 말을 다른 사람에게서 듣지 않았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고백하고 도움을 구했습니다. 고백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초대이지 환자가 스스로를 재판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롬 8:1). 선택이 병에 영향을 미쳤을지라도 의사와 곁에 있는 사람의 돌봄이 필요하다는 점은 변하지 않으며, 도움은 비난 없이 와야 합니다.

더 생각해 보기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정직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병은 이 깨어진 세상에 속한 일이며, 그 병을 앓는 사람의 죄의 눈금이 아닙니다. 어떤 병이 죄와 이어졌는지는 병든 본인이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물을 수 있는 일이지 다른 사람이 판정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병든 사람에게 비난이 아닌 손길과 용서와 치유로 다가가셨습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병든 사람 앞에서 이유를 찾으려 합니까, 곁에 앉으려 합니까? 내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은 하나님이 내게 하시는 말씀과 같습니까, 아니면 욥의 친구들의 말에 더 가깝습니까? 병든 사람을 위해 내가 지붕을 뜯어서라도 데려가고 싶은 이는 누구입니까?

더 읽으려면 하나님은 왜 고쳐 주시지 않는가?와 고난에도 의미가 있는가?를 보십시오. 요한복음 9장과 욥기 42장을 이어서 읽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