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예수는 왜 기적을 행하셨는가?

짧은 답

복음서는 예수의 이적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다는 표이고, 고통받는 사람을 향한 긍휼의 행동이며, 예수가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표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채우거나 요구에 따라 자신을 증명해 보이려고 이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대자들조차 그분이 놀라운 일을 행한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고 그 출처를 문제 삼았습니다.

성경의 답

복음서에서 예수의 이적은 곁다리가 아닙니다. 마가복음은 시작부터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는 장면으로 가득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일이었을까요? 복음서가 직접 말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이적은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는 표입니다. 옥에 갇힌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직접 대답하는 대신 일어난 일을 가리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가서 너희가 듣고 보는 그것들을 요한에게 다시 보이되 곧 눈먼 자들이 시력을 받으며 다리 저는 자들이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정결하게 되며 귀먹은 자들이 들으며 죽은 자들이 일으켜지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선포된다, 하라.

마 11:4-5

이 말씀은 이사야가 약속한 그 날, 곧 "그때에 눈먼 자의 눈이 열리고 귀먹은 자의 귀가 열리며"이라던 날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 35:5). 귀신을 쫓아내신 일에 대해서도 예수께서는 같은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내쫓으면 분명히 하나님의 왕국이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눅 11:20

이적은 다가오는 천국의 맛보기입니다. 병과 죽음과 악이 물러가는 모습은 하나님이 다스리실 때 세상이 어떻게 될지를 미리 보여 줍니다.

둘째, 이적은 긍휼에서 나왔습니다. 한 문둥병자가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고 엎드렸을 때, 복음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정결할지어다, 하시니라.

막 1:41

당시 문둥병자는 만져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고치실 수 있었는데도 예수께서는 손을 대셨습니다. 외아들을 잃은 과부 앞에서는 "주께서 그녀를 보시고 그녀를 불쌍히 여기사 그녀에게, 울지 말라, 하시고" 아들을 일으키셨습니다 (눅 7:13).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는 "예수님께서 우시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 11:35). 이적은 그분의 마음이 움직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셋째, 이적은 예수가 누구신지를 가리킵니다. 요한은 이적을 '표적'이라 부르며, 첫 표적을 두고 "예수님께서 기적들 중의 이 처음 기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사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을 믿으니라."고 씁니다 (요 2:11).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도 분명합니다.

이것들을 기록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그러나 예수는 이적을 과시의 수단으로 쓰지 않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시험하자 "그분께서 자신의 영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는가?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는 아무 표적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거절하셨고 (막 8:12),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 12:39). 빵을 먹은 무리에게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너희가 기적들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요 빵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요 6:26). 이적을 보고도 그것이 가리키는 분을 보지 못하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증언

교부들은 이적의 긍휼과 권위를 함께 보았습니다. 크리소스토무스는 예수께서 문둥병자를 굳이 만지신 이유를 이렇게 풉니다. 율법에서는 문둥병자를 만지면 부정해지지만, 이는 그분이 "종으로서가 아니라 주로서 건강을 주신다는 것을 보이시려는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크리소스토무스. 같은 크리소스토무스는 가나의 혼인 잔치를 풀면서 "그리스도께서 이적으로 이루시는 결과는 자연이 내는 산물보다 더 아름답고 더 좋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크리소스토무스. 이적은 창조를 부수는 것이 아니라 창조를 완성하는 쪽으로 향한다는 뜻입니다.

매튜 헨리는 이 점을 인격적으로 풀이합니다. 문둥병자 이야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자신을 그분의 뜻에 맡기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은총을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라고 쓰고 매튜 헨리, 또 그리스도께서 "백성의 칭찬을 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려 하셨습니다"라고 짚습니다 매튜 헨리. 마태복음 11장에서는 "사람들이 보고 듣는 이런 일들을 성경과 견주어 보면 구원을 찾을 길이 어느 쪽인지 알려 줍니다"라고 합니다 매튜 헨리. 이적은 혼자 서 있는 증거가 아니라 성경의 약속과 함께 읽혀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20:31에 대해서도 헨리는 이 책이 기록된 것은 "모든 사람이 예수께서 약속된 메시야이시며 죄인의 구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이라고 요약합니다 매튜 헨리. 니케아 신경은 성자를 참 하나님으로 고백하는데, 교회가 이적을 읽는 방식도 이 고백 안에 있습니다. 이적은 신비한 능력의 전시가 아니라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사랑이 몸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니케아 신경.

원어로 보기

요한복음이 '이적' 대신 즐겨 쓰는 말은 세메이온(σημεῖον), 곧 '표적'입니다. 표적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어딘가를 가리키는 팻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표적을 보고도 표적이 가리키는 분을 믿지 않는 일이 문제가 됩니다. 공관복음은 흔히 뒤나미스(δύναμις), 곧 '능력'이라 부르는데, 하나님의 힘이 실제로 역사했다는 면을 강조합니다. 두 낱말이 합쳐지면 이적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난, 하나님을 가리키는 사건'이 됩니다.

마가복음 1:41의 "민망히 여기사"에는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가 쓰였습니다. 이 말은 '내장'을 뜻하는 낱말에서 나와, 속이 움직일 만큼 깊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복음서에서 이 동사는 비유 속 몇 인물을 빼면 예수께만 쓰입니다. 다만 정직하게 덧붙일 점이 있습니다. 이 구절의 고대 그리스어 사본 하나(베자 사본)와 일부 고대 라틴어 사본에는 '불쌍히 여기사' 대신 '분노하사'가 있고, 어려운 읽기가 원본에 가깝다는 이유로 이를 택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문둥병과 그 고통을 향한 거룩한 마음이 있었고, 그분이 손을 대셨다는 사실은 같습니다.

흔한 반론과 답

"고대인은 속기 쉬웠고, 기적 이야기는 전설이 자란 것이다." 가장 진지한 형태의 반론은 이렇습니다. 고대 세계에는 기적 이야기가 흔했고, 다른 종교에도 있으며, 증거가 없는 한 우리는 늘 자연의 규칙성을 더 믿어 왔다는 것입니다 흄, 인간 지성에 관한 탐구 10장. 이 지적에는 맞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든 무비판적으로 믿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대 사람들도 죽은 사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복음서의 사람들도 놀랍니다. 또 이적 전승은 마가, 요한, 예수의 말씀을 모은 전승 등 여러 층에 퍼져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반대자들의 반응입니다. 서기관들은 이적을 부인하지 않고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이르되, 그가 바알세붑에 사로잡혀 마귀들의 통치자를 힘입어 마귀들을 내쫓는다, 하거늘"고 그 출처를 문제 삼았습니다 (막 3:22). 요세푸스는 예수를 놀라운 일을 행한 사람으로 소개하고(이 대목에는 후대의 손질이 있지만 그 핵심은 요세푸스의 글로 보는 학자가 많습니다)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8.63, 2세기의 비판자 켈소스와 탈무드에 남은 후대 유대 전승도 그것을 마술로 설명했습니다. 이것으로 이적이 일어났다고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예수가 '이상한 일을 행하는 이'로 알려져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적이 불가능하다고 미리 말할 이유는 없다는 점은 기적은 가능한가?에서 더 다룹니다.

"긍휼 때문이었다면 왜 모든 병자를 고치지 않으셨는가? 지금은 왜 이렇지 않은가?" 이 질문은 아프게 다가옵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께서 고치신 사람은 많았지만 세상의 모든 병자는 아니었고, 고침받은 사람과 살아난 나사로도 결국은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적을 최종 해결이 아니라 표로 읽습니다. 그것은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는 표입니다. 병과 죽음이 완전히 사라지는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답이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은 왜 고쳐 주시지 않는가?에서 따로 이야기합니다.

"표적을 거절하셨다면서 표적을 행하신 것은 모순이 아닌가?" 예수께서 거절하신 것은 시험하려고 요구하는 표적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믿으려는 마음이 아니라 올무를 놓으려는 마음으로 하늘의 표적을 청했습니다 (막 8:11). 그러나 같은 예수께서 "내가 만일 내 아버지의 일들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들은 믿으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음을 너희가 알고 믿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요 10:37-38). 요청받아서 증명하는 이적과, 고통 앞에서 마음이 움직여 행하는 이적은 다릅니다. 예수께서는 앞의 것을 거절하시고 뒤의 것을 행하셨습니다.

더 생각해 보기

복음서의 이적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픈 사람 앞에서 무관심하지 않으시며, 세상의 고장 난 것들은 언젠가 고쳐지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적을 보는 것과 예수를 믿는 것은 같지 않다는 것도 복음서는 숨기지 않습니다. 이적은 문을 가리킬 뿐이고, 문 안에 계신 분은 예수 자신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무엇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까? 그 요구는 알고 싶은 마음에서 나왔습니까, 아니면 믿지 않을 핑계를 찾는 마음에서 나왔습니까? 예수께서 내 고통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다는 말은 나에게 어떤 위로가 됩니까?

더 읽으려면 예수는 누구인가?와 예수는 메시아인가?를 보십시오. 마가복음 1장을 천천히 읽으며 예수께서 누구를 만나시는지 살펴보는 것도 좋은 시작입니다.

출처

  1.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니케아 신경 325/381 — 동서방 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신조. 읽기
  2. 데이비드 흄, 인간 지성에 관한 탐구 10장 / Section 10 (1748) — 기적에 대한 증언을 믿을 수 없다는 고전적 논증.
  3.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8.63–64 — 93년경. 예수에 관한 기록(후대 기독교인의 첨가가 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